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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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홀링허스트의 장편 소설 "수영장 도서관"의 배경은 HIV가 창궐하기 직전인 1983년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성적으로 왕성한 남성 동성애자들이다. 소설은 그들이 분명히 느꼈을 차별적인 시선보다 그런 시선을 압도하는 욕망을 다룬다. 욕망은 심지어 소설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무명의 남자와의 섹스를 기대하며 공원의 공공 화장실에 들어간 주인공 윌리엄이 때마침 거기 있던 노인이 심장 마비로 쓰러지자 그를 살린다. 그는 팔십 대의 동성애자 찰스다. 훗날 윌리엄과 스포츠 클럽에서 다시 만난다. 윌리엄이 자신이 당신을 살렸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는 윌리엄을 집으로 초대한다. 자식 없이 혼자 사는 그는 윌리엄에게 중대한 과제를 맡긴다. 바로 자신에 관한 책을 써달라는 것. 1983년이라는 현재와 찰스의 젊은 시절이 담긴 일기는 이중 구조로 엮인다. "수영장 도서관"이라는 신비로운 제목은 주인공 윌리엄의 추억이 담긴 장소다. 천진한 욕망이 처음으로 발현되고 그로 말미암아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학교의 수영장을 뜻한다. 학창시절 윌과 친구들이 버릇처럼 하던 말, "도서관에 다녀올게"는 수영장에 간다는 의미였다. 수영장 도서관에서 윌리엄과 친구들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스포츠 클럽에서 윌리엄은 헤엄을 치고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도 수영장 도서관을 잊지 못한다. 수영장 도서관은 어쩌면 그에게 처음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준 곳일 테다. 앨런 홀링허스트는 섹스 묘사를 훌륭하게 해낸다. 성정체성을 떠나 누구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 흥분할 것 같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런 흥분은 어느덧 사그라든다. 작가가 아무리 연민 어린 시선으로 봐주길 바라지 않는다 해도, 또는 연민이 깃들 틈이 없을 정도로 섹스 묘사가 거침이 없다 해도 시대적 배경과 건장한 몸들을 둘러싼 그리움의 색채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는 그때 같은 시절이 오지 못하리라는.

스포츠 클럽에서 건장한 육체들을 바라보는 찰스는 좋은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육체의 덧없음을 아는 현자 같은 인물이다. 그는 팔십 대 동성애자, 생존자로서 윌리엄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이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띠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설 외적인 환경을 자꾸만 떠올린다. 찰스는 어쩌면 스포츠 클럽을 드나드는 수많은 젊은이들보다 오래 살지도 모른다. 좋은 시절이 과거에만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미래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자로서 남성 동성애자들을 조망하는 천진하나 쓸쓸한 시선을 갖춘 인물이다. 그런 찰스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만 하는 주인공 윌리엄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윌리엄은 머지않아 친구들과 하룻밤 인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볼 것이다. 생존하면서 생존에 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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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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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탄'은 우리가 오늘 아침에 배달된 석탄을 풀밭에서 축사로 나르는 동안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우리가 오전에 일을 하고 있을 때 동네 이웃인 어린이, 최근에 어머니를 잃은 어린이 빈센트가 방문한다. 빈센트가 우리의 일에 관심을 보이자 우리는 빈센트가 직접 석탄을 만져보면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진지하게 일을 하는 빈센트를 보자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빈센트의 죽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는 사랑과 찢어진 마음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다. 우리는 죽은 어머니가 빈센트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치리라는 걸 짐작한다. 우리는 석탄으로 더럽혀진 빈센트의 손에서 석탄을 가져간다. 그것이 '성체'라도 되는 양.

여섯 페이지에 걸친 짧은 소설을 통해 나는 어린이를 향한 어른들의 사려 깊은 마음씨를 헤아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잃었지만 꿋꿋하게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는 빈센트와 그런 빈센트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가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두는 어른들의 배려심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2. '페티시'는 떠남과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자인 '나'는 동반자 카를의 부재를 확인하고는 서커스 차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자그마한 불을 피우고 불 가에 앉는다. 그녀가 불을 크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불이 너무 커지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 같아서이다. 머지 않아 불의 크기에 걸맞은 아이가 '나'의 곁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별이나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순간 자신이 카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는, 카를이 있다면 아무 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카를을 향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카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상관이 없다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을 헤아릴수록 카를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진다. '나'는 항상 배낭을 갖고 다니는, 배낭과 함께 자리를 비운 카를을 기다린다. 나는 '나'의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아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 '나'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이제 혼자다.

