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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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탄'은 우리가 오늘 아침에 배달된 석탄을 풀밭에서 축사로 나르는 동안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우리가 오전에 일을 하고 있을 때 동네 이웃인 어린이, 최근에 어머니를 잃은 어린이 빈센트가 방문한다. 빈센트가 우리의 일에 관심을 보이자 우리는 빈센트가 직접 석탄을 만져보면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진지하게 일을 하는 빈센트를 보자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빈센트의 죽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는 사랑과 찢어진 마음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다. 우리는 죽은 어머니가 빈센트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치리라는 걸 짐작한다. 우리는 석탄으로 더럽혀진 빈센트의 손에서 석탄을 가져간다. 그것이 '성체'라도 되는 양.

여섯 페이지에 걸친 짧은 소설을 통해 나는 어린이를 향한 어른들의 사려 깊은 마음씨를 헤아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잃었지만 꿋꿋하게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는 빈센트와 그런 빈센트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가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두는 어른들의 배려심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2. '페티시'는 떠남과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자인 '나'는 동반자 카를의 부재를 확인하고는 서커스 차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자그마한 불을 피우고 불 가에 앉는다. 그녀가 불을 크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불이 너무 커지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 같아서이다. 머지 않아 불의 크기에 걸맞은 아이가 '나'의 곁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별이나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순간 자신이 카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는, 카를이 있다면 아무 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카를을 향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카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상관이 없다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을 헤아릴수록 카를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진다. '나'는 항상 배낭을 갖고 다니는, 배낭과 함께 자리를 비운 카를을 기다린다. 나는 '나'의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아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 '나'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이제 혼자다.

3. ‘솔라리스‘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두 여자 친구 아다와 조피아가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 뒤의 이야기다. 아다는 사진을, 조피아는 연극을 전공했다. 아다는 조피아를 만나러 밤기차를 탄다. 마침 아다가 조피아를 방문하는 동안 조피아의 딸이 생일을 맞는다. 딸의 생일 저녁에 조피아는 연극 ‘솔라리스’의 초연에 참여한다. 조피아가 해리 역을 맡고, 조피아의 동료 알렉산더가 크리스 켈빈 역을 맡는다. 조피아는 아다 앞에서 알렉산더가 얼마나 성적으로 ‘천박한’ 사람인지 거리낌 없는 언어로 말을 한다. 아다는 알렉산더를 직접 만나자 끌림을 느낀다. 
유디트 헤르만처럼 끌림을 잘 표현하는 작가는 찾기 어렵다. 그것은 그의 특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며 몽롱한 채로 입을 맞추기까지를 유디트 헤르만은 그가 잘 아는 꿈처럼 선명하게 그려낸다.

4. '시'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방문한 딸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딸은 아버지의 작은 집 바로 옆에 있는 제과점에서 살구 케이크와 자두 케이크를 한 조각씩 사서는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물건들로 어수선한 집에서 겨우 딸과 자신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딸은 회상한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아버지를 남편과 함께 찾으러 갔던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두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기억해낸다. 딸은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케이크를 먹는다. 아버지는 역시 살구 케이크는 무시한다. 그리고 케이크를 만든 제빵사가 호모일 것이라며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딸은 놀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버지가 한 말을 분명히 기억하겠다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화자의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머물렀던 한때를 떠올린다. 그때 그는 시 한 편을 읽기도 버거워했다. '당시 그는 시를 견디는 연습을 했다. 그는 시를 읽으면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잊을 수 없다. 딸과 함께 간신히 시를 읽던 아버지는 쉽게 감상에 젖곤 했다. 어쩌면 내 표현은 그의 상태를 낮잡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시를 읽을 때마다 죽음에 가까워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딸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충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버지가 아프기 전에 자두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한다. 나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기억을 좋아한다. 그런 무의식이 구입이라는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발현되어 자두 케이크가 아버지의 입가에 닿아서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게 중요했고, 그 중에서 분명 또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중요했다'라고. 하지만 다른 무언가에 관해서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5. '레티파크'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한 여자가 한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다른 여자를 마트 계산대 앞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로제는 자신이 살던 동네를 통틀어 가장 예쁘고 활기가 넘쳤던 엘레나가 퇴색되고 멍한 여자가 되어버린 걸 알아챈다. 엘레나가 아무리 빛을 잃어도 로제만은 그를 알아볼 것처럼 확신에 차서는. 로제는 엘레나가 지갑을 '책처럼 펼치고'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엘레나가 어쩌다 퇴색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 로제는 다만 엘레나를 앞에 두고도 엘레나를 그리워한다. 
로제와 엘레나가 젊었을 때, 두 사람은 한 남자로 인해 투명하게 얽힌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로제를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엘레나와 사귀었다. 그 남자는 로제를 좋아한 시절에는 로제 집의 현관문 밑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밀어넣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와 사귀었을 때에는 엘레나가 자란 '레티파크'라는 동네를 흑백 사진으로 찍어 엘레나에게 앨범을 만들어줬었다. 그 남자는 앨범을 엘레나에게 선물로 주기 전에 그것을 로제에게 먼저 보여줬었다. 로제는 그리움의 색채로 가득한 앨범을 보면서 그런 선물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를 찼다. 
나는 마트 계산대에 장을 본 물건으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마트를 뛰쳐나가는 로제와 같은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자동차 보조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엘레나를 바라본다. 무엇을 기다리냐는 연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로제를 바라본다.

