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의 시 218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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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1. 부천에 최근에 생긴 송내도서관에서 '일요일'에 '나쁜 날씨'를 피해 쇼파에 앉아 대부분을 읽었다. 이 시집을 거칠게 요약하면 "멀리서 온 자두나무 같은 야만인이 일요일(시간)과 나쁜 날씨를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메시지가 가장 집약된 시 한편을 보자.


- 야만인들의 여행법 1 92쪽 전문


우리는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울하지 않고/ 다만 거칠고 성마른 상태일 뿐이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리 트렁크에는 비밀과 망각이 없다./ 우리는 당신들이 흔히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다.// 우리는 멀리서 온다./ 그것은 과거로의 이동,/ 순결한 타락이다./ 우리가 멀리서 온 것은 죽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별이 밤하늘을 선택하지 않았듯/ 우리가 이 도시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불꽃이 석탄에서 오고/ 벌레들이 축축한 낙엽 밑에서 기어 나오고/ 야만인들은 검푸른 숲에서 온다./ 먼 검푸른 숲에서 와서 잠시 머물고/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천 년 된 자두나무들이여, 가지에 열린/ 저 망각의 풍요한 열매들을/ 바람이 불 때 모조리 땅으로 떨궈라./ 대지에 대한 너희의 순정을,/ 중력의 법칙에 숨긴 저 무서운 정치들을 증언하라.


: 야만인은 반드시 문명과 상반되지 않는다. 야만인은 누군가에 의해 명명된 '타자'이자 문명인이 가진 또다른 '자아'다. "멀리서"와서 "과거로의 이동"을 통해 "순결한 타락"을 행한다. 곧 인간의 심연에 내재된 본연이다. 시인은 '순결의 타락'이라 하지 않고 '순결한 타락'이라 했다. 야만은 거칠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망설이고 연약하고 자연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멀리서 온,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을 붙들고 머무르게 해야 한다.





3. "자두나무, 고집 센 뿔로 허공을 들이받는 흑염소, 독 없는 뱀, 부리와 괄약근만으로도 충분한 종달새, 머리숱 없는 아버지의 백회와 정수리" 이런 표현들은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물론 시 한편이, 글 하나가 미생을 완생으로 변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내 안의 야만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




- 미생(未生) 48쪽-49쪽 전문

한자리에 서서/ 양팔을 벌려 허공을 안은 자두나무,/ 떠나면서 떠나지 않고/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는 것,/ 행려(行旅)라면, 저 핏줄 속에 우뚝한/ 자두나무는 표표하다 하겠네.// 운명 따위는 믿지도 않았지./ 11월이 와서 시든 풀밭에는/ 고라니나 족제비 따위가 배설물을 흘려 놓았네.// 혼자 이과두주 마시는 밤에 첫눈이 오고/ 눈꺼풀이 없는 자두나무여,/ 쓸쓸함 따위 개에게 던져 주어라!/ 밤의 하중을 견디고 서 있는 자두나무/ 너의 뿌리들은 식는가?/ 돌 속에 갇힌 그림자는 돌 속에서 우는가?// 고집 센 뿔로 허공을 들이받는 흑염소,/ 독 없는 뱀,/ 부리와 괄약근만으로도 충분한 종달새,/ 머리숱 없는 아버지의 백회와 정수리,/ 왜 이 모든 것들은 한통속인가?// 실패의 쓰라림 따위는 모르는/ 어린 것들과 그 어린 것들의 젊은 어버이들,/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밤눈과 자두나무들,/ 이 모든 것들은 왜 아직도 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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