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폭풍전야 월요일, 외도직전 화요일, 소통불가 수요일, 대폭발 목요일,

탈출시도 금요일, 앓느니 죽는 토요일, 그리고 눈물바다 일요일…
일일연속극보다 시끌벅적하고 막장드라마보다 꼬인 가족 8인의 88마일이 펼쳐진다!"
- 출판사 책 소개 중에서....

 저 소개를 보고, 그리고 책 표지를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책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내가 처음 생각했던 이야기는 죽어라 잘 안 맞는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모여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요절복통 시트콤 같은 것이었다. 난 일단 웃을 준비, 혹은 쯧쯧거릴 준비를 하고 책 표지를 열었고, 그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문구들 중에서 건질 단어는 '꼬인' 한 단어다. 

 화목하고 서로 모여 왁자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이 가족의 모습은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는 모습일 터. 그렇다고 나처럼 '평범한(?)'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는 친척 집에 가는 걸 가능하면 피하고 싶고(그 친척을 싫어하는 것이 아님에도!), 명절처럼 어쩔 수 없이 그런 자리에 가면 어색해서 묘한 썩소같은 미소를 짓고 또 짓다 못해 연휴 마지막 날이 되면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무척이나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과 일주일 여행을 가게 되었다면? 세상에 악몽도 그런 악몽도 없을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것 같다. 그렇다. 아마 당신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저 표지는 사기라니까!)

 가족이란 참 이상한 존재들이다. 도대체 가족을 엮는 건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가 어렵다. 가족 간의 관계 유지에 있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의외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듯, 부모도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당장 초등학교만 들어가더라도 부모님이 모르는 내 부분이 부쩍 늘어난다. 형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릴 때는 거의 하루종일 붙어 지내던 형제들도 자기만의 세계가 생기면서 서로 모르는 부분이 커진다. 그 간극은 대개 나이를 먹을 수록 커진다. 나만 해도 동생과 지금은 잘 지내는 편이지만, 그건 나와 동생의 관계가 정말로 더 좋아진 걸까? 다만, 이제는 서로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 건 아니고?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족이란 꽤나 질척한 관계다. 오히려 나를 더 잘 이해해주는 타인은 가족보다는 생판 모르는 남이나 회사 동료, 친구일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유지되는 관계라니, 거 참 신기하기도 하지. 그렇게 평소에는 으르렁거리면서도, 또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질척하고 끈적한 관계. 

 이 소설 속에는 그런 질척함이 페이지마다 느껴진다. 서로에게 '넌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외치면서도 서로에게 어떻게든 이해받고 이해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순이 있다. 인물과 인물이 만날 때는 날카로운 긴장이 느껴진다. 작가는 집요하게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그 서술법으로 인해 마치 저 집의 CCTV가 되어 가족의 맨 얼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읽은 동안 그 답답함에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 흘러가는지! 이 정도 되었으면 한 사흘은 지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페이지를 넘겨봐도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더랬지. 꼭 어색한 친척들과 함께 하는 여행 그 자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건 꼭 쓰고 넘어가야겠다. 분명 읽기는 쉽지 않다. 몰입해서 마구 페이지를 넘기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장면 장면을 넘겨야 한다. 중간에는 유령 이야기까지 나와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딱히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거나 뭔가 감동적인 일이 빠방, 터져서 가족들이 샘솟는 애정을 느끼며 '그래, 우리도 가족이었지!'라고 느끼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읽고 나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걸. 여기 나온 가족들은 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 각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 것 같다. 다시 보자는 약속도 -그런 약속이 으레 그러하듯-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허공으로 흩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모르지. 조금은 변할지도. 최소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문득 이 여행지를 떠올리며 잠깐 같이 미소 지을지도 모르는 일이잖는가. 그럼 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옹호자들 - 미네르바에서 용산참사까지 말 못 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살고자 한 사람들, 그들이 지켜낸 이 오만한 시대의 정의로운 순간들
김영준.최강욱 외 지음 / 궁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을 만난 것도 참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가독성이 안 좋아서, 재미가 없어서 책장이 안 나간 게 아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이 너무 괴로워서,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갑갑하고 속이 타서 몇 번이나 책을 덮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페이지마다 한숨이 나오고, 차라리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는 걸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막판에는 거의 의무감과 오기로 읽어냈던 것 같다. 이것은 '다 옛날 일이지'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생생한, 아물지 않은 상처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완결되지 않은 기록이며, 형태만 바꿔, 그러나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아픔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진 굵직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미네르바 사건,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사건, PD 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 국방부 불온서적 반입 금지 사건, 민간인 불법 사찰, 전교조 명단 공개, 전교조 시국 선언, 그리고 용산 참사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사실 비단 이것 뿐이었으랴. 어떤 정권 하에선들 불의한 사건이 없었으랴마는, 이건 해도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어떻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사회에서는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직원 식당에서 뉴스를 보며 한탄을 해도 우스개소리겠지만, 대뜸 '말 조심해라. 그러다가 잡혀가면 어쩌려고'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니까 말이다. 아무리 농담조로 하는 말이라지만 저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에 살짝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하다.