6. '증인들'은 어디에서도 말해진 적이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자인 '나'와 파경 위기에 이른 배우자 이보는 이보가 다니던 연구소의 후임인 사만타와 그의 남편 헨리를 만나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메뉴판에 있는 대서양 가자미나 연구소 내의 불가피한 구조, 폭풍이 몰아치는 봄, 위기에 관한 말을 주고받다가 달을 밟은 닐 암스트롱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것은 헨리가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헨리는 젊은 시절 바에서 만난 닐 암스트롱이 얼마나 고독해 보였는지, 실로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말하면서 닐의 모습은 흡사 죽음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말을 마치고 흐느낀다. 헨리의 배우자 사만타는 헨리에게 묻는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냐고. 헨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과 헤어지고 이보와 '나'는 집으로 향한다. 이보는 헨리의 말을 믿지 않지만 '나'는 믿는다. 달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확신한다. 그에 관해서 이보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고. 설령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믿고 싶어 하면서. 
나는 때때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 전체를 비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또 어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내게 이 소설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단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는 이야기는 어쩌면 단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음으로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가 소설로 접하듯 어떤 과정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눈에서 눈으로 전달된다. 이야기의 증인들은 그렇게 퍼져 나간다.

7. '종이비행기'는 새로운 시작과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싱글맘 테스는 열병이 난 두 아이를 친구 닉에게 맡겨놓고 복지원으로 면접을 보러 간다. 면접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솔직하게 말한다. 두 아이의 엄마고 싱글맘이고 정신 병동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고 오랫동안 집에 있었지만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자신은 씩씩하고 투지가 있고 낙관적이며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테스는 집으로 돌아와 닉에게 자신이 면접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준다. 집에서 아이들은 종이비행기를 접으며 놀고 있었다. 밤에 아이들은 테스와 닉과 함께 열린 창가 앞에 선다. 하늘을 향해 비행기를 던진다. 
중력을 타는 건 종이비행기뿐만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테스도 중력을 타고 나아갈 것이다. 면접에서 합격을 하든 불합격을 하든. 테스는 면접에서 자신이 솔직하게 말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밖에는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없었다. 불안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활공했으니.

8. 제목으로 쓰인 '제도'는 독일어로 'Inseln'이다. 단수로는 'Insel'인데 제목으로는 복수가 쓰였다. 아마도 화자인 '나'와 친구 마르타를 뜻하는 것 같다. '나'와 마르타 사이에는 기억의 물이 흐른다. 공통된 기억. 둘은 가까이에 있지만 따로 있을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함께했던 기억 때문에. 
소설은 '나'가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진 속에서 '나'와 마르타는 대칭이 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취해진 포즈가 아니었다. 단지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서로 닮은 모습을 띠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이 찍혔을 당시를 회상한다. 이민을 생각하고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마르타는 어쩌다 보니 큰 집에 단둘이 남겨졌었다. 둘이 이민을 단념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는다. 어쩌면 둘은 완벽히 단둘이 되는 경험을 하면서 이민을 단념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나'와 마르타는 각자의 가정을 갖고 만날 때마다 서로를 조금은 낯설게 대한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로를 닮는다. 가까이에 떠 있는 두 개의 섬처럼. 
마르타는 술에 취하면 '나'의 죽음을 걱정한다. 그런 마르타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타가 흘리는 눈물이 둘 사이의 물에 수심을 더한다고. 그들 딴에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에.