3. ‘솔라리스‘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두 여자 친구 아다와 조피아가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 뒤의 이야기다. 아다는 사진을, 조피아는 연극을 전공했다. 아다는 조피아를 만나러 밤기차를 탄다. 마침 아다가 조피아를 방문하는 동안 조피아의 딸이 생일을 맞는다. 딸의 생일 저녁에 조피아는 연극 ‘솔라리스’의 초연에 참여한다. 조피아가 해리 역을 맡고, 조피아의 동료 알렉산더가 크리스 켈빈 역을 맡는다. 조피아는 아다 앞에서 알렉산더가 얼마나 성적으로 ‘천박한’ 사람인지 거리낌 없는 언어로 말을 한다. 아다는 알렉산더를 직접 만나자 끌림을 느낀다. 
유디트 헤르만처럼 끌림을 잘 표현하는 작가는 찾기 어렵다. 그것은 그의 특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며 몽롱한 채로 입을 맞추기까지를 유디트 헤르만은 그가 잘 아는 꿈처럼 선명하게 그려낸다.

4. '시'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방문한 딸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딸은 아버지의 작은 집 바로 옆에 있는 제과점에서 살구 케이크와 자두 케이크를 한 조각씩 사서는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물건들로 어수선한 집에서 겨우 딸과 자신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딸은 회상한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아버지를 남편과 함께 찾으러 갔던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두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기억해낸다. 딸은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케이크를 먹는다. 아버지는 역시 살구 케이크는 무시한다. 그리고 케이크를 만든 제빵사가 호모일 것이라며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딸은 놀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버지가 한 말을 분명히 기억하겠다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화자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머물렀던 한때를 떠올린다. 그때 그는 시 한 편을 읽기도 버거워했다. '당시 그는 시를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시를 읽으면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잊을 수 없다. 딸과 함께 간신히 시를 읽던 아버지는 쉽게 감상에 젖곤 했다. 어쩌면 내 표현은 그의 상태를 낮잡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시를 읽을 때마다 죽음에 가까워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딸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충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버지가 아프기 전에 자두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기억을 좋아한다. 그런 무의식이 구입이라는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발현되어 자두 케이크가 아버지의 입가에 닿아서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게 중요했고, 그 중에서 분명 또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중요했다'라고. 하지만 다른 무언가에 관해서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5. '레티파크'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한 여자가 한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다른 여자를 마트 계산대 앞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로제는 자신이 살던 동네를 통틀어 가장 예쁘고 활기가 넘쳤던 엘레나가 퇴색되고 멍한 여자가 되어버린 걸 알아챈다. 엘레나가 아무리 빛을 잃어도 로제만은 그를 알아볼 것처럼 확신에 차서는. 로제는 엘레나가 지갑을 '책처럼 펼치고'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엘레나가 어쩌다 퇴색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 로제는 다만 엘레나를 앞에 두고도 엘레나를 그리워한다. 
로제와 엘레나가 젊었을 때, 두 사람은 한 남자로 인해 투명하게 얽힌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로제를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엘레나와 사귀었다. 그 남자는 로제를 좋아한 시절에는 로제 집의 현관문 밑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밀어넣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와 사귀었을 때에는 엘레나가 자란 '레티파크'라는 동네를 흑백 사진으로 찍어 엘레나에게 앨범을 만들어줬었다. 그 남자는 앨범을 엘레나에게 선물로 주기 전에 그것을 로제에게 먼저 보여줬었다. 로제는 그리움의 색채로 가득한 앨범을 보면서 그런 선물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를 찼다. 
나는 마트 계산대에 장을 본 물건으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마트를 뛰쳐나가는 로제와 같은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자동차 보조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엘레나를 바라본다. 무엇을 기다리냐는 연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로제를 바라본다.

