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
틱낫한 지음, 박윤정 옮김 / 명진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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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전철역 오르내리는 통로 옆에 요즘 연등이 걸려 있습니다. 분홍빛 연등에 아기 부처 그림과 '부처님 오신날'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던 자리입니다. 종교가 없는 저는 5월과 12월에 등장하는 그 두 상징물에서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바쁜 출근길, 피곤한 퇴근길에 눈요기 이상의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에게 <화>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에 대해서는 말로만 전해들었을 뿐 저도 아직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면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이기도 하고, 마침 틱낫한 스님이 새 책을 내고, 겸사겸사 그의 베스트셀러 <화>를 거저 주는 행사를 하고 있어 주문을 했던 것입니다.

제목은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입니다. 이 책에서 스님은 개인적으로 법화경 읽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불교 경전을 뭐 하나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으니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법화경만큼은 많은 애착이 갑니다. 대학 다닐 때 한때 불교에 관심이 많아 여러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법화경 한글본과 한역본, 그리고 해설서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흔히 법화경을 '경전의 왕'이라고 말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법화경의 탄생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초의 원시 불교과 부파 불교의 분화를 거쳐 '대승'이라는 불교 내의 개혁적 운동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를 유일한 부처로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수행을 통해 기껏해야 '아라한'(소승 불교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성자)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가자들은 개인의 깨달음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바깥 세상의 어려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승가는 점점 보수화되었습니다. 부처가 열반에 들고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대승은 기원전 1세기 경 불교 내에 일어난 매우 급진적인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개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관행에 반기를 들고, 출가자와 재가 불자를 모두 수용하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하려는 혁명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불교가 매우 참여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상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여러 대승 경전이 간행되는데 <반야바라밀경>, <보적경>, <화엄경>, <유마경> 등이 그러합니다. 소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개혁적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이때까지의 대승 경전에서는 소승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법화경에 이르러서 진정으로 대승 사상이 완성되기에 이릅니다.
법화경은 대승경전 중에서 부드러운 언어를 구사하고 불교의 모든 종파와 사조들을 받아들인 첫 번째 경전입니다. 법화경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출가 불자인 비구와 비구니, 재가 불자인 우바이와 우바새로 이루어진 완전한 승가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 책의 앞 부분에서 법화경의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서품에서 보현보살권발품에 이르기까지 법화경 28품(장)의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다시 각 장마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씀 드리건데, 틱낫한 스님의 이 책은 법화경에 관한 최고의 해설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쉽고 명쾌하게 법화경의 내용과 그 뜻을 알려주는 책은 아직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법화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역사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 그리고 '실천적 차원'으로 나눠 설명하는데, 이로 인해 법화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표면의 말에 갇혀 기적적인 사건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솔직히 무협지와 같은 허황된 묘사에 삐딱한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는데, 스님의 설명으로 명쾌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진장의 시간 개념과 한량없는 공간 개념에 대해서도 서서히 이해되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거나 거부감이 있는 분들은 굳이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불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 또는 기존의 불교 서적의 난해함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부처님 오신날 즈음하여 이 책 한 권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참고로 '경'은 산문으로 된 긴 글을 뜻합니다. 그 전까지 부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데, 구전하기에 쉽게 운문 형태로 전해졌습니다. 법화경에도 운문 형태의 게송이 많이 실렸는데, 아마도 운문이 먼저이고 그것을 상세하게 풀어서 곁들였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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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킨 화가들 - 14인의 화가들과 만나는 그림여행 에세이 매혹의 예술여행 1
박서림 지음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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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리뷰할 때가 가장 곤혹스럽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봤으나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리 좋지 않은 책 같지는 않으나 딱히 추천하기도 뭣한... 이런 느낌이 들 때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좀 막막합니다.

이 책은 공주형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비슷한 류의 책이라 생각해 샀습니다. 주중에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을 했는데 주문량이 많아 금요일 저녁에 정말 가까스로 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급한 약속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택배 아저씨와 몇 번의 전화 통화 끝에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누가 그 광경을 지켜봤더라면 무슨 굉장한 물건을 받는 줄 알았을 겁니다.