 요즘에는 더욱 세상 살기 팍팍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기가 찰 만큼 노골적으로 개악된 취업규칙에 동의한다고 서명하라는 압박이 병원장으로부터 계속 들어오고 있다. 서명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신규 인력 채용도 없고 서명을 할 때까지 월급도 동결하겠다는 협박도 이어지고 있다. 시급 삭감, 호봉제 폐지, 정기 휴가 삭제, 각종 청가 삭제 혹은 축소, 직원 혜택 폐지와 더불어 노조 활동을 방해하려는 조항까지 들어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계약직이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람이 0가 되었으며, 7월에 협정한 월급 인상은 12월이 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노조가 하도 난리를 치니, 얼마 전인 23일에서야 겨우 이행했다) 이런 노골적 협박과 말도 안 되는 취업규칙 개정안이 언론에 새 나가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바꾸나 싶다가도, 곧이어 이런 일이 어디 여기 뿐이랴는 체념과 설사 보도가 되더라도 힘 있고 돈 있는 병원장이 꿈쩍이냐 할까 싶어(그리고 뒤이어 유출자 수색과 해고가 뒤따르는 뻔한 수순이 기다릴 거라는 생각도 들어) 쓴웃음만 나왔던 게 불과 엊그제의 일이다. 

 이렇게 내 삶이 팍팍해지는 건, 근본적으로 사회가 팍팍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부터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위에서부터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법이 있는 사람들 편에서 봉사하는 하녀가 되었는데, 누가 법을 무서워하겠으며, 법원의 판결에 어떤 권위가 서겠느냔 말이다. 공식적 절차보다는 비선라인이 더 강한 권력을 지닌 정부의 모습은, 인맥이면 다인 사회의 모습과 얼마나 판박이인지. 사람 알기룰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각종 갑질 사건을 만들고, 비정규직이 판치는 노동 환경을 만든 게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책을 덮으며 우울함과 희망이 교차했다. 그나마 알려진 게 이 정도라면, 알려지지 않는 곳에서는 또 얼마나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점에서 우울했고,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은 희망적이었다. 아직은 믿고 싶다.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결국 역사는 좋은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그러나 가끔씩 정말 그런 건지 회의가 들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고, 읽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소설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알기 쉬워서 문제였지.

