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한시 산책 1
김용택 엮음 / 화니북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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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슴이 젖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었습니다. 현대시도 아닌 옛 한시가 이리 가슴에 와 닿을지 몰랐습니다.

시집을 읽고 나면 그 느낌을 표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마치 그 느낌조차 시로 표현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용택 시인이 직접 엮고 시인의 느낌과 해설이 곁들여진 이 책보다 더 좋은 한시(漢詩) 번역본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시가 이렇게 정겨울 줄이야, 이럴 때면 늘 책을 쓴 이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새로운 느낌과 기회를 만들어 준 김용택 시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사 놓은 지도 꽤 됐습니다. 올 초에 샀는지, 작년 말에 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서점에 우연히 들렀다가 괜찮을 것 같아 집어 들었는데, 한시라는 표제 때문에 늘 읽기를 주저했던 것입니다. 요즘 경제 경영서를 읽고 있는데, 출근길에 머리도 식힐 겸 별 생각 없이 그냥 집어 들고 나갔는데 웬걸, 오랜만에 가슴 속에 묻어둔 감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시라는 게, 아니 이 책에 소개된 것만 그러한지는 몰라도, 단아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비 그친 후의 맑은 느낌처럼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가슴이 촉촉해집니다. 이런 기분 오랜만에 느껴, 동어반복인 줄 알지만 되풀이해서 말하게 됩니다.

출근길에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은 퇴근길에 마저 읽었습니다. 저는 왕십리에서 전철을 갈아 탑니다. 왕십리의 국철은 일반전철보다 운행 간격이 더딘 편입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책 읽기에 딱 좋습니다. 아침에 <사랑>편을 읽고 저녁에 <자연>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가 나옵니다.

강에 뜬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 胡孫投江月
물결 따라 달 그림자 조각조각 흩어지네 / 波動影凌亂
오호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 飜疑月破碎
(후략)

강에 뜬 달을 툭 치다니? 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억지 수사(修辭)가 아니라, 시인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강희맹의 시입니다. 절묘한 표현에 감탄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보름을 갓 지난 달이 여전히 둥급디다. 달과 별이 가득 차있던 어린 시절 하늘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별이 사라져버린 서울 하늘이 새삼 측은해 보입니다. 달마저 없었다면 아마 저기가 하늘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옛 한시를 보며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건 마음 속에 사라진 별을 다시 만난 때문이 아닐까요.

이처럼 자연을 노래한 시도 절창이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책에서는 사랑시가 단연 압권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다시 보니 그 느낌이 사뭇 다른 황진이 시 한 편 옮깁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截取冬之夜半强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春風被裏屈幡藏
사랑하는 님 오시는 밤 / 有燈無月郞來夕
굽이굽이 펴리라 / 曲曲鋪舒寸寸長

황진이 이후의 사랑시는 없다,고 한 김용택 시인의 말이 와닿습니다. 홀로 지내는 겨울의 긴 밤을 잘라내어 간직해두었다가 님과 함께 지내는 밤에 이어 붙여 길게 보내겠다고 합니다. 이런 황진이를 두고 꿈쩍 안 한 서경덕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일천 리 흐르는 강물 / 江水一千里
집에서 온 편지 열다섯 줄 / 家書十五行
별다른 말은 없고 / 行行無別語
일찍 돌아오라는 당부뿐이네 / 只道早還鄕

황진이와 이매창의 가슴을 뒤흔드는 사랑 노래도 노래지만, 전 단연 위 시를 사랑시의 결정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 얼마나 할 말이 많았으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냥 일찍 돌아오라고만 했을까, 그 마음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원개의 시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시 하나 하나마다 딸린 김용택 시인의 해설이 곧 시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이규보의 <어느 여름날>이라는 시입니다.

바름 부는 작은 대자리 가벼운 적삼 차림으로 누웠네 / 輕衫小(점)臥風(령)
두어 번 꾀꼬리 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나네 / 夢斷啼鶯三兩聲
빽빽한 잎 사이에 숨은 꽃은 봄 지나도 피어 있고 / 密葉(예)花春後在
엷은 구름 사이로 나오는 햇빛은 빗속에서도 밝구나 / 薄雲漏日雨中明

김용택 시인의 느낌이자 해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지나간 후에
나는 한발 늦게
피는
꽃이고 싶습니다.
가을꽃들이
피었다가 다 진 후에
네 눈에 드는
꽃이고 싶습니다.

