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구판절판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괴상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아가씨와 사귀게 되는 일이 쉬울 것 같았다. 아니, 우연히 한입 메어 문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죽은 생쥐의 꼬리털이 발견되어 수억 원의 보상금을 타는 일이 지금은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아, 어리석은 희망이여. 그는 자책했다. -15~6쪽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대도 그 아이의 타고난 본성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32쪽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익숙해서 더 두려운 일이었다. 혼자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상상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언젠가는 홀로여야 한다면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민아의 무의식이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멍하니 한눈파는 순간을 잘 포착하여 휙 놔버리는 것이 민아의 방식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분명히 모두가 등을 돌리고 말 것이고, 결국엔 어깨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혼자서 그 어린 날, 점심시간마다의 지독한 순례에 나서야 할 터였다. 그것은 친구 관계에서도, 그리고 연애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58쪽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78쪽

민아는 극단적 비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 신호에 재빠르게 대응하기에 앞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애인의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기로 했다.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들이 남겨준 습관이었다. 비교적 허술한 경제 관념, 비교적 불안정한 직장, 비교적 이해심 없는 성품, 비교적 의심스러운 바람기…… 여기서 '비교적'의 비교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앞서 만났던 2번, 3번의 평균치일 수도 있고 친구들의 애인들일 수도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5번, 6번, 7번들에 비해서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를 새로 만나 순서대로 다음 번호를 부여하고, 연애의 기승전결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었다. 그 남자는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녀는 애초의 계획대로 이별을 진행시켰다. 그만두지 않으면 절대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경구는 이 시대의 이십대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전언이었다. -79~80쪽

남녀의 첫 만남 뒤에 언제쯤 연락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연구 보고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도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타이밍에 대한 보편적 규칙은 있었다. 열살짜리 아이조차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다니게 된 2000년대 이후론 그 간격이 터무니없이 짧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이제는 스마트폰을 손안에 쥐고 다니는 시대였다. 통화뿐만 아니라 문자메시지도, 이메일도, SNS도, 스마트폰 전용 메신저 서비스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은 손가락 끝에 존재하고 있다. 여자들은 그 어떤 개인 휴대기기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불안에 빠져들었다. -98~9쪽

그때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민아와 준호는 봄밤 속으로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보는 별들이 뒤를 따라왔다. -107쪽

두 개의 서로 다른 포물선들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點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억에 대하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108~9쪽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114쪽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빨랫감을 숨겨두고 싶은 마음은 엄마도 그녀도 다르지 않을 거였다. '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도 실망시키지 않는 삶.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삶을 사는 여자도 있겠지.-157쪽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비극적 파국에 이르렀다는 뜻도 아니다. 이곳은 보기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계였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했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201쪽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합의는 없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아닌 다음에야 이별 합의서에 서명하는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한 연인에겐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언으로 동의한 부분은, 더 오래 같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207쪽

처음 만난 순간에도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길을 향해 뒤돌아서, 서로의 뒤통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디딘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였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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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절판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5쪽

그녀가 나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능력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신사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며, 불필요한 감상을 끊어 내고 그녀가 없는 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후에 행해진 나의 '연구'는 그녀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 같은 것과는 무관하며, 철저히 냉정하고 신사적으로 행해 왔음에 틀림없다. 이상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말없이 끊거나, 주위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을 나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나에게 감사하면 했지, 그런 사내를 앞잡이로 내세워 내게 수치를 겪게 할 필요는 단연코 없었다. -33~4쪽

그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이건 내 꿈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중학생 시절의 어리석음을 다 드러낸 꿈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과거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 실패의 퇴적 위에 세워진 존재다. 태곳적 생물들의 유해가 석유가 되어 현대 문명을 쌓는 초석이 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연료로 태워 이제는 멋지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나라한 과거를 당당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파헤쳐 내지 않았다면, 세상에 숱하게 방출되어 맘껏 환경을 파괴시키는 플라스틱 제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0 ~1쪽

우리는 매우 절도 있는 인간이므로 술에 취해 정신을 놓는 일은 없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전에 전선에서 퇴각하는 방침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재빨리 변기에 게운 후 철수한다. 자신의 에틸알코올 분해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게다가 토사물을 투하할 장소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술을 마시는 학생이 많은 세태가 심히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순히 유감으로 끝날 일이겠는가, 같은 학생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고 우겨 댈 생각이라면, 술집 계단에 잘못 투척한 토사물을 자기가 빨아들일 정도의 각오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46쪽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화려하진 않더라도 뭔가 인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보는 것 같은 고상한 경험이 나에게 있느냐 하면, 그런 깊이 있는 일과는 인연이 없다. 작금의 젊은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갈수록 현대 문명에 의지하는 나날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것 또한 젊은이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나는 선택된 인간'이라는 역겨운 프라이드를 나 역시 품고 있다. 이 또한 있을 법한 일이긴 하겠으나, 선택된 자로서의 그 어떤 황홀도 불안도 일상 속에서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 네가 '선택되었다'고 확신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눅눅히 젖어 있는, 모두가 눈길을 피해 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어둠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56쪽