 소설의 배경은 일제 치하 말기, 전쟁에 동원된 포경선 유키마루라는 배 안이다. 이 안에는 수없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들도 있고, 동원된 조선인들도 있고, 역시 강제로 동원된 필리핀인이나 대만인들도 있다. 그리고 같은 조선인이라도 일본군에게 아첨하는 자도 있고, 원했든 아니든 일본군에게 반기를 들게 되는 자도 있고,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나름 공평하게 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폭력으로 일단 군기부터 잡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폐쇄적인 사회가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작품이 나와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해 너무나 잘 안다. 너무 잘 알아서 그 안에서 이젠 어떤 가혹행위가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혀를 쯧쯧거리며 '그런 상황이라 그랬을 거야'라고 한두마디 정도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것은 그런 주제와는 조금 다르다. 생존게임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바다에서 표류하는 배 안의 일을 그린 샬럿 로건의 '라이프보트'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으나, 막상 읽어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이 어떤 식으로 정당화되고, 또 대물림되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사회 내에 내재된 폭력이 '폐쇄 집단'이 될 때, 그것이 어떻게 폭발하는 가 역시 잘 보여준다. 초반에 부당하게 징용되어,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만으로 무참히 폭행당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분노하고 속상해했던 독자들이라면, 그 조선인들이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대로 필리핀인들이나 대만인들에게 행할 때 적잖이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낄 것이다. 

 

필리핀인들이 동요했다. 마누엘을 이렇게 만든 만덕을 가리키며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만덕은 당황했다. 그는 일본인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만덕은 갑판장의 좋은 학생이었고, 그가 대만인이나, 필리핀인에게 했던 짓들은 갑판장의 행동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략)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 처한 만덕은 대치한 조선인들에게 우리가 저 새끼들에게 말리면 안 된다고, 고장난 축음기판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할 뿐이었다. -p.293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 부당하고 폭력적인 일을 당한 사람이 권력을 가진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사람은 왜 자신이 당한 일을 타인이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을 할 확률보다,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폭력을 '나도 당했어'라는 이유로 타인에게 가하는 경우가 많은 걸까? 작품을 다 읽고 작가의 말에 나와 있는, 이 소설의 동기가 되는 해양 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심지어 이 실제 사고는 어떤 극한 상황도 아니고, 이런 일제 치하 전쟁기 때도 아닌, 불과 3~5년 전에 일어난, 한국인 선원이 동남아시아 선원이나 조선족 선원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인간은 원래 짐승이야. 인간은 원래 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지.'라고 넘겨버리는 것은 오히려 간단하다. 내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나라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유키마루와 다르면 얼마나 다르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윤일병 사건을 위시한 군대 내의 각종 폭력사고도 그렇고, 회사 내 폭력과 왕따, 학교내 폭력이 이 배에서 일어난 사건과 본질은 닿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폭력의 특징이 부당한 폭행을 당한 사람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면 도리어 가해자가 되어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는 것 아니겠는가. 환경이 점점 혹독해지고, 먹을 것이 점점 부족해질수록 선원들의 행동이 잔인해지는 걸 보면, 최근 먹고 살기 각박해지며 사회 내에서 각종 문제가 터지는 것이 생각난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챕터 '먼 빛'을 제외하면, 이 소설의 거의 결말부라고 할 수 있는 챕터의 제목은 '무간지옥'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날들 - 대서양 외딴섬 감옥에서 보낸 756일간의 기록
장미정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누군가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영화 '집으로 가는 길'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그 영화를 본 사람이거나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거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영화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들 때문이라고나 할까.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영화는 실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운운이 나온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 영화의 내용이 100%의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재미있었던 것은 나를 포함한, 당시 영화를 봤던 사람들 중 극중 대사관의 행태가 과장된 면은 있을지언정, 상당부분 사실이었을 거라고 자연스레 믿고 있었던 점이었다. 