위 한시의 느낌을 어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책을 덮으니 마치 두 권의 시집을 읽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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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vs 남자 - 정혜신의 심리평전 1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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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에 《사람 vs 사람》을 읽고 이 책 - 《남자 vs 남자》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여 바로 샀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책읽기를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사람 vs 사람》을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책 내용보다도 '이러한' 책을 쓴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습니다. '이러하다'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 그리고 문장력이 어우러져 힘을 발휘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권오길 교수의 《인체기행》을 읽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글을 제 글쓰기의 전범典範으로 삼고 싶습니다만 언제 이러한 글을 흉내나 낼 수 있을지 요원할 뿐입니다.

일전에 읽은 《젊은 날의 깨달음》에 정혜신이 쓴 <정신과, 내 인식의 베이스캠프>라는 글이 있습니다. 정말로 어렵게 정신과 전공의가 된 그녀는 전공의 생활 1년 만에 스스로 타인을 통해 정신분석 치료를 받기로 결정합니다. 일주일에 2회, 1회에 50분씩, 그 과정을 2년 동안 계속합니다. 그녀는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혹시라도 약간의 유능한 구석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바닥까지 환자가 되어보았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또 다른 정신과 의사 앞에서 적개심과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이유없이 넋놓고 울며 격렬한 감정의 홍역을 치뤄야했던 그 기간을 거치며 정신과 의사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모두 읽고 정신과에 대한 그녀의 병적인 몰입과 직업 철학에 대한 진실성에 감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 더욱 신뢰가 갑니다.

이 책에는 11쌍 21명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11쌍 22인이 아니라 21인 것은, 이회창 1인을 '칼'의 이회창과 '저울'의 이회창으로 대비하여 실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對 김어준, 이건희 對 조영남, 장세동 對 전유성, 이수성 對 강준만, 박종웅 對 유시민, 김윤환 對 김윤식, 봉두완 對 이외수, 정형근 對 마광수, 김우중 對 정동영, 김종필 對 앙드레김, 그리고 이회창 對 이회창.

한 마디로 흥미진진합니다. 순전히 느낌만 거칠게 말하자면 '뒷담화'할 때의 그 쾌감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뒷담화'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쓸 때 적어도 그가 쓴 책이나 논문, 관련자료 등은 다 섭렵하고서야 작업을 하는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은 굳이 저자의 입을 빌리지 않고서도 책 내용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분석한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저자의 글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어떤 방식이든 사람을 평가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그들에 대한 분석의 틀을 나에게 적용시켜가며, 그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저자가 분석한 그 사람의 모습에서 띄엄띄엄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나의 모습인지, 아니면 나의 콤플렉스인지, 나의 바람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녀의 분석이 옳은지 그른지, 편파적인지 공평무사한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건 너무나 어렵고 거기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성공한 남자들의 삶을 현미경을 통해 살펴보면서 그들의 삶이 평범한 이 시대의 많은 남자들, 바로 당신의 삶과 질적인 차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나가는 과정으로써 이 책을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을 읽으며 저 자신을 투영했던 몇 부분을 옮겨보겠습니다.

(이건희는) 자신을 기리켜 '삼성 안에서 국회의원에 나와도 떨어질' 정도로 사람 이름을 못 외는 데 천재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인 에너지가 자기의 안으로만 집중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사변적이고 강박적이며 상상이나 공상의 세상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p.50)
→ 사변思辨적이고 강박적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반성하며 읽었습니다.

장세동에 열광하고 호감을 가지는 건 그가 남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배신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p.86)
→ 그냥 공감이 가서 옮겨봤습니다.

(전유성이 아이디어를 지인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예로 들며) 그의 '결과 나눠주기'는 그가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신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고 기타로 쳐도 퍼스트 기타가 아닌 베이스 기타이므로, 주연하려 들다가는 조연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전유성이 지금까지 연예계의 막후 실세로, 대부로 의도하지 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자기를 아는 힘 때문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p.96)
→ '나'는 어떤 유형인가를 고민하며 읽었습니다.

이수성은 불안에 대한 수용력이 취약하여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긴장 상태나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p.114)
→ 물론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극적인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건너 뛰고 봐야하는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유시민의 말을 인용하며)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새로운 사상 치고 처음에 '불온'하지 않았던 것은 없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의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를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p.159)
→ 너무나 지당한 말이라 옮겨봤습니다.