6. '증인들'은 어디에서도 말해진 적이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자인 '나'와 파경 위기에 이른 배우자 이보는 이보가 다니던 연구소의 후임인 사만타와 그의 남편 헨리를 만나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메뉴판에 있는 대서양 가자미나 연구소 내의 불가피한 구조, 폭풍이 몰아치는 봄, 위기에 관한 말을 주고받다가 달을 밟은 닐 암스트롱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것은 헨리가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헨리는 젊은 시절 바에서 만난 닐 암스트롱이 얼마나 고독해 보였는지, 실로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말하면서 닐의 모습은 흡사 죽음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말을 마치고 흐느낀다. 헨리의 배우자 사만타는 헨리에게 묻는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냐고. 헨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과 헤어지고 이보와 '나'는 집으로 향한다. 이보는 헨리의 말을 믿지 않지만 '나'는 믿는다. 달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확신한다. 그에 관해서 이보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고. 설령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믿고 싶어 하면서. 
나는 때때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 전체를 비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또 어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내게 이 소설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단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는 이야기는 어쩌면 단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음으로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가 소설로 접하듯 어떤 과정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눈에서 눈으로 전달된다. 이야기의 증인들은 그렇게 퍼져 나간다.

7. '종이비행기'는 새로운 시작과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싱글맘 테스는 열병이 난 두 아이를 친구 닉에게 맡겨놓고 복지원으로 면접을 보러 간다. 면접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솔직하게 말한다. 두 아이의 엄마고 싱글맘이고 정신 병동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고 오랫동안 집에 있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자신은 씩씩하고 투지가 있고 낙관적이며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테스는 집으로 돌아와 닉에게 자신이 면접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준다. 집에서 아이들은 종이비행기를 접으며 놀고 있었다. 밤에 아이들은 테스와 닉과 함께 열린 창가 앞에 선다. 하늘을 향해 비행기를 던진다. 
중력을 타는 건 종이비행기뿐만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테스도 중력을 타고 나아갈 것이다. 면접에서 합격을 하든 불합격을 하든. 테스는 면접에서 자신이 솔직하게 말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밖에는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없었다. 불안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활공했으니.

8. 제목으로 쓰인 '제도'는 독일어로 'Inseln'이다. 단수로는 'Insel'인데 제목으로는 복수가 쓰였다. 아마도 화자인 '나'와 친구 마르타를 뜻하는 것 같다. '나'와 마르타 사이에는 기억의 물이 흐른다. 공통된 기억. 둘은 가까이에 있지만 따로 있을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했던 기억 때문에. 
소설은 '나'가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진 속에서 '나'와 마르타는 대칭이 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취해진 포즈가 아니었다. 단지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서로 닮은 모습을 띠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이 찍혔을 당시를 회상한다. 이민을 생각하고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마르타는 어쩌다 보니 큰 집에 단둘이 남겨졌었다. 둘이 이민을 단념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어쩌면 둘은 완벽히 단둘이 되는 경험을 하면서 이민을 단념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나'와 마르타는 각자의 가정을 갖고 만날 때마다 서로를 조금은 낯설게 대한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로를 닮는다. 가까이에 떠 있는 두 개의 섬처럼. 
마르타는 술에 취하면 '나'의 죽음을 걱정한다. 그런 마르타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타가 흘리는 눈물이 둘 사이의 물에 수심을 더한다고. 그들 딴에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에.

9. '포플러 꽃가루'는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셀마는 전 남편 마르코비치의 누나인 보야나를 만나러 보야나의 집에 방문했다. 거기엔 보야나와 스물일곱 해를 함께한 보야나의 남편 로베르트가 있었다. 셀마와 보야나는 로베르트가 차려준 저녁 식사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것만 같았다. 마르코비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 것. 점성술에 통달한 보야나는 셀마가 저녁 식사 초대에 응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로베르트는 셀마의 이혼을 언급했다. '마르코비치와 함께하면서 당신은 어디가 당신의 선인지를 영원히 배웠어요'라고. 취기에 오른 셀마는 보야나에게 물었다. 마르코비치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보야나는 글쎄,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연기 냄새가 났다. 로베르트는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했다. 곧 돌아와서는 포플러 꽃가루에 의해 자연 발화가 일어났다며 태연하게 앉아 있는 셀마와 보야나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로베르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보야나를 떠났다. 보야나는 로베르트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모른다. 
셀마는 로베르트가 말한 '선'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셀마의 한계를 그리는 그 선이 왜 위안을 주는 동시에 끔찍한지. 셀마는 자연 발화라는 전문 용어를 기억한다. 사랑도 자연 발화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곧 버린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곧바로 버리는 셀마에게서 어떤 틈을 본다. 그 틈에는 영속적인 것이 없다. 로베르트가 자신을 왜 떠났는지 모르겠다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사람이 정확힌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자신에게 있는지 모르겠다는 보야나의 말은 셀마의 확신에 힘을 더한다.