그 전에 읽던 책이 따로 있었지만 이 책부터 읽었습니다. 표지는 에곤 쉴레의 <겨울 버찌와 자화상>. 물론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에곤 쉴레를 알 턱이 없지요.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곁눈질하듯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깡마른 얼굴, 큰 눈의 에곤 쉴레,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화가에 대해,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해...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저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미술 전공자 박서림의 <여행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저자는 스스로 심취해있는 작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여행을 하며 그 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작가에 대해 기초적인 상식이 부족한 저에게 그녀의 여행 후기는 낯설었습니다. 그녀의 정서와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책 선정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함량 미달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잘못 고른 것이지요. 화가와 그림에 대한 저의 일천한 지식을 어찌 좀 보완해볼까했는데 저자는 최소한의 상식은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썼으니까요. 나의 그림에 대한 지적 수준이 조금이라도 높았더라면, 그래서 저자의 호흡과 행보를 따라갈 수 있었다면 꽤 괜찮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차례에 걸쳐 3년 동안 화가의 과거를 따라 여행한 저자의 경험을 온전히 느낄 수만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미술사 관련 책을 살펴보니 다카시나 슈지의 <명화를 보는 눈>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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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부터의 반란 - 김진경 교육 에세이
김진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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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중간고사를 마친 학교가 꽤 있을 것입니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다음 주 정도면 거의 끝날 것입니다.
오는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의 첫 대상인 현재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는 내신 상대평가제가 적용됩니다. 시험을 내는 입장에서는 동점자가 많이 생기지 않도록 변별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제를 훨씬 어렵게 낼 수밖에 없을테고, 학생 입장에서는 반드시 좋은 성적을 얻어 상위 몇 퍼센트 안에는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이 '내신전쟁'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이번 주 주요 신문들은 새로운 내신상대평가제도에 대해 현장의 소리를 근거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공교육 내실화를 위한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가 오히려 사교육을 더 부추긴다고까지 합니다. 하기야 우리나라 교육제도 또는 입시 평가 제도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으니 딱히 놀랄 것도 없습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고교 등급제', '대학별 본고사', '기여 입학제' 등 이른바 교육부의 3불 정책과 관련된 문제는 끊임없이 논쟁을 낳았습니다. 도무지 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입장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우리나라의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권이나 장관이 바뀔 때마다 '개선'과 '개혁'의 이름으로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를 바꾸려고 머리를 싸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는 흔들리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세대 간의 시각차만 커지고 있습니다.

