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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좋은생각 좋은소설선
생 텍쥐페리 글 그림, 고수현 옮김 / 좋은생각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왕자, 생택쥐페리, 좋은 생각,


#어린왕자

1. 읽었던, 읽었지만 읽은 것을 잊은,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이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월간지 ‘좋은 생각’에서 제작년에 1년 구독을 하면 ‘어린 왕자’를 구독자에게 덤으로 줬었는데 그 때 받은 책이다. 터키에서는 이 책이 금서(禁書)라던데 내용 중에 터키의 천문학자에 관한 부분에서 터키의 지도자를 독재자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별에서 만난 술꾼에게 왜 술을 마시냐고 물었는데 술꾼은 ‘부끄러워서’라고 말한다. 뭐가 부끄럽냐고 재차 물으니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인지 방귀인지. 이런 소소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좋다.어린 왕자가 여러 별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여우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기에 살았던 그들과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다음을 살아갈 이들을 ‘길들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 메모



2. -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가 어떻지? 그 친구가 좋아하는 놀이는 뭐니? 나비를 채집하지는 않니?”하는 건 결코 묻지 않는다.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지?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니?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나 되니?” 등을 묻는다. 어른들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만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8쪽

- 어느 별에서 만난 왕이
“맞느니라. 누구에게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요구해야 하는 법이니라. 권위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느니라. 만일 네가 너의 백성들에게 바다에 빠지라고 명령한다면 그들은 혁명을 일으킬 것이니라. 내가 복종을 요구할 권한을 갖는 것은 나의 명령들이 순전히 이치에 맞는 까닭이지.” 67쪽

: 맹자의 역성혁명론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제선왕이 나쁜 왕이라면 쫒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필부이며 필부를 쫒아낸다는 말을 들었을 뿐 왕을 쫒아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는 맹자의 사상은 급진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현대에 더 매력적인 이론인 것 같다.



“에헴! 에헴! 이 별 어딘가에 늙은 쥐 한 마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 밤마다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리느니라. 그 늙은 쥐를 심판하라. 그럴 만하면 사형에 처해도 좋다. 그러면 그 쥐의 목숨이 너의 심판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매번 특사를 내려 그 쥐를 아끼도록 하라. 쥐가 오직 한 마리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69쪽

83쪽
어린 왕자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 어른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꽃에게 날마다 물을 줘요. 화산도 세 개 가지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그을음을 털어 내고 청소를 해 주지요. 불이 꺼진 화산도 똑같이 청소해요.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것은 꽃과 화산들을 위한 일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유익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잖아요······.”

- 여우를 만나 118쪽
“아니, 나는 친구를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요즘에는 많이 잊혀져 있는 일이지만,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121쪽
“누군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조금 떨어져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로 쳐다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날마다 너는 조금씩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을 수 있을 거야······.”

126
“아까 말해 주겠다던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직 마음으로 볼 때만 모든 것이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3. 시간의 중력

132-133쪽
그는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알약을 파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 알씩만 먹으면 목이 마르지 않게 된다는 약이었다.
“왜 이런 것을 팔죠?”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이 약은 시간을 아주 많이 절약하게 해 주거든. 전문가들이 계산해 본 결과, 일주일에 53분씩이나 절약할 수 있다는구나.”
“그러면 그 53분으로 무얼 하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만약 나에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3분이 있다면,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텐데·····.” 어린 왕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 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현대인은 가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머무름과 사색을 상실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와 '성과사회'의 원인으로 '시간 중력의 부재'를 꼽는다. 지속성이 동반되지 않은 전진은 방향을 상실하고 떠도는 배와 같다. 뭐든지 빨리, 많이 이루어야 이 세상 보람있게 사는 것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고 머물러 시간의 중력을 느껴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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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탐방 20160109 토요일
#국립현대미술관 #윌리엄켄트리지




1. 아침 겸 점심을 느긋하게 먹고 안국역으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었다. 여유가 되면 가까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원숭이의 해’ 관련 특별 유물전도 보려고 했으나, 아마도 여유가 없겠지.