 슬픈 현실이지만, 우리는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으로 정작 내가 나라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나라는 나를 꼭 도와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다못해 정말 범죄를 당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 봐도 경찰들이 정작 피해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문서 처리에만 급급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본인의 경험이다) 교통위반 딱지는 칼같이 떼고, 신호위반에는 엄정하게 떨어지는 벌금 고지서는 '높으신 분들'의 횡령이나 뇌물에는 참 인색하게 떨어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사관을 욕하는 걸 보면, 안타깝게도 이런 경험은 나만 했던 '재수없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 중 이게 과장되었을 지언정 '우리 대사관이 이럴 리 없다!'고 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걸 보니 말이다.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해도 하는 수 없지만,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죄, 이런 나라를 바꾸지 못하는 내 능력도 죄라 그래서 어쩌겠나 싶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화가 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이 나라의 윗선들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서 영화 후기도 쓰지 않았더랬다. 사실, 이 사건은 내게 그렇게 잠깐의 분노와 한탄 정도로 지나갈 법한 이야기였다. 이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굳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었다. 영화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오히려 이렇게 잊혀질 일에 대해 관심을 확 가게 만드는 글이 외교부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참고 :추적 60분 장미정 사건 보도에 대한 외교부 입장) 언뜻 보면 외교부는 정말 할 만큼 한 것도 같다. 그런데 보다 보면 정말 한숨이 나오는 글이다. 중간에 타 사례를 인용하며 꼭 장미정씨가 20년쯤은 받아야 하는데 1년 받고 나온 것은 천행인 것처럼 써 놓은 부분에서는 이 글이 정말 대한민국 회교부가 쓴게 맞기는 한 건가, 오히려 한국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한국 외교부가 프랑스도 안 하는 변명을 나서서 해 주고 있는 건가. 게다가 구글 검색을 해 보니 외교부는 정말로 추적 60분의 방송이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방송을 막으려고 했다더라. 참, 개인적으로 외교부 해명문 중간에 나오는 '장미정으로부터 감사하다는 서신 접수'는 좀 구차하게도 보였다. 실제로 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당사자와 가족들은 실제로는 죽일놈 살릴놈 하면서도 최고한 입과 손으로는 '존경하는 대사님' 운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사서 읽어봤다. 외교부의 말도 들어봤으니, 장미정씨의 말도 들어봐야겠다 싶었다. 처음 책을 폈을 때는 오히려 경계심이 가득했었다. 얼마나 감상적인 글이 가득할 것이며, 또 얼마나 자기 변명이 가득할까 생각했었다. 게다가 사람의 기억은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조작되는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책은 담담하고 건조하게 서술된다. 오히려 전문 작가라면 눈물 좀 뽑을 장면들도 그냥 '한없이 울었다' 정도로 서술해나간다. 그래서 오히려 사건에 몰입하고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좀 재미있었던 게, 외교부의 저 입장문을 보고 보다보면, 외교부가 왜 저런 글을 썼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달까. 한 번이라도 회사에서 보고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어떤 사건에서 어떤 일을 저런 식으로 서술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되려 장미정씨를 위로하기보다는 자살하도록 충동질하게 되는 그 방문 건이 '교도소 방문, 장미정 면담'이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놀란 것은 내가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100% 영화를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던 귀국 후 전화 통보도 사실이었고, 역시 100% 영화를 위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간수에 의한 수감자 강간도 어느 정도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확실히 책은 영화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지라, 처음에는 그렇게 의지하던 대사관을 어떻게 불신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참 .... 그렇다. 보고 나면 오히려 영화보다 감정 소진은 덜 되는데도 더욱 허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교도소에는 VIP룸도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인과 프랑스인이 수감되어 있다고 했다. 그곳은 일반 방보대 두 배는 더 컸다. 일본 대사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왔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부족하지 않게 챙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도소 측에서도 일본인이라고 하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VIP 룸에 있는 수감자들은 고단하게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본인들이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지낸다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우리나라가 좁다거나, 힘이 없거나 답답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중략) 엄연히 나도 일본 못지않은 선진국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죄수들 사이에서만큼은 초라한 착각이었다. (pp.100-101)


 국가는 국민들의 보호자이고, 변호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사치스럽고 과분한 생각이던가. 의지할 데 없는 외국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나라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 편에 서서 날 보호해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바랄 수 없는 일이던가. 최소한 국민이 무언가를 주장할 때, 그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게 그렇게 안 될 일이던가.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왜 요즘에는 그 반대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국가'라는 명분으로 국민을 소모하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덧 - 외교부의 글과 함께 읽어보면 좋을 글이 있어 링크함. 장미정 사건에 대하여 - 외교부의 거짓말.
덧 2 -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춰서 내려고 만든 책이라 글이 정리되지 않고, 너무 아마추어적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가독성도 좋고, 책도 잘 나온 듯하다. 하지만 역시나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읽다보면 종종 오탈자가 보이는 점은 아쉽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1-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
참 쓸쓸하네요.
쓸쓸
씁쓸.