<미래로부터의 반란>에서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점수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제도'는 손 대지 않고 유지하며 경쟁에서의 공정성만을 부분적으로 모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넘어가면서 '인재'에 대한 개념이 바뀜에 따라 '우수 학생'의 개념도 변화되었고, 입시 제도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대입 개선안조차 '사교육비 경감 대책' 차원에서 기능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개혁적 요소는 사라지고 왜 수능의 변별력을 낮추어야 하는지, 왜 고교 내신의 비중을 높여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과다한 사교육비를 낮추고 지나친 점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건 아이들을 전부 하향 평준화시켜서 나라의 장래를 망치자는 거냐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우수 인재에 대한 개념이 변하였으니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 수능을 자격고사화하여 등급제로 바꾸고 전형 요소를 다양화해야한다는 근본 논리는 사라진 채, 고교 내신의 객관적 변별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로만 문제가 집중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고1 교실은 '내신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학생들의 불만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능 등급제, 고교 등급제, 본고사 등 현재 교육의 주요 쟁점에 대해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고교 등급제와 관련해서는 저자의 말보다 오히려 "선배의 학력에 의해 후배들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제도"라는 학생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있을 수 있는 학교 사이의 학력 차이를 개인의 차이로 고착시키는 것은 차별을 제도화한다는 점에서 반인륜적이기까지 하다"는 어느 신문의 사설을 보면서 교육부와 대학이 과연 할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기와 적성, 전공에 대한 관심도와 준비 정도,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뽑으라는 교육부의 요구는 수십 년간 국가 시험이나 대학별 본고사를 통해 학생들을 쉽게 뽑아 온 대학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교육부 또한 보다 확실한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모호한 기준만 제시하는 무능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진로 교육 개념'을 교육의 원리로서 학교 교육에 전면화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때 진로 교육은 과거의 직업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진로 교육은 어떤 하나의 직업을 준비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그 아이의 직업과 관련된 인생 행로 전체를 준비시키는 교육입니다. 이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이미 행했던 교육 개혁 모델을 참고한 것입니다. (저자는 미국을 모델로 이야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만 클린턴 행정부의 교육 개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가 지향하는 학교와 교육의 상을 제시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의 학생들의 생활을 교과 활동, 학급 활동, 진로 활동으로 나누고 각 활동의 지도를 책임지는 세 담임을 두자고 합니다. 현재의 기본 - 보충 - 심화 과정은 결국 우열반 제도이니, 이를 개선하여 기본(보충포함) - 심화로만 나누고 이 때 심화는 진로 희망에 따라 관련 교과의 심화 과정을 두자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참고로 저자 김진경은 1985년 서울 양정고등학교 재직시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 생활을 하고 교육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시집과 소설, 어른을 위한 동화 등을 썼으며, 2000년에 다시 복직하여 4년 정도 다시 교단에 섰습니다.
이 책은 그가 다시 교단에 서서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쓴 '교육 에세이'인데,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인 듯 하다가 뒤로 갈수록 현재 입시제도에 대해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무거운 얘기로 흘러갑니다. 학부모 입장에서 쓴 앞 부분의 이야기는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줍니다. 뒷 부분에서는 흔들리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면서 매우 비관적인 얘기로 흐릅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이 나라의 교육과 학생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에필로그의 제목은 '희망은 있다'입니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모든 분들, 그리고 학생이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이 땅의 모든 학부모님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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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 다정한 큐레이터 공주형이 사귄 작품들
공주형 지음 / 학고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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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책이 처음 출간되자마자 사뒀다가 지금에서야 다 읽었습니다. 아마 제목이 좋아서 샀던 것 같습니다. 그림에 대한 지극히 비뚤어지고 난해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나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던 '그림'을 함께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현실과 정서에 더 가까운 책들을 먼저 읽다보니 늘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퇴근길에 틈틈이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은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림 그리기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게 있었으니, 문제는 그림 그리는 도구였습니다. 물감의 색은 부족했고, 이상하게도 나의 물감은 뭔가 색이 잘 안 묻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붓도 한 둘밖에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마저도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좋은 물감과 다양한 크기의 질좋은 붓을 사용할 때, 어린 마음에 불만이 좀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은 없지만요.
포스터를 그리는 날에는 내가 가진 도구에 대한 불만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포스터를 꽤 많이 그렸던 것 같습니다. 불조심, 반공, 수출 100만불 기념 등등. 그런데 포스터는 다른 수채화와는 달리 일반 물감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색을 균질하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색을 칠해도 얼룩덜룩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애들은 '포스터 칼라'를 사용했습니다. 깨끗하고 균질한 색감, 아직까지도 미술 시간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포스터 칼라'입니다. 정말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은 '크로키' 시간이었습니다. 도화지와 4B 연필만 있으면 됐으니까요.

그러나 미술 시간에 대한 이러한 추억도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그 후 그림을 직접 그리기 보다는 미술사에 대해 암기해야 했고, 그저 그렇거나 이해하기 힘든 그림을 좋은 그림(名畵)이라고 강요당했습니다. 그림 보는 재미가 휘발된 채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림과 제 삶과의 연관 관계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불편했습니다. 해석해야할 것 같았고, 정작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쉽게 이해하고 느껴지는 그림은 분명 명화는 아닐 것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고, 그림에 대해 제각각 한 마디씩 늘어놓을 때, 저는 그런 행동과 말에 엄청난 가식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까지 전 '모나리자'가 뭐 그리 대단한 작품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림' -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명화' - 은 늘 불편하고 멀리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림이 조금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책이나 블로그에서 그림을 만나면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후배가 다음 칼럼(블로그 이전 버전)에 글을 쓰면서 꼭 그림과 음악을 곁들였는데, 화가도 작품명도 모르는 그런 그림에서 '글'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문득 그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거부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거리감'은 여전했습니다.