10. '어떤 기억들'은 옷을 벗어 던지듯 기억을 벗는 노인, 그레타와 그를 두고 잠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청자, 모드의 이야기이다. 모드는 그레타의 넓은 집 이 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고, 그레타는 일 층에서 생활한다. 다른 세입자들이 떠나는 바람에 모드와 그레타는 단둘이 산다. 모드는 그레타의 책꽂이 앞에서 눈을 감고 아무 책이나 꺼내서는 무작위로 한 단락을 찾아 그레타에게 낭독해주곤 했다. 하지만 신경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그레타는 어느 순간 모드의 낭독을 거절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기력이 쇠잔해지는 그레타는 어느 날엔 긴 의자에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를 놔두고 이탈리아의 라고 디세오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는 모드는 부담감을 느낀다. 부담감으로 망설인다. 그런데 긴 의자에 누워 있던 그레타가 자신도 라고 디세오에 다녀온 적이 있다며 오래된 기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모드는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그것은 그레타가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기억이다. 그 기억에 관한 말을 끝으로 그레타는 모드를 안심시킨다. 걱정할 것 없다고, 혼자서도 잘 있을 거라고. 
소설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병은 괴로움이라고. 미처 하지 못한 행동에 의한 죄책감과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위안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주저한 결과라고. 기억을 벗는 것은 죽음, 홀가분하면서도 무책임한 결말을 향한 기대라고. 그러나 기억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수록 몸은 바닥을 향해 꺼져만 간다고.

11. '뇌'는 선택에 관한 소설이다. 어떤 선택은 흔쾌히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부부의 미래를 암시할 만큼 결정적이었음을. 오십 살의 사진작가 필리프와 서른다섯 살인 데보라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지만 아이를 향해 각기 다른 관심의 무게를 보인다. 필리프는 아이가 없어도 자기 인생을 '분별 있게' 끝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데보라는 아니다. 데보라는 아이 없이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한다. 필리프는 데보라의 말에 선뜻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다. 부부는 러시아에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거의 점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아이를 대면한다. 입양 기관에서 말하길, 부부와 눈빛이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아이는 부부가 세 번째로 방문을 했을 때에야 부부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는 아론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데보라는 아론에게 푹 빠져 지낸다. 더 이상 필리프의 작품에 이전처럼 집중하지도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필리프는 데보라에게 자신이 찍은 뇌 사진에 관한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뇌를 가지고 사는지, 수술 뒤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내가 알았더라면 사진을 찍지 못했을 거야'라고. 데보라가 그 말에 어떤 응답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그제야 필리프는 자신이 어떤 경계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챈다.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을 것임을.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그 순간처럼.

12. '편지'는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로 보인다. 이 소설 어디에도 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일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친절한 설명이 가득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팔십 대로 추정되는 노년의 남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스턴에 사는 친한 친구 월터와 그의 부인 에드나의 집에 방문한다. 월터는 안과 의사이고 독일어 고전을 즐겨 읽는다. 손수 집의 별채와 별장을 지었다. '나'는 월터를 '고도로 지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애정 어린 별명이다. '나'는 월터가 지었지만, 아직 하수 시설의 사용을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아 건설이 멈춘, 낸터컷 섬에 있는 별장에 가고 싶어 한다. 월터는 흔쾌히 내일 가보자고 한다. '나'는 그 다음 날 월터와 에드나 부부를 따라 배를 타고 부부의 별장으로 향한다. '나'와 부부는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부부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숙박 중인 호텔로 간다. 거기서 뉴욕으로 돌아가서 하루를 더 보낸다. 돌아다니며 도시를 구경한 뒤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는 '나'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쓴다. 지금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시간은 아니지만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다고. 그 문장이 그의 일기장에 적혔든 편지지에 적혔든 짐작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독자인 '나'를 염두에 두고 말이다. '나'의 편지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다. 나는 '나'가 자신에게 왜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편지가 필요하다는 걸 짐작할 수는 있다. '나'는 월터와의 만남과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과정을 편지의 형식을 빌려 기억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났을 때 집과의 거리감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텅 빈 집에 있을, 일상을 떠나지 못한 자신의 일부를 위해.