서울관 건물은 2014년에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과 같은 해 한국 건축가협회 선정 ‘올해의 건축상’을 수상한 건물이라는데,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과 현대식 미술관 건물의 공존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고, 차라리 경복궁 건물과 주변 경관과 조화롭게 전통 양식을 반영한 건물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2.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로 꽤 붐볐고, 통합 입장권(4,000원)을 내면 전시장 모두를 둘러볼 수 있었다. 우선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윌리엄 켄트리지(1955년생)의 작품을 감상했다. 작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출신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와 풍경을 그린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라고 한다.



작품전의 주제는 ‘주변적 고찰(Peripher Thinking)'이었다. ’주변적 고찰‘은 중심에서 개진되는 논리적 사고의 전개가 아니라, 한 주제에서 자유롭게 연상되거나 확장되어 나가는 사고의 흐름을 뜻한다. 예전에 신영복의 ’담론‘에서 처음 접했던 ’변방성‘이라는 개념이 생각났다. 변방성은 단순한 변방과는 달리 중심과 대립되는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유연한 특질을 내포한다. 덩치가 큰 중심은 변화에 둔감하지만 변방은 변화에 민감하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취지의 글이었는데, 열강에 둘러싸여 분단된 국가에서 변방이라고 자학할 것이 아니라 ’변방성‘을 발전 에너지로 변환하는 길이 무엇일까. 특히 눈길을 끈 작품은 ‘시간의 거부를 위한 드로잉(부정확한 시계들을 찬양하며)’라는 작품이었는데 한 인간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운명적 순간에 어떻게 저항하는지에 대해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 다음 6전시관으로 이동. 2015 한국-호주 국제교류전의 일환으로 개최된 ‘뉴 로맨스’였다. 윌리엄 깁슨이 1984년 발간한 소설 뉴 로맨서(Neuromancer)가 한국에서 ‘뉴 로맨스’로 오역된 상황에 착안하여 예술과 과학의 접목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작품이 있었는데 ‘페트리샤 피치니니’라는 호주작가의 ‘보텀 피더’다. 상어의 머리, 인간의 몸통, 개의 다리를 가지고 쓰레기를 먹고 사는 상상 속 생명체다. 엎드린 자세에서 뒤편의 엉덩이 부분을 보면 부처님을 닮은 얼굴이 웃고 있다. 유전자 조작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윤리적 문제를 환기시킨다.





4. 지하 1층의 중간쯤에는 율리어스 포프의 ‘비트, 폴, 펄스’라는 작품이 눈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이 작품 앞에 서서 물방울들이 떨어지면 만들어내는 실시간 검색어를 쳐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4개의 대형 컨테이너로 구성된 설치 작품의 각 컨테이너 속에는 수백 개의 물방울이 짧은 순간 단어를 쏟아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비트, 폴, 펄스’는 데이터의 최소 단위 정보 조각(bit)의 떨어짐(fall), 찰나에만 존재하는 데이터 정보의 일시성과 정보의 빠른 전파성이 활발한 맥(pulse)을 형성하는 과정을 뜻한다. 작동원리는 실시간으로 인터넷과 연결되어 작가가 고안한 알고리즘에 따라 인터넷 뉴스피드에 게재된 단어의 노출빈도수를 측정하고 중요도에 따라 ‘물 글씨’단어를 선택한다.






5. 이때 쯤 고민이 시작되었다. 입장권 값어치는 한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갈까, 마저 남은 한 전시관을 돌아봐야 하나.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장으로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 지성, 1980)의 시가 벽에 프린팅 되어 있다. 이 전시제목도 마종기의 시에서 따왔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의 빈자리를 드러내고,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사라져버린 것들의 이름을 불러내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다. 관객과의 상호작용과 협업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기억의 벽’에 나도 ‘수평’이라는 한 단어를 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었다. 수직이 수평을 갉아먹어 위태위태한 지금 여기에서 바다처럼 ‘수평’을 회복하는 삶이 그립다.





