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많을수록 좋다
김중미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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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많을수록 좋다, 김중미, 창비, 2016
#김중미 #꽃은많을수록좋다

1. 구독하는 창비에서 수요일에 문자가 왔다. 3월 25일 금요일 저녁 7시 망원역 1번 출구 근처의 창비서교빌딩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회신을 부탁했다.



"참석가능, 2명(꼭 참석하고 싶어요!!)."

그날 퇴근 무렵 신청 확인 문자를 받았다. 연미에게 급히 그날 참석 가능한지 물었다. 통보에 가까운 부탁을 들어 주었다. 회사통근 버스를 타고 주안역에 내려 다시 1호선, 2호선, 6호선. 만남 장소에 도착하니 딱 7시 30분이다.
눈대중으로 50여명 정도 모였고, 아동 문학평론가 한 분과 김중미 작가가 나란히 앉았다. 작가의 첫 인상은 강단 있어 보이는 아줌마였다. 눈이 약간 처진 푸근한 인상이지만 '공부방' 얘기를 할 때는 눈에서 빛이 났다. 마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 얘기할 때처럼 때론 애틋하고, 때론 자랑스럽게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2. '꽃은 많을수록 좋다'

이 책 제목은 한 아이의 그림에 씌여진 글에서 따왔다. 작가가 직접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셨다. 보통 아이들은 꽃그림을 그리면 화분 하나에 꽃 두어송이를 그렸는데, 한 아이는 화분에 예닐곱 송이 꽃을 그렸다.

"왜 화분에 여러 송이 꽃을 그렸어?"
"꽃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꽃은 많을수록 좋다' 그 옆에 또 글이 씌여져 있다. '아직 안자란 꽃도 있다'

"아직 안보이는 꽃도 있어요. 그게 나예요."

아름답고 예쁜 꽃, 꽃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어느 글에서 한 송이 장미보다 수많은 꽃이 모인 안개꽃이 더욱 좋다는 글을 읽었다. 또 서양에서 전래된 크리스마스 트리는 항상 한 그루지만 절에 메달린 연등은 하나가 아니라 반드시 여러 개가 줄지어 메달려 있다는 글도 보았다. 이 책은 '모둠', '공부방', '공동체'에 관한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다. 30여년을 인천 만석동과 강화에서 '공부방' 네트워크를 만들어 온 역사가 녹아있다. '공부방'이지만 '공부보다는 공부아닌 것'들을 더 많이 가르치는 곳이다.





3. 책을 읽다가 울컥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작가의 딸이 학업에 집중해야할 시기인데 자기 집 안의 공부방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고 작가와 트러블이 일어났을 때 공부방 출신 삼촌들의 삶을 담으려고 방문한 이후였다.

- 승우네 미용실과 영수네 수리점을 다녀온 뒤, 큰딸이 말했다.
“엄마, 나 이제야 엄마랑 이모 삼촌들이 왜 지금까지 공부방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오늘 승우 삼촌이랑 영수 삼촌 보면서 삼촌들한테 공부방이 어떤 곳인지 알았어. 그리고 나한테도 공부방이 삼촌들만큼 소중한 곳이라는 것도 알았어.”
딸은 그 뒤 마음이 누그러졌고 여유도 생겼다. 그 힘으로 고3 시기를 견뎌 냈다. 이듬해 봄, 남편은 승우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이 주례사를 시작했다.
“저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승우의 공부방 큰삼촌입니다······.” 58쪽

'공동체, 공부방' 식구들은 실명이고, 아이들은 가명이다. 작가의 자녀들 이름은 실명으로 썼다고 작가님이 말씀해 주셨다. 책을 읽다보면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 부분이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모두가 가난해질 때까지 나누는 것이고,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은 몇 사람만이 누리는 풍요이기 때문이다. 108쪽
- 나는 후배들이 공부방 아이들 때문에, 혹은 공부방 아이들을 위해서 자발적인 가는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발적인 가난과 공동체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이어야만 한다. 120쪽





4. 이 짧은 글에 30여년의 공동체 생활에 대한 감상과 그 날의 작가와의 만남을 다 담을 수 없어 아쉽다. 꽃이 많을수록, 책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믿고 싶다.

- 그해 가을이었다. 오랜만에 공부방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고 동일방직 앞부터 인천역까지 걸으며 은행잎을 주웠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공부방 벽에 갈색 도화지를 이어 붙여 커다란 은행나무 기둥을 만들고 노란 은행잎을 붙였다. 때마침 창밖으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자리가 만든 은행나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가람이가 말했다.
“이모, 밖에 겨울이 와도 우리 공부방은 내내 가을이다요.” 17쪽

- 공부방을 하면서 늘 부딪친 벽은 ‘공부방 이모’로 내세울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21쪽
내가 공부방을 시작한 이유, 그리고 30년이 지나도 계속하는 이유는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선한 사람들이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4쪽