9. '포플러 꽃가루'는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셀마는 전 남편 마르코비치의 누나인 보야나를 만나러 보야나의 집에 방문했다. 거기엔 보야나와 스물일곱 해를 함께한 보야나의 남편 로베르트가 있었다. 셀마와 보야나는 로베르트가 차려준 저녁 식사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것만 같았다. 마르코비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 것. 점성술에 통달한 보야나는 셀마가 저녁 식사 초대에 응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로베르트는 셀마의 이혼을 언급했다. '마르코비치와 함께하면서 당신은 어디가 당신의 선인지를 영원히 배웠어요'라고. 취기에 오른 셀마는 보야나에게 물었다. 마르코비치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보야나는 글쎄,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연기 냄새가 났다. 로베르트는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했다. 곧 돌아와서는 포플러 꽃가루에 의해 자연 발화가 일어났다며 태연하게 앉아 있는 셀마와 보야나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로베르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보야나를 떠났다. 보야나는 로베르트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모른다. 
셀마는 로베르트가 말한 '선'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셀마의 한계를 그리는 그 선이 왜 위안을 주는 동시에 끔찍한지. 셀마는 자연 발화라는 전문 용어를 기억한다. 사랑도 자연 발화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곧 버린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곧바로 버리는 셀마에게서 어떤 틈을 본다. 그 틈에는 영속적인 것이 없다. 로베르트가 자신을 왜 떠났는지 모르겠다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사람이 정확힌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자신에게 있는지 모르겠다는 보야나의 말은 셀마의 확신에 힘을 더한다.

10. '어떤 기억들'은 옷을 벗어 던지듯 기억을 벗는 노인, 그레타와 그를 두고 잠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청자, 모드의 이야기이다. 모드는 그레타의 넓은 집 이 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고, 그레타는 일 층에서 생활한다. 다른 세입자들이 떠나는 바람에 모드와 그레타는 단둘이 산다. 모드는 그레타의 책꽂이 앞에서 눈을 감고 아무 책이나 꺼내서는 무작위로 한 단락을 찾아 그레타에게 낭독해주곤 했다. 하지만 신경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그레타는 어느 순간 모드의 낭독을 거절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기력이 쇠잔해지는 그레타는 어느 날엔 긴 의자에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를 놔두고 이탈리아의 라고 디세오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는 모드는 부담감을 느낀다. 부담감으로 망설인다. 그런데 긴 의자에 누워 있던 그레타가 자신도 라고 디세오에 다녀온 적이 있다며 오래된 기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모드는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그것은 그레타가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기억이다. 그 기억에 관한 말을 끝으로 그레타는 모드를 안심시킨다. 걱정할 것 없다고, 혼자서도 잘 있을 거라고. 
소설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병은 괴로움이라고. 미처 하지 못한 행동에 의한 죄책감과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위안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주저한 결과라고. 기억을 벗는 것은 죽음, 홀가분하면서도 무책임한 결말을 향한 기대라고. 그러나 기억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수록 몸은 바닥을 향해 꺼져만 간다고.

