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임경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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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담벼락이 이어진 더러운 골목길을 달려간다. 심장은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어서, 주위의 소음은 모두 내 심장박동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마치 영화에서 극적인 부분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빠르게 달리는 내 몸과 상관없이 내 시야는 천천히, 골목길의 작은 부분까지 다 보여주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소리는 사라졌다. 뒤에서 총성이 들렸다. 개똥을 밟았던가, 무언가 미끌거리는 것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긁힌 팔꿈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홱 몸을 뒤집어 돌아본다. 어지러이 달려온 골목길, 아직 쫓아오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총성은 조금 더 먼 곳에서 들려온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다시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숨이 가빠오고,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시야가 점점 불규칙스럽게 흐려지기 시작할 즈음, 골목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나를 껴안아 붙잡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놀란 나를 진정시키려 그가 중절모를 들어 올려 얼굴을 보였다. 낮은 목소리. ‘나요, 동지. 진정하시오. 여기까지 왔으면 안전할 것이니 숨을 돌리고 나를 따르시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절모를 다시 눌러 쓴 그는 곧 몸을 돌려 앞장섰다.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굽이굽이 어지러운 골목길을 또다시 누비기 시작했다.

꿈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일본순사에게 쫓기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1929년 만주 안동에서 서른 남짓의 김단야 선생을 만났으니, 그건 꿈일 수밖에 없다. 김단야 동지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사명을 갖고, 이른 여름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만주 안동에 이르렀다. 꿈속에서 나는 김단야 동지가 무사히 압록강 철교를 건너 국내로 잠입할 수 있도록 돕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실제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것 같다. 서른 즈음의 김단야 동지보다 더 어린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자 코민테른 전권위원인 김단야 동지의 위압감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비싸 보이는 양복에 중절모까지 잘 차려입은 김단야 동지는 얼굴도 매끈하니 잘 생겼다. 그는 1922년에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압록강철교를 넘는데 성공했다. 당시 박헌영 동지와 임원근 동지는 넘지 못했던 국경을 그는 혼자 넘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국경을 넘을 생각일까?  


허름한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김단야 동지에게 어떻게 쫓기게 된 사연을 설명해야 할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단야 동지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황당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군 국경수비대 책임자의 꿈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비밀통로를 찾아내자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는 이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빙의되어 있었다. 영화 [인셉션]을 본 영향이 큰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일본순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본 어느 도시 중심가였다. 액션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꿈에서 나는 성룡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순발력을 보이며, 총탄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으로 자동차가 한 대 멈춰 섰다. 박헌영 동지가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엄호 사격을 했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출발하는 차에 뛰어올랐다.

차 안에서는 박헌영 동지가 다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비밀통로를 찾아낼 수 없으니, 한 단계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뒤쪽에는 국경수비대 책임자가 기절해 있었다. 우리는 [인셉션]에서처럼 꿈속에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꿈속에 있었으니, 세 번째 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아무튼 나는 액션영화를 너무 많이 보는 편인가보다. 꿈속에서 계속 총질만 하고 있었으니. 개미떼처럼 밀려든 일본순사들에게 포위되어, [영웅본색]의 윤발이 형처럼 총질을 했으나, 이미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동지는 모두 총에 맞았다. 다리에 총을 맞은 김단야 동지를 향해 달려가다가 눈앞으로 날아온 수류탄을 보고 잠에서 깨었다.

이 꿈은 내가 반복해서 꾸는 꿈 중에 하나이다. 영화 [인셉션]을 보고나서 꿈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서 ‘꿈 침입’이라는 요소가 더해졌으나, 예전에는 주로 일본순사에게 쫓기다가 깨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이런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아마도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 말아야 하는 9명의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2008년에 출간되었으나, 이런 책이 곧 나오리라는 사실을 2006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다. 자꾸만 읽다보니 그들의 운동이(그리고 삶이) 더 궁금해졌고, 궁금증은 꿈속에서 그들을 찾아가게 만들었다. 어떤가? 일제 강점기 혁명가들의 흥미진진한 삶이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다면 어서 펼쳐보길 권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라잡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참고도서
1.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 1986 / 돌베개
2.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 2000 / 역사비평사
3. 역사속의 미래, 사회주의 / 2004 / 현장에서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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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은빛님 독서는 남다른데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책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책 읽는 밤'에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해서 얘기해 주던데.ㅋ
김단야라고 해서 김은빛님 딸 사랑이 남다르구나 했더니 그 단야가 아니었어요.ㅎㅎ


감은빛 2011-01-14 01:37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별난데가 있죠. ^^
아하, 스텔라님은 곧바로 딸 이름을 떠올리셨군요.
그 분 이름(엄밀히 말하면 '호'라고 해야겠죠.)에서 따왔어요.

마녀고양이 2011-01-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등학교를 홍대부여고를 나와서
홍익 대학교 안에 함께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재학 중에 마신 최류탄이
대학교 들어가서 마신 최류탄 보다 훨씬 많아요... 1986-88년 아주 심했잖아요.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다보니, 학교 후문 굽이진 골목으로
득달같이 도망가던 대학생들이 생각나요, 다들 입에 수건 두르고 그렇게 도망가고
뒤에서 쫒아가는 군인들 있고. 그랬죠.... 아, 그렇게 어렵게 얻은 지금인데 말이죠. ㅠㅠ

2011-01-12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1-14 01:41   좋아요 0 | URL
86~88 이라면 가장 치열할 때였네요.
그렇게 어렵게 얻은 시대를 단번에 역전시켜버린 저 쥐새끼는 참 대단하죠!

저는 묘사한 것 처럼 골목으로 도망다닌 일이 참 많았습니다.
고등학교때도 그랬고, 대학교때도 그랬죠.

양철나무꾼 2011-01-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혼자 읽기 넘 아까워요.

감은빛 2011-01-14 01:42   좋아요 0 | URL
흐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