13. '꿈'은 삶을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울 때 간신히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꿈 같은 것을. 테레자의 친구 에피가 말한다. 자신이 꾼 꿈에 관해서. 꿈에는 에피 본인도 등장하지만 그 꿈 속에서 변화를 겪는 인물은 테레자다. 테레자가 놀라울 만큼 작아져서 에피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에피는 말한다. '만약 네가 정말로 상태가 안 좋다면, 지지리도 상태가 안 좋다면, 그러니까 내 말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통 막막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보는 걸 추천해'라고. 그 말에서 그 사람은 정신분석가인 굽타 박사다. 에피의 말은 예언처럼 테레자를 꿰뚫는다. 테레자는 에피가 말한 바로 그 상태가 되어 굽타 박사를 찾아간다. 
테레자는 수 년 동안이나 굽타 박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에피와는 멀어진 상태이다. 에피와 테레자는 길거리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지만 때로는 알은척을 하지 않기도 한다. 테레자는 점점 꿈을 덜 꾼다. 그래서 자신이 굽타 박사에게 마땅한 재료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꿈이 아닌 오래 전에 에피가 꾼 꿈에 관해 이야기한다. 테레자는 굽타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꿈의 의미를 혼자서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꿈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맞든 틀리든 테레자는 회의적이다. 정신분석을 받는 동안 자신이 알아낸 것은 에피의 꿈의 의미가 전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속도로는 정신의 본질에 닿지 못하리라 짐작한다. 테레자는 본질적인 것의 근원에 닿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나는 테레자가 닿고자 하는 근원보다 근원에 닿고자 하는 테레자에게 관심이 간다. 근원에 닿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테레자. 테레자는 언젠가 길거리에서 에피를 만난 적이 있다. 에피는 자식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테레자는 성장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은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고 여겨지는 성장의 힘을. 그러나 나는 테레자가 변화하는 와중에 있다고 여긴다. 근원에 닿지 못하더라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성장의 한복판에 있다고.

14. '동쪽'은 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데사에 도착한 제시카와 아리 커플은 기차에서 내린다. 숙소를 안내하는 골판지를 든 늙은 여자들 중 한 사람을 골라 그를 따라간다. 한데 그의 숙소는 허름하고 먼지로 덮인 침대와 곰팡이가 가득한 냉장고가 있다. 제시카는 숙소를 거부한다. 기대했던,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오데사에서 벌을 받는 것만 같다는 생각까지 한다. 아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데사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오데사는 원래 이렇다며 제시카를 설득한다. 하지만 제시카는 도무지 숙소에 머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커플은 숙소를 떠난다. 아리가 제시카를 향해 말한다. '우리 바다 쪽으로 내려가자. 멋진 걸 발견할 거야, 약속할게. 너한테 약속할게.' 
나는 상상력이 좋다는 점에서 제시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지 못한 여자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던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기대하다'라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시카는 숙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럴 선택권이 있다. 바다 쪽으로 향하며 다시 기대를 할 수 있다. 아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 있다. 비록 태연자약하게든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누면서든 기대를 품을 수 없을지라도.

15. '귀환'은 반쪽짜리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는 화자인 '나'와 수다쟁이 친구 리코가 나온다. 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다. 마흔이 넘은 때까지. 리코는 돈을 벌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가 한 해 만에 귀환했다. 자신 아버지의 무덤과 '나'의 근처로. 리코는 '나'의 집을 방문해 '나'의 아들 지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의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는다. 부엌에서 금붕어 어항의 물을 갈아주는 '나'에게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도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리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리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알지는 못한다.' 
나는 우정이란 것은 늘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말이 많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청자의 역할을 기대한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입이 무겁다면. 이 소설은 그런 사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다 아는 사이처럼 보여도 정보는 일방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성격의 차이 때문일 거라고.