이카 2014-01-28 07:35   좋아요 0 | URL
정말 쓸쓸씁쓸한 일이에요 ㅠ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쓰기 위해서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 제목을 장난으로 쓴 건 아니다. 정말로 나는 이 책에 대해 (엄밀한 의미로) 읽지 않고 말하는 중이니까. 

 
 처음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제목만 듣고도 참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읽지 않은 책에 말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순간, 이 책은 내게 UB+(Unkwon Book 전혀 읽어보지 않은 책, + 긍정적)이 된 셈이다) 게다가 솔직히 소위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에게는, 아니, 꼭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은 은근히 많이 생기지 않던가. 독후감은 써야 하는데 책을 읽지 않은 경우나 읽지 않은 책(혹은 본 적도 없는 작품)에 대해 서평 레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생 때로만 한정짓더라도 내가 제출한(혹은 내가 관여한) 레포트의 몇몇은 책을 전혀 혹은 거의 읽지 않고서 써낸 것들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만 해도 이렇다. 나는 '에밀을 읽고 루소의 교육관에 대한 비평을 하시오'라는 과제를 받은 친구를 도와 정작 나 자신은 에밀은 읽지 않았으면서도 루소의 교육관에 대해 (심지어 에밀의 본문을 인용해가면서) 비평문을 작성 할 수 있었고, 파리대왕은 제출 기한을 지키려고 앞부분만 읽은 상태로 전체에 대해 감상을 써낸 적도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종종 내 자신은 정작 실물을 보지도 못한 책들을 남들에게 소개할 때도 있고, 마찬가지로 한 페이지도 넘겨보지 않은 책들을 남들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할 때도 있다. 저자(피에라 바야르)가 말한 대로 이런 일들은 대개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책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김영하씨의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그리고 이 순간에 이 책은 내게 HB ++(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 매우 긍정적)이 된 셈이다.) 김영하씨를 통해 알게 된 이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는 내 예상과 비슷했고, 또 어느 정도는 엇나가는 부분도 있었는데, 나는 또 한동안 그렇게 얻은 책 내용으로 이 책에 대해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팟캐스트를 들은 이후 나는 이 책을 사서 서가에 꽂아 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애매하게 남는 오후 시간을 때우려 집어들고 읽었으니, 이제서야 겨우, 간신히, 이 책은 내게 SB +(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본 책, 긍정적)이 될 수 있었다. 왜 SB냐고? 그거야 내가 이 책을 대충대충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야 정독을 시작했지만,이내 슬쩍 지루해져서 지루해보이는 부분들은 건너뛰고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으니까.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걸 이 책을 읽었다고 해야 할까 읽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책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 1부에서는 비독서의 유형들을 정의하고, 2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분석하며, 마지막인 3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쓸 수 있는일반적인 대처 요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부와 3부며, 그래서 그런지 가장 지루한 부분도 2부에 몰려 있다. 책을 읽으며 종종 집중이 흩어져 '응? 작가가 지금 뭘 말하려고 하고 있더라?'라고 생각하며 앞장을 뒤적이며 소제목을 찾아봐야 했던 때도 2부가 가장 많았다. 어쨌거나 1부와 3부 중에서도 내용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며, 내가 보기에 책의 핵심을 담고 있는 부분은 1부이고,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3부였다.(하지만 3부야말로 목차만 훑어봐도 내용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참, 글을 마무리하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읽지 않은 상태로 말할 수 있는 팁을 말해볼까. 이 책을 집어들어 프롤로그만 딱 정독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제 이 책에 대해 읽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