공주형의 글을 만난 건 참 행운입니다. 공주형은 글을 잘 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그림이 '생활'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자>, 김상유의 <세심정>, 박수근의 <실직>, 고흐의 <누에넨의 감자 먹는 사람들>,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도미에의 <삼등열차>와 <일등열차>, 고흐의 <룰랭의 초상>, 마네의 <술집 여종업원> 등은 그녀의 안내가 없었다면 결코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림이라고 해서 모두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글과 싫어하는 글을 나누어 받아들이듯, 내게 좋아하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듯이, 그림 역시 개인에 따라 그 취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림에 대한 거리감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이 단순한 발견을 하는 데 저는 삼십 오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준 동갑내기 큐레이터 공주형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친 김에 박서림의 <나를 매혹시킨 화가들>이라는 책도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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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오션 전략
김위찬 외 지음, 강혜구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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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서를 읽고 감동하신 적이 있습니까?

사업과 마케팅이 현실의 삶과 맞닿아 있다면, 이런 책을 읽으며 결코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앎에 대한 희열을 느끼기도 전에 현실 고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경제경영서에서 다루는 문제가 삶의 문제가 직결될 때, 이에 대한 혜안을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책보다 진한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전에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의 ≪마케팅 불변의 법칙≫ ≪포지셔닝≫을 읽고 감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저 그런 얘기 또는 다 아는 얘기라고 하기에는 그 책이 주는 사고의 명쾌함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그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마케팅의 관점을 정립하고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소소한 과過를 능히 넘어서고도 남습니다.

피터 드러커의 예지銳智에도 감탄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는 다소 시차가 생깁니다. 그의 말은 지극히 옳고 노인老人의 날카로운 지혜가 감동을 주지만 전적으로 실행하는 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 너무 큽니다. 따라서 그의 책은 원론이지 당장의 실행 지침서가 아닙니다.
잭 트라우트나 알 리스 역시, 이 점에서만큼은 피터 영감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케팅을 계획할 때 그들의 혜안에 많은 도움을 받지만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막막함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몫입니다. 나만의 방법론이 따로 필요합니다. 거기에 이론과 실행의 시차가 발생합니다.

≪블루오션 전략≫을 읽고 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위에서 말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의 핵심은,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의 신선함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도구'를 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입니다.  

저자는 영원히 성공하는 기업도, 영원히 성공하는 산업도 없으므로 기업이나 산업이 그들의 분석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한 산업 또는 기업이 강력하고 수익성 있는 성장 궤도에 오르는 결정적인 핵심 요소는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한 '전략적 이동'에 있다고 말합니다.

말이 어렵지만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시장은 '블루오션'을 말하고, 매 시기마다 그 블루오션으로 이동한 기업이 성장 궤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블루오션은 레드오션에 대비되는 말입니다. 레드오션은 유혈의 붉은 바다를 뜻하는데 경쟁이 치열한 시장 공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이미 게임의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주도하는 자가 경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반면 블루오션은 기존의 게임의 법칙이 미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시장입니다. 한 마디로 미개척 시장 공간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레드오션의 경쟁에서 벗어나 블루오션으로 가라"