그는 마치 강물처럼 흐른다. 날마다 읽고 쓰는, 얼핏 변함없는 삶인 듯 보여도, 내면에선 아주 미약한 물결조차 제 출렁임을 잃는 법이 없고, 변화의 흐름 위로 노를 저어가진 않지만, 스스로 조금씩 흘러, 바지런 떨던 변화의 헐떡임이 오히려 낯을 붉힌다. 그는 마치 흘러도 흐르지 않는 강물이다.(p.188)
→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교수에 대한 평입니다.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공부하고, 1년에 평균 3.7권씩 책을 내며, 30여 년 동안 1백권이 넘는 책을 쓴, 한국문학 100여 년 역사 초유의 기록을 가진 노교수에 대한 예찬성 분석입니다.
이 글을 옮긴 건, 제 현재의 모습이 이러해서가 아니라, '흘러도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변화의 헐떡임이 오히려 낯을 붉힐만큼 꾸준히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매진하며 살고 싶은 '바람'때문입니다.

'한 소리'를 얻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며 제3자의 입장에서 재능이 있네 없네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외수를 향해서 들이대는 재능이란 잣대는 그런 것이다. 그에게 '타고난 작가'란 칭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뼈를 깎는 구도자'의 모습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p.227)
→ 어떤 책을 읽더라도, 그 주제와는 무관하게 놀라운 집중력과 지칠줄 모르는 성실함을 묘사한 곳이 있으면 일단 그 페이지를 접어둡니다. 아마 그 모습이 제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접한 이외수의 모습에서 가히 경외敬畏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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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6-10-1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의 독서 블로그에서 항상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 리뷰가 그나마 무언가 담게 된 이유도 선생님 블로그 때문이라고 생각하구요. 선생님의 온화한 스타일을 잘 알지만 이건 너무나 피상적이고 수동적인 리뷰같습니다. 선생님같은 분이 조금 더 깊고 넓게 써주셔야 저희들도 배웁니다. 참고로 저도 같은 책에 리뷰를 썼습니다. 물론 이런 온화한 글쓰기는 태생 상 못하구 아주 편협하게 썼습니다.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젊은 날의 깨달음
조정래.홍세화.정혜신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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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는 모든 것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일년 내내 술을 마셔도 즐겁고, 아니 술을 마실 수 있어 즐거웠고, 전공에 구애됨이 없이 아무 책이나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제도 교육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과 가치에 눈을 뜰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변곡점變曲點은 대학생활을 통해서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즐거웠던 시절로부터 유래된 습관 중에서 일부를 혁신해야할 때가 됐습니다.
술에 대한 나의 태도와 습관이 그것입니다.
술은 나와 남의 '관계'를 맺어주는 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무미무취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갈수록 0에 수렴하는 데 반해, 대학에서의 기억이 가치와 재미 모든 면에서 가장 많이 남는 건 아마도 술로 맺어진 인간관계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술의 즐거움이 '아는 것'의 즐거움만 못함을 느낍니다. 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갈수록 줄어듭니다. 술이 주는 이미지의 핵심은 '인간적'이라는 것인데, '인간적'이라는 말에는 대단히 감성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술이 주는 감성의 특징은 과장誇張입니다. 과장은 종종 현실과의 괴리乖離를 낳습니다. 그 괴리를 타인이 자주 느낄 정도가 되면, 괴리가 불신의 관계를 만듭니다. 약이 지나쳐 병을 키우는 꼴입니다. 자연 치유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습관적인 약은 의존성만 키우게 됩니다. 의존성은 나약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 술에 담을 쌓고 오로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겨우 세끼 밥 먹을 밑천을 장만하기 위해 젊은날을 보내야했던 소설가 조정래는, 나이 마흔에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형의 땅>을 썼고, <불놀이>를 썼고, <태백산맥>을 시작했습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상처투성이 젊은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인생이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라고 규정한 조정래는, 그로 부터 20여년 동안 대하소설만 연달에 세 편을 써냈습니다. 20년을 술을 멀리하고 자신을 글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대하소설을 연달에 세 편씩 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먹음의 실천 뿐이다. 그런 미련스러운 노력 말고 무엇이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고, 우리 인생에 빛을 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타고난 재능보다는 미련스러운 노력을 믿고자 했다."
인물과 사상사에서 펴낸 <젊은날의 깨달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외에도 정혜신, 박노자, 고종석, 손석춘, 장회익, 박홍규, 김진애, 홍세화 -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만한 이들이 젊은 날을 돌아보며, 인생을 새롭게 발견한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방면에서 홀로 일가를 이룬 이런 분들의 글을 읽으면 숙연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복판에서 조용히 열정이 끓어오릅니다. 쉽게 확 타버리는 어린날의 열정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돈오頓悟의 느낌인지 점오漸悟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평생을 두고 매진해야할 가치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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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쇼크
한스 울리히 그림 외 지음, 도현정 옮김, 유태우 감수 / 21세기북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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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제약의 비타500이 월 매출액에서 사상 처음으로 박카스를 앞질렀습니다. 식품류에 가까운 비타500과 의약품류에 가까운 박카스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어쨋든 일반인들은 둘 다 약품이라기 보다는 건강 보조 음료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꽤 의미있는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비타민의 시대입니다. 쏘시지나 햄, 과자에 천연 식품보다 더 많은 비타민이 들어 있습니다. 주스에도 비타민이 강화되어 있습니다. 천연 주스에 합성 비타민을 첨가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타민 하루 권장량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비타민 C 하루 권장량은 70mg인데 비타500 작은 병(100g) 하나에만 700mg의 비타민 C가 들어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일일 권장량의 10배입니다. 레몬 20개, 사과 25개, 귤 15개에 해당되는 양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중에는 '비타민'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건강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입니다.