- “이모, 난영이가 욕했어요.”
“희준아, 이르지 말고 네가 욕하면 안 된다고 말해 줘야지.”
“아, 그렇지! 내가 말해 줄게요.”
망설이지도 않고 돌아 나가는 아이를 재양 이모가 불러 세웠다.
“근데 희준아, 난영이가 누구한테 욕했어?”
“포도나무한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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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한창민 지음 / 오픈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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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한창민, 오픈하우스,
#나는찍는다스마트폰으로


1. 나는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없다. 이를 알기에 그리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림보는 일은 좋아한다. 마치 축구매니아가 운동장에서 축구는 하지 않지만 쇼파에 누워서 과자를 씹으며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희망을 찾았다. 사진이다. 내가 직접 그리지 않아도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그린다. 무엇을, 어떻게, 왜 찍을지만 정하고 셔터를 누르면 된다. 비싼 카메라도 필요없다. 현대인의 필수품 '뽄카' 덕분이다. 이 책의 저자도 오직 아이폰 카메라만으로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고 사진전까지 열었다.

"그럼 나도 사진 좀 찍을 수 있겠는데?"


'뽄카'로 충분하다. 적어도 장비는. 책장을 넘기면서 사진에 감탄하고, 저자가 찍었을 수만 장의 보이지 않는 사진의 그림자가 짙었다.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확실히 없다. 그렇지만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용기를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값어치가 있다.


- 메모


돌아보기 혹은 들여다보기. 책에 담아야 할 내용을 요약하면 이 한마디다. 아무 생각 없이 찍었다고 했지만 분명히 무슨 생각인가를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사진들을 찍었을까를 돌아보는 것. 기왕 찍는 거, 좀 더 잘 찍으려 했었고 남들과 조금 다르게 찍으려 했었다. 그때 저렇게 찍지 않고 이렇게 찍은 이유는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 지난 1년 동안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피사체를 겨누고 외부를 향했던 렌즈를 내 쪽으로, 내 안으로 돌려 한 컷씩 찍어내는 것. 카메라가 아닌 자판으로 촬영한 내 생각, 그 결과물을 낱낱이 기억해내고, 기록하고, 전시하는 것이 이 책이 될 것이었다.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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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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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여행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 달, 

#이병률




1. 이병률 시인이나 김소연 시인의  시집보다 여행산문집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다. 산문집을 읽고 글쓴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그의 글을 찾아 읽게 되는 과정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참 닮았다. 나는 작년에 헌 책방에서 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사서 읽고, '담론'을 읽고, 선생님의 저작들을 거의 다 읽고, 팟캐스트를 찾아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2. 이 책의 내용보다 책의 질감이 좋았다. 빤딱빤딱한 재질의 종이가 아닌 문고본 재질에 가까운 종이에 파스텔 톤의 그림(실은 사진).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손에 잡히거나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희안한 매력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이 책 편집자 대단하구나, 생각했다.

 이 책은 페이지가 없다. 여행하며 바로 그 때 만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와 상념들이 담겨 있다. '시간의 몽타주'처럼 그때를 기억하고 망각하며 하나씩 찍어낸 도트(dot)의 집합이다.




3. 이병률 시인은 미혼으로 알고 있다. 글을 읽으면 적어도 사랑에 관해서는 해피앤딩이 거의 없다. 본인은 물론, 그가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사랑에 실패하고 사랑이 엇갈린다. '사람'의 받침이 닳고 닳아 '사랑'으로 변하기를 꿈꾸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사탕'이 되고, '사탄'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1)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고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안마사가 되었는데, 뒤늦게 안마 받는 도중 뛰어나간 한 손님을 떠올린 이야기

2) 부산의 모 대학교 사인회에서 우연히 두 학생과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몇 개월전 헤어진 커플 이야기



MSG를 듬뿍 뿌린 가공된 소설같은 이야기, 소설은 있음직한 허구이고 현실은 때론 엉성한 소설같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지만 슬픈 사랑이야기를 읽어 나가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챙기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바로 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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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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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시공사,

 

1.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진리는 절대적인 무엇이라고, 누군가는 진리는 고정적인 것이 아닌 가변적이라고, 누군가는 진리는 없다라고 한다. 

 자문한다. 그렇다면 철학을 왜 알아야 하는가, 진리를 왜 알고 싶은가.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철학을 뿌리로 뻗어간 학문과 관련된 종사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일반인이다. 비철학자다. 철학이 뭔지 한 번 알아볼까, 문득 이런 질문으로부터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더더욱 아니다. 거꾸로 나는 소설과 시와 평론을 읽다가 자주 언급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하이데거,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관념과 말들이 돌부리처럼 느껴졌다. 


'술술 잘 읽어나가고 싶은데, 왜 자꾸 내 발을 붙잡는 걸까?'


열 받은 상태에서 서점을 들렀다. 철학 코너에서 가장 대중적인 철학서를 고르기로 마음 먹었다. 무슨 무슨 콘서트, 누구의 서재 하는 종류의 책들은 많았고, 예전에 함돈균의 '사물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각주에서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라는 책을 본 기억이 났다. 순전히 저자 이름 하나 믿고 이 책을 골랐다.