작가노트 중

“고립과 격리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공간의 중심적 특성이 된다. 입구의 금붕어들은 고립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멤돌고, 필경사의 방은 참가자를 위한 격리실, 예배실 또는 일종의 감옥이 되며, 64개의 방은 자발적인 고립과 실종을 위한 미로가 된다. 침묵의 방에 이르러 이러한 격리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끝없는 우주적 공허, 아무것도 없음, ‘지금 여기’가 없는 상태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일상공간으로부터의 단절, 타인들로부터의 격리, 홀로 남은 자의 고독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여정, 피할 수 없는 항해의 과정이다. 스님들의 묵언수행, 기도하는 사람들의 합장과 눈감기, 우리가 학교에서 보낸 그 긴 침묵의 시간들은 모두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6. 오설록에서 차 한 잔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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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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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한병철 #에로스의종말



1.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으로 강력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는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의 사랑에 관한 철학서다. 100쪽을 넘는 얇은 책인데 총 7개의 장(멜랑콜리아, 할 수 있을 수 없음, 벌거벗은 삶, 포르노, 환상, 에로스의 정치, 이론의 종말)에 담긴 에로스에 관한 묵직한 논증은 어렵지만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나 보다.




2. 핵심은 앞쪽 3개의 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타자’와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Nicht-Können-Können'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할 수 있음 자체의 불가능 상태를 의미하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체제의 바깥을 지시한다.

아직까지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알랭 바디우(‘사랑의 재발명)’의 서문을 보면 된다.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 6쪽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현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8쪽



: 우리는 끊임없이 ‘할 수 있음’을 추동 받는 사회를 살아간다. ‘넌 할 수 있어’는 곧 ‘넌 해야 돼’로 변질되고 우리는 ‘난 왜 안될까’라는 자책에 갇힌다. ‘타자’는 내가 꺾어야 할 경쟁 상대이며 나의 몫을 앗아갈 잠재성을 지닌 존재다. 이런 생각은 우리는 ‘동일자의 지옥’에 빠지게 하고 사랑의 본래적 의미를 변질시킨다.




3.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다. 56쪽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57쪽




: 사랑에 빠지면 내가 아닌 타자가 우선이다.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은 ‘둘의 무대’이며 각자가 타자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상호 망각의 순간에 빠지면 사랑은 깊어진다. 뼛속까지 아리는 절절한 사랑은 타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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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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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읽고


1. ‘말랑말랑’한 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초딩 입맛을 가진 분이라면 ‘말랑 카우’겠지. 현대사회는 점점 말랑말랑 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 딱딱하고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더해진다. 함민복의 시(詩)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가난’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의 편린이 그의 초기작에 많지만 최근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을 보면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문명에 대한 비판, 생태주의적 가치관, 일상의 소중함, 실존에 대한 고민이 두루 드러난다.



2.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 귀 향(전문) - 30쪽

낯설지 않던 도시를 떠돌다/ 낯선 고향에 돌아왔네// 이땅에 이쯤 살았다면/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 내 나이 수만큼은 흙 속에 묻어주었을 텐데// 문이 문을 여는 빌딩을 기웃거리고/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죽은 고기를 씹고/ 똥물 내리는 물소리나 들으며/ 풀 냄새라곤 담배 냄새나 맡다가//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사십이 다 되어 홀로 돌아와/ 살아온 길 잠시 벗어 보네/ 낯선 고향에서 쉬이 잠이 오지 않네

: 별 다른 해설이 필요없는 시다. ‘문이 문을 여는 빌딩’은 아마도 자동문을 있는 대형빌딩을 의미할 것이다. 문을 여는 행위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는 의미인데, 손으로 문을 연다는 것은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는 행위다. 수험생의 방에 문을 열 때는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화가 났을 때는 쾅! 연다. 그런데 ‘자동문’은 손이 아닌 ‘문이 문을 여는’ 문이다. 거기에는 감각이 거세된 규칙적이고 자동화된 행위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손을 잃었다.