이쯤 얘기하면, 혹자들 중에 '말 장난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실제 이 책에 대한 인터넷 서평을 보면, 누구는 출근길에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하고, 누구는 또 블루오션이 신기루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런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볍게 읽고 덮기에는 이 책이 주는 메시지와 사고의 틀이 너무나 강렬하고, 신기루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책의 핵심 주제인 "가치혁신"에 대해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레드오션에서 무조건 벗어나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전략이 절실한 자는 기존의 게임의 법칙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게임에는 승자보다는 패자가 다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은 불행한 자의 몫입니다.
블루오션은 기존의 게임 법칙을 벗어난 곳입니다. 메테를링크는 그의 동화 ≪파랑새≫를 통해, 행복은 찾아 나서야 할 만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 줍니다. 마찬가지로 블루오션 역시 다행히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모든 구매자들은 어떤 상품을 구매하기 전에 항상 마음 속으로 대안 상품을 함께 생각합니다. 레스토랑에 갈 것인가 영화를 볼 것인가를 저울질합니다. 레스토랑과 영화관은 직접적인 경쟁 관계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매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고려의 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판매자의 입장이 되면 이런 직감적 사고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블루오션으로 가는 첫 번째 열쇠가 있습니다.

저자는 블루오션을 찾기 위해, 이렇듯 먼저 대안 산업을 관찰하고, 산업 내 전략적 그룹을 관찰하고, 구매자 체인을 관찰하고, 보완적 제품 서비스 상품을 관찰하고, 구매자의 기능적, 감성적 매력 요소를 관찰하고, 시간의 흐름을 고찰하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이 그림을 위해 저자는 '전략 캔버스'라는 도구를 선물합니다.
왼쪽 그림은 옐로 테일이라는 와인이 미국 내 와인 시장을 석권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전략 캔버스입니다.
기존 와인 시장은 저가 와인과 프리미엄 와인으로 양분되었는데, 그들 각각의 그룹 내에서 와인 업체들은 별 차별성 없이 동일한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가격과 산지 전통, 숙성도나 품질, 와인의 종류 등 모든 면에서 프리미엄 와인은 높게, 저가 와인은 낮은 상태를 유지했습니다(가로 축은 해당 산업의 '경쟁 요소'를 나타내고, 세로 축은 그 경쟁 수준의 높낮이를 표시합니다).그들은 급級이 다를 뿐 게임의 규칙은 동일했습니다.
이 때 카셀라 와인즈는 와인 시장이 아닌 맥주나 완제품 칵테일 시장에 주목합니다. 가격과 산지 전통, 숙성도나 품질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의심합니다. 기존에 와인을 멀리한 고객들은, 사실 이런 속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기존의 맥주나 칵테일 시장으로부터 고객을 뺏어 오려고 합니다. 맥주와 칵테일 시장에 사람이 많은 이유, 그들이 와인을 멀리했던 공통된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기존의 와인 업계가 중시하던 요소가 아니었음을 간파합니다. 그 요소들을 모두 버리거나 축소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추구한 전략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저자는 전략 캔버스를 그리는 방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역시 쉬운 건 없습니다. 그림 도구를 선물받았으나 정작 그림을 그려야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다른 산업을 곁에서 평가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막상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가로 축의 '경쟁 요소'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부터 우리의 몫입니다. 그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도구를 만든 자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전략 캔버스' 그림의 핵심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있지 그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그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름을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 이 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좀 더 밝고 가벼운 얘기로 출발하지 못한 것은 아직 제가 이 책이 던져 준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번 한 주, 멋진 그림 하나 완성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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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5-05-16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경영서를 읽고 감동하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처음 시작하셨네요? 저도 블루오션 읽고 감동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날마다좋은날 2005-05-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꽤 있네요. 제 주위에도 있구요.

밥이점영 2005-05-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히 성공한 기업과 산업이 없기 때문에 전력적이동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는 신선하면서도 시장세분화는 무조건 레드오션 도구라고 단정을 지어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장세분화도 얼마든지 블루오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날마다좋은날 2005-05-1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보다 근본적이고 '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블루오션으로 이동하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고 회사 업무에 실제 적용하면서 상당한 효과를 봤습니다. 여러 경영서들 중에서 단연 추천하는 책입니다.

jellysky 2005-06-0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퍼가도 되죠?

날마다좋은날 2005-06-0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물론이지요~ 여쭤보시니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