11. '뇌'는 선택에 관한 소설이다. 어떤 선택은 흔쾌히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부부의 미래를 암시할 만큼 결정적이었음을. 오십 살의 사진작가 필리프와 서른다섯 살인 데보라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지만 아이를 향해 각기 다른 관심의 무게를 보인다. 필리프는 아이가 없어도 자기 인생을 '분별 있게' 끝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데보라는 아니다. 데보라는 아이 없이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한다. 필리프는 데보라의 말에 선뜻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다. 부부는 러시아에서 알렉세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거의 점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아이를 대면한다. 입양 기관에서 말하길, 부부와 눈빛이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아이는 부부가 세 번째로 방문을 했을 때에야 부부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는 아론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데보라는 아론에게 푹 빠져 지낸다. 더 이상 필리프의 작품에 이전처럼 집중하지도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필리프는 데보라에게 자신이 찍은 뇌 사진에 관한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뇌를 가지고 사는지, 수술 뒤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내가 알았더라면 사진을 찍지 못했을 거야'라고. 데보라가 그 말에 어떤 응답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그제야 필리프는 자신이 어떤 경계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챈다.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을 것임을.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그 순간처럼.

12. '편지'는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로 보인다. 이 소설 어디에도 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일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친절한 설명이 가득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화자인 '나'는 팔십 대로 추정되는 노년의 남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스턴에 사는 친한 친구 월터와 그의 부인 에드나의 집에 방문한다. 월터는 안과 의사이고 독일어 고전을 즐겨 읽는다. 손수 집의 별채와 별장을 지었다. '나'는 월터를 '고도로 지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애정 어린 별명이다. '나'는 월터가 지었지만, 아직 하수 시설의 사용을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아 건설이 멈춘, 낸터컷 섬에 있는 별장에 가고 싶어 한다. 월터는 흔쾌히 내일 가보자고 한다. '나'는 그 다음 날 월터와 에드나 부부를 따라 배를 타고 부부의 별장으로 향한다. '나'와 부부는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부부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숙박 중인 호텔로 간다. 거기서 뉴욕으로 돌아가서 하루를 더 보낸다. 돌아다니며 도시를 구경한 뒤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는 '나'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쓴다. 지금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시간은 아니지만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다고. 그 문장이 그의 일기장에 적혔든 편지지에 적혔든 짐작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가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독자인 '나'를 염두에 두고 말이다. '나'의 편지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다. 나는 '나'가 자신에게 왜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편지가 필요하다는 걸 짐작할 수는 있다. '나'는 월터와의 만남과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과정을 편지의 형식을 빌려 기억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났을 때 집과의 거리감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텅 빈 집에 있을, 일상을 떠나지 못한 자신의 일부를 위해.

13. '꿈'은 삶을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울 때 간신히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꿈 같은 것을. 테레자의 친구 에피가 말한다. 자신이 꾼 꿈에 관해서. 꿈에는 에피 본인도 등장하지만 그 꿈 속에서 변화를 겪는 인물은 테레자다. 테레자가 놀라울 만큼 작아져서 에피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에피는 말한다. '만약 네가 정말로 상태가 안 좋다면, 지지리도 상태가 안 좋다면, 그러니까 내 말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통 막막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보는 걸 추천해'라고. 그 말에서 그 사람은 정신분석가인 굽타 박사다. 에피의 말은 예언처럼 테레자를 꿰뚫는다. 테레자는 에피가 말한 바로 그 상태가 되어 굽타 박사를 찾아간다. 
테레자는 수 년 동안이나 굽타 박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에피와는 멀어진 상태이다. 에피와 테레자는 길거리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지만 때로는 알은척을 하지 않기도 한다. 테레자는 점점 꿈을 덜 꾼다. 그래서 자신이 굽타 박사에게 마땅한 재료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꿈이 아닌 오래 전에 에피가 꾼 꿈에 관해 이야기한다. 테레자는 굽타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꿈의 의미를 혼자서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꿈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맞든 틀리든 테레자는 회의적이다. 정신분석을 받는 동안 자신이 알아낸 것은 에피의 꿈의 의미가 전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속도로는 정신의 본질에 닿지 못하리라 짐작한다. 테레자는 본질적인 것의 근원에 닿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나는 테레자가 닿고자 하는 근원보다 근원에 닿고자 하는 테레자에게 관심이 간다. 근원에 닿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테레자. 테레자는 언젠가 길거리에서 에피를 만난 적이 있다. 에피는 자식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테레자는 성장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은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고 여겨지는 성장의 힘을. 그러나 나는 테레자가 변화하는 와중에 있다고 여긴다. 근원에 닿지 못하더라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성장의 한복판에 있다고.