16. '교차로'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도덕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드레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패트리샤와 비토 커플은 어느 날부터 한 가족과 집을 공유한다. 그 가족은 집을 헛간처럼 만든다. 소설에 쓰여 있듯 식탁 위에 변을 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짓들을 해서 집을 망가뜨려 놓는다. 그 집 아들은 심지어 커플의 공간에 침입하기까지 한다. 패트리샤는 한참을 망설인 다음 그 집 아들을 경찰에 고발한다. 커플은 그 가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패트리샤는 집주인 안드레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자 안드레는 자신이 그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패트리샤에게 차라리 자신의 집을 사라고 한다. 패트리샤는 이번에도 망설인다. 자신이 문제의 가족을 내쫓으면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다. 비토는 이건 도덕성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패트리샤는 하염없이 망설인다. 비토의 뒤편, 히아신스의 짙은 푸름 속에서 신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신이 왜 나타났을지,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한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패트리샤를 달래기 위함인지. 패트리샤는 안드레가 집을 사라는 말을 했다고 비토에게 알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식탁에 가만히 앉아 아지랑이 같은 신을 보면서 패트리샤는 후회한다. 하지만 '반사회적인' 가족을 내쫓는 것을 패트리샤는 안드레에게 바라지 않았었나. 패트리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멍하니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드레가 그들을 내쫓지 않고 적당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패트리샤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족을 내쫓지 않고 비토와 함께 셋집을 떠나는 것을. 신은 언제나 망설이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17. '어머니'는 단편집 "레티파크"의 마지막 순서로 실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나'의 어머니의 우정과 어머니가 죽음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는지에 관해 쓰여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어떤 문장으로 시작되는지 감히 여기 쓸 수 없다. 나는 스포일러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 맨 앞 페이지로 돌아가서는 슬픔이 북받치는 걸 느꼈다. 나는 화자인 '나'가 자라서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우아하고 흔쾌하게 여자들의 죽음을 대했는지 이해했다는 걸 안다. 그 앎의 순간에 소름이 끼친다. 어머니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을 때, 어머니가 가장 친한 친구를 떠나보내고 친구의 어머니를 보살필 때 얼마나 고독했을지 '나'는 이제 안다. 죽음은 어머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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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월’을 봤다. 기억에 남은 것은 다른 유족들이 영하의 날씨에 바깥에서 잠에 들려 할 때 그 순간에도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문종택 씨에게 밤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기록하는 자와 기록되는 자 사이의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비명들, 삭발한 머리를 땅에 찧으며 몸부림을 치는 유족을 말리는 유족들, 서로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유족을 대했다는 유족의 말씀, 문재인 정권에 기대를 걸었다가 배신당한 순간, 참사로 인해 세상을 뜬 학생들의 생의 흔적이 종이 상자에 담겨 교실을 떠나는 모습.
나는 세월호 유족들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유족임을 감추지 않고 떳떳하게 드러내도 그 누구도 ‘지겹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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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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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멜라의 단편 소설 '이응 이응'은 수용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화자는 성 정체성 스펙트럼을 반영한, 심지어 사용자에게 서사까지 부여할 수 있는 섹스 머신 '이응'이 이곳저곳에 공공연하게 설치되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이응에 혹하지 않는다. 이응을 거리낄 것 없이 사용하던 인물은 화자의 할머니고, 화자는 할머니에 관해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와 반려견 '보리' 또는 '보리차차'와 함께 하곤 했던 산책을 회상한다. 화자는 우리(We)와 포옹의 줄인말인 '위옹'이라는 모임에 가입한다. 위옹에서의 약속은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른 회원과 로맨틱한 관계도, 성적인 관계도 맺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나는 화자에게 이응이라는 기계가 지나치게 유성애적으로, 그래서 폭력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화자가 결국 이응이라는 기계 속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것도 성애적인 감각과는 다른 것이리라 짐작한다. 위옹에서 금기시했던 관계를 '마침내' 맺은 것이 아니라 로맨틱한 관계도 성적인 관계도 아닌 수용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여긴다. 비를 맞아 덜덜 떨던 개가 모르는 사람의 품에 안기듯 그저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수용의 대상이자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소설을 읽으며 여실히 느꼈다. 반려견도, 할머니도 떠나보낸 화자가 위옹과 이응에서 얻은 위안은 상실을 달랠 수 있는 품을 발견함으로써 취해진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이 남았던 것은 과연 이응이라는 기계가 공적 장소에 놓일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지더라도 성범죄율이 줄어들 것인가, 이다. 성범죄는 쾌락보다는 권력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점을 다룬 문장을 읽을 때 갸웃했다.


2. 공형진의 단편 소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읽었다. 동료가 일터에서 노동을 하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된 사람과 환경에 관한 사유로 비관도 낙관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수영 교습반에서 만나 느릿느릿 수영을 배우며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나는 주인공인 희주와 주호가 왜 교습반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리숙하고 배우는 속도가 더 느린지 알 것 같다. 그들은 무언가가 자신들을 향해 엄습하고 있다는 걸 느끼거나 이미 엄습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이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나아갈 수 없다. 경계를 벗어나 굼뜨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주와 주호는 열심히 배운다. 교습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주희와 주호가 하염없이 헤엄을 치는 장면에서 나는 안도했다. 천천히 헤엄을 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의 속도가 왜 느린지 헤아리지 않는 타인들의 존재가 고마웠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저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까, 라며 의아해하지 않는 것도 헤아림의 자세로 보였다. 나도 타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이 유영할 수 있기를 바랐다.


