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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ㅣ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평점 :
25년전 ...8살 무렵, 겨울 방학 때의 일이다. 할머니께서 요양 차 내려가 계시던 영천이라는 곳에서 한달정도를 보낸 적이 있다. 조그만 시골집을 빌려 두 내외분이 계시던 곳엔 놀이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그 흔한 그네 하나 메달아 둔 곳 없이 주위엔 온통 논과 밭뿐 이었다.
낯선 곳 에서 아이들 소리를 쫓아 동네 빈터로 나가보니 남자 아이들 대여섯은 전봇대 주위에 모여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고 여자아이들은 볕 좋은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숙기가 없던 난 먼 발치에서 하릴없이 애먼 땅바닥만 구둣발로 툭툭차고 있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새된 목소리로 "나랑 놀래?" 하며 작은 손을 내밀던 자그마한 아이가 있었다.
얼결에 고사리 같은 손에 이끌려 그 아이의 집까지 가게 되었는데, 한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쪽방에 모여 있는 그 아이의 엄마와 아빠, 동생까지 네 식구가 , 방안데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오려다 보며 예쁘다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난 그날 이 세상에서 최고로 예쁜 공주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할머니, 나 노늘 민영(?)이라는 애집에 갔는데, 걘 나랑 나이는 똑같은데, 나보다 키가 엄청 작고 걔네 엄마랑 아빠도 나처럼 작다. 근데, 나보고 공주같이 예쁘 다고 했다." 들떠서 재잘대는 나를 시종일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던 할머니는 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나보다 2살이나 어린 옆집 딸아이를 데리고 와서 나랑 붙여 주셨다.
나이에 비해 똘똘한 그 아인 나를 동네아이들 무리로 이끌고 가서 친구로 만들어 주었고 방학이 끝나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 난 그 아이들 틈에 끼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재미있는 한때를 보냈던 적이 있다.
두 페이지쯤 넘기다 추억에 빠져버린 나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아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아인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인 어디 있었지, 도대체 내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먼저 손 내밀어줬던 그 키 작은 친구 를 단 하루 만에 내 머릿속에서 밀어내 버렸던 것이다.
그 아인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어울릴 생각 조차 못 해봤던 동네아이들과 한데 섞여 자기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마냥 신이 나서 쫓아 다니던 내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을 게다. 바르톨로메도 늘 그랬다.축구를 하는 형과 동네아이들을 그저 먼발치 에서 물끄러미 지켜봐야 했고, 늘씬한 다리를 가진 자신의 형제들을 부러운 눈으로 시샘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에게 너무나 무관심한 아버지 또한 숨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무관심보다 무서운 것이 있을까? 후안(바르톨로메의 아버지)에겐 진흙 덩어리로 뭉쳐놓은 것처럼 작고 뭉툭한 발과 몸에비해 너무나 긴 팔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 손으로 땅을 짚고 걸으면 네발달린 짐승처럼 보이는 곱사등이 아들을 항상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왕실 마부로 일하고 있던 후안이 고향을 떠나 마드리드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다.
그에게 불구 아들은 더 이상 자식이 아니었다. 그저 숨기고 감추어야할 떼 내고 싶은 혹 덩어리에 불과한 듯 했다. 아버지에게 조차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바르톨로메는 어린 마르가르타 공주의 놀잇감으로 전락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난쟁이조차 자신을 한낱 인간개로 취급을 하고 비웃는 상황에서 그는 묵묵히 고통을 감수한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바르톨로메의 분장을 맡은 화방도제 안드레스만은 그의 진심어린 친구가 되어주는데...
어느 날, 안드레스의 배려로 그림을 그려보는 바르톨로메의 그림을 보고 왕실 화가를 비롯한 화방도제 모두가 그의 숨은 재능을 알아본다. 또한 자신도 흑인 이였지만, 벨라스케스의 도움으로 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파레하가 바르톨로메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다행히도 화방 도제들과 가족의 도움으로 바로톨로메는 자유의 몸이 된다.
"난 개가 아니에요." 라고 외치던 바르톨로메의 내면엔 누구보다도 인간다워지기를 원하는 한명의 평범한 소년의 모습이 있을 뿐 이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바로톨로메의 절규는 진한 감동 이상의 뉘우침을 가르쳐주는 대목인것 같다.
고향의 로드리케스 신부가 바르톨로메에게 들려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신체의 장애를 극복하고 보통사람 이상의 투지로 재능을 발휘해 사회 구석진 곳에서 묵묵히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내하며 오히려 정신적 불구를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세상의 모든 바로톨로메에게 찬사를 보내고싶다.
마지막으로 두발로 잽싸게 뛰어다니며 축구경기를 하는 아이들을 한 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바르톨로메와 닮았던 추억 속 난쟁이 친구에게 나의 무관심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 지를 돌이켜 보며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친구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