3. - 백미러- 부분 34쪽

어깨 위에서 도끼날이 번쩍 햇살을 찍는다/찍힌 하늘 속으로 돼지 비명이/ 길게 빨려 들어간다// 그가 쓰러졌다/ 달려오던 트럭 백미러에 머리를 부딪쳐/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중환자실에서/ 백미러는 자꾸 도끼날이 되었다/ 이차 수술 결과가 좋아야 식물인간이 된다고 했다/ 식물이란 말이 가장 무섭게 들리던/ 진단을 깨고/ 그가 일주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중략)

혹// 죽였던 돼지를 만나/ 잡았던 개를 만나/ 밧줄을 풀고/ 함몰된 머리를 보듬고/ 멱 속으로 피를 다시 집어넣고/ 꿰매며/ 단지 생활난 탓이었다고/ 수십 석 볍씨를 논바닥에 토하고 온 것은 아닐까// 백미러처럼// 도축장으로 죽으러 가는 돼지 한 트럭

: ‘식물이란 말이 가장 무섭게’ 들린다는 감각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4. - 뿌리의 힘- 54쪽

서울서 면도하고 고향 와/ 턱 만지니 꺼끌꺼끌// 강철 면도날 수백 개/ 밀어 온 수염// 뿌리의 힘// 날려고 그림자 떼어버렸던 구름/ 낙향하는 눈보라// 앉아서 죽은 아버지와 같이 쓰러지던/ 흰 수염의 검은 그림자

: 1, 2연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 ‘뿌리의 힘’은 ‘강철 면도날 수백 개’를 밀어온 세월의 힘이다. 날려고 발버둥 쳤던 젊은 시절도 지나고 낙향하는 중년, 이미 중년을 겪어 하늘로 올라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하는 시다.


5. - 일식 - 56쪽 부분

햇살 아래서// 눈물을/ 한두 번 찍었을// 女人의 가녀린/ 반지 낀 손가락/ 끌어 입술에 대보고 싶은// 그래/ 그림자도 빛반지를 저리 껴 보는구나


6. - 감촉여행- 80쪽 부분

도시는 딱딱하다/점점 더 딱딱해진다/뜨거워진다



7. - 김포평야 - 부분 74쪽 부분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은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중략)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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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니체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 1
사이토 다카시 지음, 이정은 옮김 / 홍익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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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니체』,사이토 다카시, 를 읽고
#니체 #곁에두고읽는니체



1. 이 책은 니체 입문서라고 하기에는 가볍고 자기계발서라고 하기에는 무겁다. 몇 개의 장을 나누기는 했지만 장을 다 없애고 될 듯하다. 여러 권의 니체의 책들(중심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토막을 인용하고 저자의 경험과 생각들을 설시한다. 곁에 두고 두고 읽기보다 통독으로 한 번 읽을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독성이 좋아서 맘먹으면 3시간이면 읽을 수 있겠다.


2.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머리(이성)가 아닌 육신(몸)의 의미, 어린 아이와 같은 창조성에 대한 갈망, '독서하는 게으름벵이(읽기만 하고 외우지 않는 사람)'가 되지말고 좋은 글은 암송하는 것도 좋다는 조언 등은 이 책을 통해 걷어 올린 싱싱한 물고기다.


*** 메모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함과 망각 그 자체다. 아이들은 또한 새로운 시작과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거룩한 긍정의 존재다. 춤은 천진난만함 그 자체로, 이는 춤이 몸 이전의 몸이기 때문이다. 춤은 망각으로, 이는 춤이 몸 자체의 무게를 잊게 하기 때문이다. 춤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것은 춤을 추는 동작이 스스로의 시작을 새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데미안 중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건 우리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것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속에 없는 것들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42쪽




-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인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무서움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을 견디면서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 부분에서 니체는 내세에서의 행복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불씨를 최대한 지피며 살라고 말한다. 99
영겁회귀,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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