철학을 처음 접하는 나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고대 철학자부터 마르크스, 니체까지 개괄적으로 10여 페이지를 한 챕터로 구성했다. 쉽게 쓰려고 노력한 점이 보이지만 그래도 잘 와닿지는 않는다. 그래도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좋은 책이다. 특히 옮긴이가 챕터 마지막 장에 해당 철학자에 대한 단계별 추천 저작을 소개해주고 간단히 해당 챕터를 요약해주어서 좋았다.



2. 지금 읽고 있는 논어, 장자와 서양 철학을 비교해 보면 새로운 지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장자의 사상과 니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염두를 두고 심화학습을 해야겠다. 





- 메모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 그림 속의 플라톤은 오른 손을 뒤로 든 채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팔은 거의 수평으로 뻗어 있고 다섯 손가락을 쫙 편 채 손바닥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출발점이다. 41쪽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

: 책의 키워드는 비르투virtù , 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행동 속에서 증명되는 효율성을 의미한다. 104쪽

우연적 측면을 마키아벨리는 fortuna, 운명,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의미한다. 105쪽

 

-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도 레이몽 스봉의 변호

 

몽테뉴에 있어 이 무심함은 성격의 표현이기 보다는 그의 철학과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확실성을 경계하고,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자신의 필멸성을 인식하면서도 즐거움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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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의 시 218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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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1. 부천에 최근에 생긴 송내도서관에서 '일요일'에 '나쁜 날씨'를 피해 쇼파에 앉아 대부분을 읽었다. 이 시집을 거칠게 요약하면 "멀리서 온 자두나무 같은 야만인이 일요일(시간)과 나쁜 날씨를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메시지가 가장 집약된 시 한편을 보자.


- 야만인들의 여행법 1 92쪽 전문


우리는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울하지 않고/ 다만 거칠고 성마른 상태일 뿐이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리 트렁크에는 비밀과 망각이 없다./ 우리는 당신들이 흔히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다.// 우리는 멀리서 온다./ 그것은 과거로의 이동,/ 순결한 타락이다./ 우리가 멀리서 온 것은 죽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별이 밤하늘을 선택하지 않았듯/ 우리가 이 도시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불꽃이 석탄에서 오고/ 벌레들이 축축한 낙엽 밑에서 기어 나오고/ 야만인들은 검푸른 숲에서 온다./ 먼 검푸른 숲에서 와서 잠시 머물고/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천 년 된 자두나무들이여, 가지에 열린/ 저 망각의 풍요한 열매들을/ 바람이 불 때 모조리 땅으로 떨궈라./ 대지에 대한 너희의 순정을,/ 중력의 법칙에 숨긴 저 무서운 정치들을 증언하라.


: 야만인은 반드시 문명과 상반되지 않는다. 야만인은 누군가에 의해 명명된 '타자'이자 문명인이 가진 또다른 '자아'다. "멀리서"와서 "과거로의 이동"을 통해 "순결한 타락"을 행한다. 곧 인간의 심연에 내재된 본연이다. 시인은 '순결의 타락'이라 하지 않고 '순결한 타락'이라 했다. 야만은 거칠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망설이고 연약하고 자연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멀리서 온,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을 붙들고 머무르게 해야 한다.





3. "자두나무, 고집 센 뿔로 허공을 들이받는 흑염소, 독 없는 뱀, 부리와 괄약근만으로도 충분한 종달새, 머리숱 없는 아버지의 백회와 정수리" 이런 표현들은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물론 시 한편이, 글 하나가 미생을 완생으로 변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내 안의 야만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




- 미생(未生) 48쪽-49쪽 전문

한자리에 서서/ 양팔을 벌려 허공을 안은 자두나무,/ 떠나면서 떠나지 않고/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는 것,/ 행려(行旅)라면, 저 핏줄 속에 우뚝한/ 자두나무는 표표하다 하겠네.// 운명 따위는 믿지도 않았지./ 11월이 와서 시든 풀밭에는/ 고라니나 족제비 따위가 배설물을 흘려 놓았네.// 혼자 이과두주 마시는 밤에 첫눈이 오고/ 눈꺼풀이 없는 자두나무여,/ 쓸쓸함 따위 개에게 던져 주어라!/ 밤의 하중을 견디고 서 있는 자두나무/ 너의 뿌리들은 식는가?/ 돌 속에 갇힌 그림자는 돌 속에서 우는가?// 고집 센 뿔로 허공을 들이받는 흑염소,/ 독 없는 뱀,/ 부리와 괄약근만으로도 충분한 종달새,/ 머리숱 없는 아버지의 백회와 정수리,/ 왜 이 모든 것들은 한통속인가?// 실패의 쓰라림 따위는 모르는/ 어린 것들과 그 어린 것들의 젊은 어버이들,/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밤눈과 자두나무들,/ 이 모든 것들은 왜 아직도 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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