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셈을 알지만 샘을 모르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치는
한 번 틀린 문제는 꼭 맞추는 우등생


사춘기도 없는
중이염


음악을 크게 틀고 소설을 쓰며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좀비


더위도 추위도 모르는 
엣지 있는 패션감각


뚝딱뚝딱 금방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


휴가도 안가고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수년을 알아도 
마음을 알 수 없는


유진아


너는 남자야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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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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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말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중)

#수학자의아침 #김소연 #반대말



「반대말」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

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

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 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시집『수학자의 아침』지배하는 정서는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슬픈 현실에 체념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의 인식을 멈추지 않는다. 반대말이 없는 “컵처럼, 모자처럼, 눈동자 손길 입술”처럼 완성된 삶을 꿈꾼다. “어른, 여자, 변두리”라는 상극하는 개념을 초월해 독자적인 자존감을 유지하고자 한다. 컵을 떨어뜨려 완성의 반대말을 산산히 깨버린다. 나는 거의 ‘완생(完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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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모방



나는 재잘거리는 것을 좋아해 촉촉한 입술만큼

침이 마른 입술이 좋아

너는 말이 별로 없었지

그래서 좋았어





가끔 내 등에 턱을 갖다 대고 

어미처럼 쪼았어

내 심장 소리에 맞춰






너는 먼저 문을 여는 법이 없지






너는 가장 높고 뜨거운 날

바다를 건너와 한밤중에 몰래

구덩이를 파고 나를 낳았어







구덩이 위로 머리만 삐죽 내놓고

사방을 살피다가

손톱이 갈라지고 터져 피가 나는 줄도 몰랐어






너를 보기도 전에

너는 바다로 가버렸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는 너처럼

머리를 내밀고

너처럼 

피가 나도 몇 개 안 난 이빨과

손톱으로 벽을 긁어야 해





너처럼 바다로 달려가

너처럼 밑바닥에 몸을 얹고





너와 내가 태어난 그곳으로 돌아와

너처럼 구덩이를 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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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부터 뜯어 먹었다 
  배불리고
  배불려야 할 너는 없었다


  배불러 너를 낳았다
  배불러 낳은 너를 죽였다
  죽이고 낳기를 반복하여 너를 얻었다
  네가 물어다 온 것을 먹고 아홉 형제를 낳은 후
길게 자란 손톱을 잘랐다


  왜 그랬는지

  난 어떻게만 생각했다



  집을 지었다
  잎을 반으로 접어 말아 올려 구멍을 뚫고
너를 낳았다



  계속 말아 올렸다
  다 만든 요람을 잘라 땅에 떨어뜨렸다


  너는 그 요람을 먹고
  수컷을 먹고 형제를 먹고
  새끼를 나의 몸을 잡아먹고 뜯어먹고


  그럴 때마다 나는 흥분했다
  목이 잘린채 허덕이는 나의 신경은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지금 문지방 위에 서 있다


  나는 부화하여 가물가물 현관을 나선다
  점에서 면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알에서 유충으로


  잠을 갉아먹다가 다섯 번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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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편지



나는 글씨를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글씨가 삐뚤삐뚤 하거든요

안경을 바꾸고 펜을 바꿔도 글씨가 똑같아요

꿈은 반대라는 말이 좋아요






나는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면 꼭 엽서를 사요 거기에 편지를 써요

썼다가 지웠다가 또 써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글씨는 삐뚤삐뚤하지만 상관없어요







나는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려요

편지를 쓰고 보낸 적은 없어요

그런데 가끔씩 답장이 와요







오늘은 아무 생각없이 생각나는대로 써 볼 거에요 

모래와 햇빛, 파도, 웃음, 눈물

그리고 마음에 관해 







삐뚤어진 내 글씨가 좋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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