과하면 항상 부작용이 따르는 법입니다. 비타민 열풍의 시대에 <비타민 쇼크>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하루 한 알! 당신이 먹고 있는 비타민을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독일인이 쓰고 우리나라 유태우 박사가 감수한 이 책은, 비타민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보조제라는 것과 비타민 결핍을 강조하는 문구는 비타민 제조 회사의 판매 전술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식품 첨가물로 사용되는 비타민으로 인해 과자 몇 봉지만 먹어도 비타민 A, B, C의 하루 필요량이 충족되는 이상 시대에, 비타민 과다 복용의 폐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식품에도, 화장품에도 합성 비타민이 첨가되고 있는 현실, 비타민은 결핍보다 과잉 사용이 오히려 문제라고 말합니다. 합성 비타민은 식품을 통해 섭취되는 천연 비타민과는 달리 특정 성분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연 상태의 음식에 포함된 영양소의 상호 작용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영양소만 선별하여 섭취하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예로 비타민 과다 복용으로 인한 피해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용성 비타민인 A,D,E 그리고 베타카로틴 과다 복용의 부작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상식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수용성인 비타민 C를 과다복용한 임산부에게서 오히려 비타민 C가 결핍된 아기가 태어나는 사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사례를 통해 '과유불급'의 폐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합성 비타민의 제조 과정을 보면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에서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을 위해 박테아균, 곰팡이, 개구리, 그 밖의 썩은 동물 시체가 원료료 사용되거나 유전 공학(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따라서 비타민은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통해 - 유기농이면 더욱 좋고 - 자연스럽게 섭취해야 하며,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저도 비타민을 즐겨 먹는 편입니다. 사무실 책상에 종합 비타민제와 고함량 비타민 C가 있습니다. 물론 '저렴한' 합성 비타민제입니다. 잦은 외식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채식 식단을 거의 접하기 힘들어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왕재 박사의 비타민 C 예찬론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은 먹는 횟수가 뜸한데, 게을러서 자꾸 잊어버려서 그런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비타민 쇼크>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약사의 상술에 필요 이상의 비타민을 섭취하고 있으며, 건강 트렌드에 편승하여 과도하게 합성 비타민이 식품 첨가제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책입니다. 나름대로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여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결론은, '쇼크'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지용성 비타민의 과다 복용은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아서, 또는 몰라도 종합 비타민제를 두 세 종류 먹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너도 나도 먹는 비타민 C일텐데요, 그래서 제 관심사는 수용성 비타민, 특히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했을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비타민 C 예찬론자인 이왕재 박사는 하루 7~10g, 즉 7,000~10,000mg의 비타민 C를 벌써 십 수년 째 복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약회사에서도 마케팅 차원에서 이 분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저 역시 이 박사의 사이트(http://doctorvitamin-c.co.kr/)를 보고 1,000mg 백색 비타민 C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비타민 C를 과다복용한 임산부 2명이 비타민 C 의존성 유아를 출산했다는 보고를 인용합니다. 산모가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여 흡수되지 못한 비타민 C가 체외로 계속 방출됐는데, 이로 인해 뱃속의 아이는 선천적으로 비타민 C를 무조건 배출하는 괴혈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비타민 C 복용에 따른 비타민 C 의존성 유아 출산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왕재 박사에게 질문한 것이 있는데, 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습니다.

