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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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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틀림은 어떤 느낌일까. 삶에서 다름이라는 잣대로 정의되는 이분법적 분류가 삶의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차단하는 극단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나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은 굳이 종교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시선에서도  이런 다름의 잣대는 그대로 적용된다. '다름'의 잣대 , 다름이 틀림이 아님에도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점점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일까?

 

올 여름 내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파괴 되는 장면이 전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이 지구촌화 되면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듯 보이지만 세계사의 굵직한 획을 그었던 종교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뿌리 깊은 반목과 분쟁은 이미 이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고서적을 뒤적여야 한다. 몇 년전 유대인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라는 유대인이 저술한 <예루살렘 전기>를 읽으며 예루살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접해 본 적이 있다. 저자는 예루살렘 역사책이 단 두 권만이 존재한다며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통해 예루살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집필하였다고 하였다. 사이먼 시백은 예루살렘을 축복과 저주가 공존하는 땅이라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을 듯 하다. 매일 아침 펼쳐지는 진풍경,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의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를 향해서는 저주를 퍼붓는 광경을 매일 아침마다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세 종교 이야기를 보면서 당연히 외국인 저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식견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 홍익희는 KOTRA 에 입사한 후 무역장관을 거쳐 퇴임한 글로벌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숫자는 많지 않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으로 자리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우수성을 보면서 많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궤적을 경제사적 관점으로 조명한 '유대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하였고 유대인들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펴낸 저자이다. 이 책은 종교를 통해 보는 유대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며 세계 3대 종교안에 들어가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모태로서의 유대교를 재조명함으로 역사에서 다름의 시각이 가져온 작금의 반복과 분쟁의 원인을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종교의 뿌리는 의외로 아브라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메르 최강의 도시국가 우르가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다신교를 숭배하고 성적행위가 종교의식의 하나였던 시대로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은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되는 것이 세 종교의 시발점이다. 아브라함이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무슬림의 시조가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의 시조가 된다. (이슬람교의 주장에 의하면 알라와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신이라고 한다.) 이후 유대교의 역사인 구약성경은 세 종교 모두의 경전이 되고, 이슬람교는 구약성경 중에서 코란에서 상충되지 않는 <모세오경>과 다윗의 시편을 경전으로 믿는다. 세 종교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며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로 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 모두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는 세 종교는 원래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다.

 

 

 

  

다른 점은 예수를 보는 관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 종교의 모태는 유대교로 아브라함이 직접 신과 계약을 맺은 것을 믿는 유대민족의 종교가 된다. 반면 기독교는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기독교이다. 이보다 늦게 생긴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보는 종교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종교 모두 <구약성경><신약성경>, 이슬람교는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 복음서 그리고 <코란>이 경전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절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에서 오는 역사의 광풍은 지나치게 배타적인 유대교를 향한 세계인들의 반감을 가져왔고 가장 오래된 종교 전쟁인 십자군 원정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초래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은 삶에서 많은 다양성이나 가능성에 대한 시선을 차단시킨다. 다름은 결국 틀림으로 간주되어 극단으로 치닫게 되고 , 이러한 모습은 현실의 정치문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분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 예루살렘을 볼 때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어리석음은 종교적 도그마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배타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이 글귀는 신앙 또는 신조에 입각한 도그마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교조주의와 근본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교적 도그마에 취해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모두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짓곤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나 예수님 그 자체의 모습을 바라볼 때 가치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삶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듯, 천당과 지옥이라는 규정 역시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릇 된 가치이다. 이러한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더욱 배타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바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인 예루살렘의 역사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하여 이천년의 세월을 반목과 분쟁으로 역사를 써왔다.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틀림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한 번의 삶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길이라는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는 어쩌면 평생 추구해야 한 번 닿을까말까한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천 개의 눈이 있으며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길에는 천개의 길이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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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나무 2014-10-2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익희 이분 유대인에 관한 책을 많이 썼는데 세종교에 관한 책도 나왔구나.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아주 민감한 문제,
지금도 진행중인 분쟁..
보니까 저자가 유대인에 관한 관심이 많더라구.

책에 대한 열정 여전하네~^^

드림모노로그 2014-10-27 11:59   좋아요 0 | URL
홍익희 이분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는 것 같아.
예루살렘 전기가 최고의 책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인이 이런 방대한 분량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다는 데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구.
조금 시간이 여유로와지면 저자의 다른 책도 구입해서 읽을까해.
나에게도 종교는 미완의 학문이니까.~

요즘 업무와 연계된 일들로 인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아서
머리 식히려고 일부러 책에 집중하는 중 ㅋㅋㅋ
21세기 자본, 보내준다는 걸, 아직도 못 보내고 있네. 쏘리 ~
댓글을 오늘에야 봤어.... 정신없이 지내는 나날이라,,, ㅠㅠㅠ
보낸 후 연락할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