일상은 간결한 게 최고다. 진정한 위업은 극적인 일상과는 무연한 장소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이거다'라고 드러낼 수는 없는 게 유감이지만, 나 역시 세계사에 남을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이므로 사색을 흐트러뜨리는 파란만장한 일상 따윈 원치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살짝 외로워질 때만 마음을 써 주면 충분하다.
그러나 마음을 써 주길 원할 때는 마음을 써 주지 않고, 그냥 혼자 내버려 두길 원할 때는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세상사이게 마련이다. -56~7쪽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사정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들의 망상에 상처 입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했는데,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세상이 썩었는지 우리가 썩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풍부하고 지나치리만큼 참혹한 망상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시카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87쪽

"언제 술 한잔 하자."
그가 말했다.
"이도가 또 축 처져 있어. 위로해 줘야지."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침울해 있는 인간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다."
시카마가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잖아."
"도움도 안 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은 없어. 난 다만 그의 강렬한 질투에 경의를 표하고, 그 결말을 조용히 응시하고, 그리고 기탄없이 즐길 뿐이지."-106~7쪽

긴긴 하루였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뒤늦게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현대 문명에 철저히 의존해 살아가긴 해도, 양친과 지구환경 외에는 부끄러워할 대상 하나 없이 조개와 같은 무해한 생활을 하고 있건만, 스토커 놈에게 스토커라고 불리질 않나, 애차 마나미호가 어딘가로 끌려가질 않나, 교토대생 사냥에 쫓기질 않나, 망상에 빠진 빚쟁이가 찾아오질 않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질 않나,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챙겨 주길 원치 않을 때에만 챙겨 주길 원치 않는 인간이 일상을 침범해 들어오는 잔혹한 현실. 그리고 정작 챙겨 주길 원하는 사람은 날 챙겨 주지 않는다. 딱히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128~9쪽

우리는 인류를 구제하게 될 거대한 에너지를 떠올려 보았다. 좌절, 실연, 죽음에 이르는 병, 모든 고뇌가 유익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자동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를 띄우고, 인터넷은 어디서든 연결되고, 아이돌 비디오도 실컷 볼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멋진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도처럼 과도한 고통을 끌어안은 자가 인류의 구세주로 각광을 받고, 숨 막힐 정도로 포지티브한 인간은 몽땅 수납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50쪽

작금의 세상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악령이 설쳐 대고 있다. 일본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부조리는 일단 눈 감아 주기로 하자.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건 좋다. 설령 그것이 켈트 신앙을 기원으로 한 정체 불명의 흰 수염 할아버지가 이뤄 주는 '물욕'의 꿈이라 할지라도. 하나 작금의 크리스마스와 연애 예찬주의의 잘못된 습합까지 허락해 줄 까닭은 없다. 목청껏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실로 폭력적인 일이다. -154쪽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듣고 싶지도 않은 행복의 구가(謳歌)를 들어 줘야 할 의리 따윈 없다고.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불합리한 열등감을 맛보며 하숙집에서 냄비를 끌어안고 우울하게 지내야 할 의리도, 보통 사람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다느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다느니 하는 무익한 번민을 끌어안아야 할 의리도 없다고! 그들은 분명 수많은 샘플을 눈앞에 늘어놓고 제군에게 '행복'을 제시해 보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이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마치 학생의 본분인 양 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닥쳐, 닥치라고. 학생의 본분은 학문이다. 사랑에 정신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면 좀 더 학문에 매진하란 말이다, 이 미친 새끼들아! -154~5쪽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 어리석은 틀에 박히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현혹시키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행복도 좋다고, 우리가 중얼거린 적도 있지 않을까. -200~1쪽

사랑 따위로 뻐길 게 뭐 있어? 사랑하는 놈이 그리 잘났나?
현대 풍조에 연애 예찬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디 불합리한 정서인 연애를 칭송하는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인간 저변에 깔린 어두운 감정을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치장한다 해도, 언젠가 그것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본성을 드러낸다. 막상 그 광기에 직면해 그럴 리가 없다고 신음해본들 이미 때는 늦다. 흔히 '비뚤어진 애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연애라는 것 자체가 애당초 어딘가 비뚤어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리 기쁜 듯 행복한 듯 싱글벙글 만족해하는 걸까.
사람들은 광기의 구렁텅이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뭇사람들에게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몸을 던지고 싶다, 몸을 던지지 않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 부끄럽다고까지 생각한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구렁텅이에 빠진 모습이며, 빠지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217~8쪽

연애는 어디까지나 배은망덕한 기쁨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남의 눈을 피해 맛보아야 할 금단의 과실이다. 그것을 마치 인생에 당연히 열리는 과실인 양 장소를 안 가리고 먹어 대고, 과즙을 남에게 튀겨 대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인식해야 마땅하다.
만천하에 우글거리는, 팔짱을 낀 남녀들에게 고하노라.
"살아가라, (그러나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라."
-218쪽