비타민 C는 외부에서 주기적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간단한 영양제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쉽사리 의존성이 생기는 물질이 아닙니다. 예컨대 밥을 늘 먹으면 밥에 의존성이 생깁니까 ? 밥을 안 먹으면 죽기 때문에 계속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의존성이라는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다는 증거인데 비타민 C를 복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시는 순간부터 죽음이 눈앞에 오게됨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임산부의 비타민 C 복용에 대해 많은 글이 올라가 있고 아울러 이미 많은 임산부들이 비타민 C를 복용하시며 태아와 산모의 건강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타민 C를 복용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죽음이 눈앞에 오게된다는, 좀 과하다 싶은 말을 하긴 하지만, 위 답변을 토대로 생각하면, 책에서 인용한 두 건의 사례는 무언가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물론 이 박사 - 이 분의 비타민 C 예찬은 거의 종교적 믿음에 가깝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박사의 글에서 자주 인용하는 라이너스 폴링 박사(노벨상 2회 수상)도 하루 12g의 비타민 C를 꾸준히 복용했음에도 결국은 암으로 죽었습니다.)

의학 전공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따로 연구한 것도 아니고 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는 힘들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 놓은 비타민 C는 계속 복용한다. 가능하면 꾸준히 복용할 것이다. 다행히 가격도 무척 싸다. 그것이 설사 위약 효과라 해도 부작용이 거의 없으니 상관 없다.
사 놓은 종합 비타민제도 먹는다. 그걸 다 먹고 나서 '여유가 있으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안 사도 상관 없다.
대신 매일 아침 야채를 충분히 먹는다. 주말농장에 더 신경을 써서 무공해 야채를 최대한 자급자족한다.

건강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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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공소시효 - 한민족의 지혜
김학렬 지음 / 기원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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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특이한 책을 읽었습니다. 아는 분의 권유로 읽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아 구하기도 만만찮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오래 전에 나와 절판된 것은 아니고, 참으로 특이한 주제를 담고 있어 아마 소량 출판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역시 아는 분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비록 이 책이 서점에서 눈에 쉽게 띄는 장소에 있다고 해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이 다루는 주제도 특이하거니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범인凡人이 보기에 생뚱맞기까지 합니다.
저자의 바람은 유태인의 <탈무드>에 비견할만한 한민족의 교육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자가 그 첫 단추를 낄테니 독자 제현의 참여로 함께 만들어 보자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의 초안을 만든 지가 근 3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과학과 수학과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재오삼수再悟三修의 과정을 거쳐 깨달은 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의 수고로움을 뒤로 하고 기어이 책으로 엮은 속 사정을 알기에, 저의 리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리뷰를 썼다 지웠다하기를 벌써 두 시간. 제 자신이 아직 천학비재淺學菲才하여 천오舛誤함이 있음을 알기에, 얕은 지식으로 논리를 분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책의 제목은 <신의 공소시효>입니다. 그 뜻인 즉, 인간의 법과는 다르게 신의 법(자연이 이치)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 만약 그렇다면 너무 불평등하니까... '평등' -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자 저자가 말하는 '지혜'의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긴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긴 안목이란 현세를 초월한 개념입니다. 불평등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종교가 내세來世 - 그것이 윤회이든 아니면 천국과 지옥이든 - 를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은 긴 안목에서 평등의 개념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1-1 = 0 입니다. 수학적으로는 공리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좌변의 1-1은 결국 +1-1이니, 하나를 줬다가 뺏는 것이고, 오른쪽의 0은 처음부터 없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등호를 사이에 두고 좌우 모두 0이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0은 평형 상태를 말하지만우변의 0은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함이고, 좌변은 +1-1이라는 행위가 발생하였으므로 유위有爲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유위有爲인데, 유위有爲에서의 평등은 필연적으로 시차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0이 되기 위해 +1 했다가 -1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 시차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사도 역시 평등하나 그 시차로 인해 평등하지 않게 보인다는 논리입니다. 그 시차를 뛰어넘는 '긴 안목'이 있어야만 세상 사는 지혜 - 평등의 지혜 - 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가는 단기간 내에 평등성이 보장됨을 바라고, 유교의 예禮는 장기간에 걸쳐 평등성이 보장함을 뜻하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까지도 평등성이 보장되는 것은 불교이며, 기독교는 천당으로써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평등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선善, 전생前生, 시간, 행복,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인지, 이를 확대하여 사회 조직에서 평등의 지혜를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요약하여 저자는 후기後記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맺습니다.

긴 시간으로 보았을 때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여유로운 긴 안목의 지혜를 가져라.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긴 안목으로 보고
그렇게 믿고 행하기 때문에 그 미래가 있는 것이다.

순간의 분노, 순간의 흥분에 대하여 최선의 조언자는
시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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