3. 김기태의 단편 소설 '보편 교양'을 읽었다. 학교 선생님인 곽이 고등학교 삼 학년의 선택과목 '고전 읽기'를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순하게 이뤄지는 편이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학생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생각으로 곽은 긴장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치면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자본론"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던 학생 은재의 부친이 곽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로 인해 곽은 교장으로부터 한 마디를 듣기도 한다. "자기 전교조는 아니더라고?" 나는 곽을 향한 다른 선생들의 악의적이지는 않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은 반응을 기억한다. 그들은 곽이 유별난 선생으로 보이게 한다. 곽은 학생들을 위해 고전을 한 권 한 권 선별하고, 자는 학생들을 깨우지도 않고, 무관심을 헤아린다. 학생 은재는 그런 곽을 '진짜'라고 한다. 곽도 자신의 수업에 집중하고 흥미를 느끼며 스스로 공부할 줄 아는 은재를 '진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향해 '진짜'라고 부르는 이유를 안다. 그건 그들이 고전의 사회적 의의를 간파하고 고전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탐구할 줄 알며 선생과 학생 사이의 교류를 반갑게 느꼈기 때문이다. 은재가 서울대에 합격하면서 곽의 '고전 읽기' 강의는 인기가 좋아진다. 나는 은재가 서울대에 합격하지 않았더라면, 은재의 컨설턴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괜찮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강의는 동료 선생들과 교장, 그리고 학부모들의 관념 어린 눈길에 폐강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곽이 떳떳한 사람이라고 해도 강의를 진지하게 듣는 소수의 학생들 앞에서 선생으로서의 회의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해진다. 학교라는 곳은 왜 그렇게 나른하고 낡았을까.

4. 김남숙의 '파주'는 잊히지 않는 폭력과 혐오, 그리고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나'와 애인 정호는 어느 날 집 앞에 찾아온, 정호의 군대 시절 후배 현철을 만난다. 현철이 그들 앞에 나타난 이유는 정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일 년 동안 달마다 백만 원을 입금할 것. 그것이 현철이 요구하는 전부다. 정호 때문에 군대에 있는 동안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 정도로라도 보상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정호가 현철하게 가했던 폭력에 관해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호는 현철을 욕한다. '오타쿠'라며. 그리고 폭력에 경중이 있기라도 한 양 입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폭력에 관해서만 말한다. '나'는 정호가 말하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정호가 그렇다고 암시를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안다. 정호가 말을 피할수록 '나'는 피해자 현철의 행동과 특성을 눈에 담는다. '나'는 현철을 연민한다. 나는 소설 내내 정호가 끝내 말하지 않은 폭력의 형태를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일까. 얼마나 수치스러우면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하는가. 정호는 왜 현철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했을까. 그러고도 현철을 왜 시종 '오타쿠'라고 부르며 혐오할까. '나'는 어째서 정호가 휘두른 폭력을 혐오하고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정호를 떠나지 못할까. 나는 세 명의 인물을 둘러싼 폭력과 혐오,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굴레를 본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린다.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며 수치스러워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혐오하는 가해자의 시선과 가해자를 향한 혐오만큼이나 차오르는 연민 어린 시선의 혼합. 나는 화자인 '나'가 정호와는 달리 왜 현철을 잊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 현철은 '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5. 김지연의 단편 소설 '반려빚'은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주인공 정현이 빚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현의 해방은 단순히 빚을 갚으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정현에게 일억육천만 원이라는 빚을 남긴 전 애인 서일과의 완전한 작별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서일은 차일피일 기한을 늦추며 정현에게 돈을 갚지 않은 데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정현은 서일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치지 못했다. 꾸역꾸역 빚을 갚고 스스로를 얕보며 살았다. 나는 서일에게 차용증도 요구하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고민을 털어놓고 가족에게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말을 하지 못한 정현에게 공감한다. 누군가는 그에게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다 빚더미에 뭉개진 채로 살게 되었는지 말하기란, 더군다나 가족에게 밝히기란 어렵다. 가족은 왜 타인 때문에 네가 그 많은 빚을 갚고 있어? 라고 물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 동성애자인 정현은 사랑해서, 믿어서 그랬다는 말을 삼키며 차라리 말하지 말걸, 하고 후회할 것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고 서사도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성소수자라는 사회적 약자가 어떤 상황에 노출되기 쉬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현이 품고 있는 고통을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정현의 성격상 타인에게 한껏 의지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그런 성격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현은 사회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빚을 갚기 때문이다. 빚으로 말미암아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면서.