그러나 취해선 안 된다. 결코 자신에게 취해선 안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눈 내리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한동안 끙끙 힘을 내봤지만,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자신에게 취하게 해 주자고 마음먹고 나는 울었다. -245쪽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하긴, 아마도 나 역시 잘못됐을 것이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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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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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간절한 바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 어떤 열병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성적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유일무이하게 타당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느낌을 뜻했다. 헬렌 빌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감정은 더욱 특별하고 강렬해졌다. 그것은 연필로 그어진 몇 개의 선들만 가지고도 별 어려움 없이 어떤 얼굴을 떠올릴 수 있고,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격을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과 흡사했다. 함께 휴가를 떠나 그리스 섬들을 돌아보고, 파티가 끝날 무렵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고, 기차에서 사랑을 나누고, 남은 생을 함께할 어떤 사람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는 그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14~5쪽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 -19쪽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22쪽

현대의 바람직한 결혼생활을 통해 경험하리라고 기대되는 감정들 가운데 새삼스러울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각종 예술과 문학작품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대의 결혼에 담긴 야망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결혼이 그러한 감정들을 평생에 걸쳐 반드시 '단 한 사람'에게만 품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28쪽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코 허왕된 꿈은 아니다.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야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4~5쪽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만 많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들은 하루 종일 성심성의껏 대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선 잔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했다거나 열쇠꾸러미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솜씨 좋고 상냥한 아내를 매몰차게 면박 주는 남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42~3쪽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붙는다. -71쪽

창녀와 나쁜 남자는 소유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과 이상한 습벽들을 환기하는 영원한 목격자로 행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섹스는 잘 아는 사람과 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110쪽

우리를 둘러싼 현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기대를 주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133쪽

우리의 문화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 아직도 낭만적 충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숙명적으로 끌린다. 연습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며, 만일 열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헌신에 대한 약속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믿는다. -156쪽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생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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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5-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안녕? 저 간만에 서재 기웃기웃하는데, 이매지님은 여전히 부지런부지런하시군요. 부럽고 부끄러워요.

이매지 2012-05-13 22:42   좋아요 0 | URL
엇. 생일주간인 네꼬님이다! ㅎㅎ
저 4월에 완전 태업하다가 몇 개 올렸는데 네꼬님이 부지런하다고 하시니 어쩐지 부끄럽구요. ㅎㅎ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품절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쪽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순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12~3쪽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분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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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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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패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8쪽

오 년이라. 혼마는 생각했다. 인생이 극에서 극으로 격변하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가즈야의 입으로 들은 세키네 쇼코의 인상과 본인이 근무했던 이마이 사무기기의 분위기로 짐작건대 그녀는 좋은 쪽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60쪽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77쪽

"피곤할 때는 설탕을 넣는 게 좋아요. 난 아내에게도 늘 그렇게 말하죠. 다이어트한다고 설탕은 안 넣으면서 피곤하다고 드링크제를 마신다니까요. 그러면서 항상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요.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없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피곤할 때는 설탕이 최고예요."-94쪽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 하느냐." -145쪽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160쪽

밝은 꽃무늬 벽지 한 장을 뜯어내면 그 안에는 철근으로 지탱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감춰져 있다. 누구도 쉽게 돌파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는 굳건한 벽이. -189쪽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7쪽

그나저나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고 멍청해 보일까. -213쪽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달리는 기관차를 서서히 위험한 언덕길로, 썩은 다리가 걸려 있는 벼랑 끝으로 유도하는 조그만 선로 전환기. 하나, 또 하나가 소리도 없이 변환되면서 진로를 바꿔나간다.
채무를 끌어안은 본인도 자기를 움직인 그 전환기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216쪽

이건 역시 일회용 소비 같은 사회 분위기 탓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요. 분에 넘치는 소비 행태 말이에요. 사람들 생활은 모두 풍요로워졌는데, 돈의 사용에 관한 교육은 이뤄지고 있지 않잖아요. -219쪽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모쓰는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렇지. 엄청나게 노력했잖아. 그렇지만 노력해서 좋아졌다는 건 역시 재능이 있다는 뜻이야. 안 되는 사람은 제아무리 좋아해도 안 돼. 다모짱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있었고,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었고, 게다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방해도 없었잖아. 그게 가장 큰 행복 아닐까?" -247쪽

언뜻 반대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알리바이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일반인이 아니라 형사 쪽이다. 제아무리 수상쩍어도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다면 수사하는 측에서는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 진범을 찾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은 의외로 고집이 세서, 한번 '이 녀석이 수상하다'고 믿어버리면 "알리바이가 있어도 보나마나 날조했을 거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이 재수사나 재심에서 무죄가 입증되어도 지역 주민이나 친척들한테는 여전히 범인 취급을 받고 백안시당하는 까닭도 이런 심리 때문일 것이다. 과학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사는 혈액형의 미세한 차이에도 영향을 받아 수사 대상을 바꾸지만, 일반인은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냐'며 일축해버리곤 한다. -267쪽

그러나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만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혼마는 신조 교코가 본 오사카 거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317쪽

그렇다면 나는 왜 신조 교코를 찾는 걸까?
단순한 습관일까. 어차피 시작한 일이지만, 가즈야에 대한 동정 때문일까. 호기심일까.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이유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이다.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신조 교코라는 인간을. 그리고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을. -329~330쪽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3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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