14. '동쪽'은 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데사에 도착한 제시카와 아리 커플은 기차에서 내린다. 숙소를 안내하는 골판지를 든 늙은 여자들 중 한 사람을 골라 그를 따라간다. 한데 그의 숙소는 허름하고 먼지로 덮인 침대와 곰팡이가 가득한 냉장고가 있다. 제시카는 숙소를 거부한다. 기대했던,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오데사에서 벌을 받는 것만 같다는 생각까지 한다. 아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데사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오데사는 원래 이렇다며 제시카를 설득한다. 하지만 제시카는 도무지 숙소에 머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커플은 숙소를 떠난다. 아리가 제시카를 향해 말한다. '우리 바다 쪽으로 내려가자. 멋진 걸 발견할 거야, 약속할게. 너한테 약속할게.' 
나는 상상력이 좋다는 점에서 제시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지 못한 여자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던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기대하다'라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시카는 숙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럴 선택권이 있다. 바다 쪽으로 향하며 다시 기대를 할 수 있다. 아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 있다. 비록 태연자약하게든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누면서든 기대를 품을 수 없을지라도.

15. '귀환'은 반쪽짜리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는 화자인 '나'와 수다쟁이 친구 리코가 나온다. 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다. 마흔이 넘은 때까지. 리코는 돈을 벌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가 한 해 만에 귀환했다. 자신 아버지의 무덤과 '나'의 근처로. 리코는 '나'의 집을 방문해 '나'의 아들 지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의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는다. 부엌에서 금붕어 어항의 물을 갈아주는 '나'에게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도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리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리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알지는 못한다.' 
나는 우정이란 것은 늘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말이 많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청자의 역할을 기대한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입이 무겁다면. 이 소설은 그런 사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다 아는 사이처럼 보여도 정보는 일방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성격의 차이 때문일 거라고.

16. '교차로'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도덕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드레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패트리샤와 비토 커플은 어느 날부터 한 가족과 집을 공유한다. 그 가족은 집을 헛간처럼 만든다. 소설에 쓰여 있듯 식탁 위에 변을 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짓들을 해서 집을 망가뜨려 놓는다. 그 집 아들은 심지어 커플의 공간에 침입하기까지 한다. 패트리샤는 한참을 망설인 다음 그 집 아들을 경찰에 고발한다. 커플은 그 가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패트리샤는 집주인 안드레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자 안드레는 자신이 그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패트리샤에게 차라리 자신의 집을 사라고 한다. 패트리샤는 이번에도 망설인다. 자신이 문제의 가족을 내쫓으면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다. 비토는 이건 도덕성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패트리샤는 하염없이 망설인다. 비토의 뒤편, 히아신스의 짙은 푸름 속에서 신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신이 왜 나타났을지,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한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패트리샤를 달래기 위함인지. 패트리샤는 안드레가 집을 사라는 말을 했다고 비토에게 알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식탁에 가만히 앉아 아지랑이 같은 신을 보면서 패트리샤는 후회한다. 하지만 '반사회적인' 가족을 내쫓는 것을 패트리샤는 안드레에게 바라지 않았었나. 패트리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멍하니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드레가 그들을 내쫓지 않고 적당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패트리샤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족을 내쫓지 않고 비토와 함께 셋집을 떠나는 것을. 신은 언제나 망설이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17. '어머니'는 단편집 "레티파크"의 마지막 순서로 실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나'의 어머니의 우정과 어머니가 죽음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는지에 관해 쓰여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어떤 문장으로 시작되는지 감히 여기 쓸 수 없다. 나는 스포일러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 맨 앞 페이지로 돌아가서는 슬픔이 북받치는 걸 느꼈다. 나는 화자인 '나'가 자라서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우아하고 흔쾌하게 여자들의 죽음을 대했는지 이해했다는 걸 안다. 그 앎의 순간에 소름이 끼친다. 어머니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을 때, 어머니가 가장 친한 친구를 떠나보내고 친구의 어머니를 보살필 때 얼마나 고독했을지 '나'는 이제 안다. 죽음은 어머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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