6. 성해나의 단편 소설 '혼모노'는 가짜, 선무당을 뜻하는 일본어 '니세모노'의 반댓말이다. 화자는 장수 할멈을 모시는 중년의 무당인 '나'이다. 내림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음기가 강한 터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어느날 스무 살 즈음으로 보이는 애기 무당이 화자의 맞은편 집에 이사를 온다. 애기 무당이 말하길, 자신이 장수 할멈을 모신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놀란다. 근래에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장수 할멈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장수 할멈이 정말로 자신을 떠나 애기 무당에게로 간 것인지 의심한다. 나는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서 생각했다. 역시 소설의 의미는 첫 문장을 책임지는 마지막 문장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마지막에 신이 떠난 이래 처음으로 환희에 젖은 '나'는 신을 이긴다. 바닥에 지쳐 쓰러진 채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애기 무당의 당황한 얼굴이 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애기 무당의 표정 위로 장수 할멈의 얼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비록 신은 떠났으나 신을 이기는 '나'는 혼모노다.

7. 전지영의 '언캐니 밸리'는 말 그대로 불쾌감을 자극할 정도로 괴이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불쾌감을 자극할 정도로 괴이한 느낌은 어느 마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왜소증이 있는 화가 겸 택시 운전사인 '나'를 보며 비장애인들이 느끼는 공포, 택시 승객의 얼굴과 동물의 몸을 합한 그림을 그리는 '나'를 향한 지인들의 혐오감,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도 높다란 부촌 청한동의 꼭대기에 있는 집을 드나드는 여자를 향한 궁금증, 청한동의 꼭대기에 사는 노부부가 그 여자에게 어떤 일을 요구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의심이 모두 모여 언캐니 밸리를 이룬다. 나는 이 소설에서 언캐니한 감각과 장애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장애라는 것은 장애인 본인이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에게 찍은 낙인을 통해 생긴 관념이 아닐까 한다. 청한동의 꼭대기에 있는 집을 드나들던 여자는 염산 테러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고 그 사건은 언론에 크게 다뤄진다.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장애는 장애인이 되는 경계와 함께 그려진다. '나'는 경찰에게 말한다. 키가 작은 것이 장애냐며. 경계에서 '나'는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 감추지 않는 것을 '장애'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충격적으로 느끼는 것은 비장애인들이다. 반면에 이 소설 속에서 감춰지는 것은 무엇일까. 부촌 청한동의 꼭대기에 사는 노부부가 여자에게 요구한 바는 소설에서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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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뉴월에도 빛이 내리고 도트 시리즈 10
정도겸 지음 / 아작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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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겸의 “오뉴월에도 빛이 내리고”를 읽었다. 오뉴월은 지구의 주변을 공전하는 위성으로 지구인들이 어려워하는 ‘양육’을 도맡는다. 오뉴월에서 양육된 어린이 중 어그레스 즉, 공격성이 음성인 이들은 양육자로 키워진다. 그러나 지구인들은 이렇게 어그레스가 음성인 이들을 ‘오뉴월인’이라고 부르며 지구인들과 엄연히 다른 존재로 여긴다. 이 이분법적인 사고가 결국 오뉴월인들을 향한 공포를 키운다. 오뉴월에 남은 생명체들은 총 셋이다. 양육되고 있다가 어떤 사연으로 인해 남은 것이다. 오뉴월인인 서리와 한, 그리고 지구인인 정지현. 이들은 서로를 도와 지구로 향하기로 한다.
나는 작가가 암시하는 지구인들의 면모를 알아챌 수 있었다. 지구인들이 오뉴월인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 특히 주인공 셋이 타고 갈 우주선에 장애인을 위한 장치가 설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암시와 불친절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셋은 삭막한 오뉴월을 떠나 지구로 향한다. 나는 그들이 품은 희망과 용기를 느끼며 응원을 했다. 부디 무사히 지구로 향하여 자신다운 삶을 살기를. 그리고 죽어서까지 자신들을 양육한 스피커들을 잊지 말기를. 나는 스피커라는 양육 로봇을 고안해낸 작가에게 감탄했다. 죽어서까지 양육과 구원을 하는 존재들이라.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존재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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