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가방 -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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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다 읽고 이 글을 쓰지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본 전시 중에 저자인 조각가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었던 것이다. '사물'에 대한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도서관에서 눈에 띄여 빌린 책인데 저자가 내가 본 전시회를 연 작가라니. 아무렇지 않은 일 같지만 이런 우연이 반갑다.



말이 나온 김에, 아래 첨부한 사진은 안규철의 '아홉 마리 금붕어'라는 작품이다. 9개의 동심원 안에 물이 채워져 있고 각 원에 하나씩 금붕어가 있다. 9개의 원은 커다란 하나의 원을 구성하고 있지만 금붕어들은 고립된 구획에서 살 뿐 서로를 만날 수 없다. 각자의 집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지 않았을까.




2. 이 책은 조각가이자, 한예종 미술원 교수로 있는 안규철 작가가 쓴 책이다.
저자 스스로 철학자의 성찰보다 가볍고 시인의 언어보다 얕은 말들로 사물에 대한 생각을 적어나간 책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곳곳에 자신의 작품을 싣고 그것이 탄생한 배경을 사물을 통해 철학적으로 때로는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솜씨는 왠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해내기 힘든 일이다.
전반부에 머리, 손, 발 등 몸에 관한 성찰에서 후반에는 의자, 가방 등으로 소재를 넓혀 간다.





- 손은 몸통에서 나란히 뻗어나온 두 줄기 길다란 가지로부터 펼쳐진 평평한 손바닥과, 다시 거기서 뻗어나온 다섯 가닥씩의 가느다란 잔가지로 이루어진다. 그 뿌리인 팔 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것은 여러 쌍의 대립항들의 복합체이다. 손에 대한 관찰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공간 안에 서로 등을 맞대고 겹겹이 포개져 있는 바로 그 대립항들에 대한 관찰이나 마찬가지다. 왼손과 오른손, 손바닥과 손등, 안과 밖, 공격하는 주먹과 쓰다듬는 손바닥, 감싸고 사랑하며 만들어내는 손바닥과 물리치고 거부하며 파괴하는 손바닥, 빼앗고 놓지 않는 손과 베풀고 나누어주는 손, 통합과 분산, 단단함과 부드러움, 열림과 닫힘······. 37쪽





- “나는 어차피 무릎으로 생각한다.” 현대 독일미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젭 보이스가 한 말이다. 60쪽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존재양식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릎 없이 생각하며, 생각하지 않고도 본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과거에 그것은 최면술과 마법, 환각의 세계였다. 64쪽





3. 작가는 자신의 작품 옆에 글을 써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술품(그림, 설치미술)에 텍스트를 얹는 행위에 대해 미술계 사람들로부터 미술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라며 비난을 받기도 한단다.
글자와 이미지(그림)의 전쟁은 오래된 문제지만 최근에는 티브이, 영화 등 시각매체의 발달로 전쟁의 양상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전엔 이른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예술 계통에서 소설가나 시인처럼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영화,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많이 몰리는 느낌이 든다. 글자를 다루는 문학은 역사적으로 소수자들의 분야였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려 이미지를 다루는 영역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두 매체의 전쟁 속에서 새우등 터지지 않고 둘을 잘 달래서 한 우리 안에서 길들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다.



- 근래에 영상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림(이미지)이 다시 급속도로 그 힘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화면에는 문자를 대신한 수십 개의 그림기호들이 늘어서 있다. 순전히 문자기호로만 이루어져 있던 명령어들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림기호로 바뀌었다. 표음문자가 다시 상형문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77쪽

- 우리가 뉴스에 중독이 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개탄하고 공감하고 안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남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뉴스 중독의 밑바닥에는 사디즘이 깔려 있다. 199쪽




4. 시적인 산문과 미술품을 한 책에서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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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46
임선희 지음, 최복기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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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주니어김영사
#존재와시간 #하이데거



1. 만화가 아니었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을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출간 당시 독일인들이 '존재와 시간'의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냐고 농담을 했을 정도라니까 학문적 난해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만화니까 만만하게 마음 먹고 일단 읽어 나갔다. '하이데거'느님이 만드신 철학용어로 가득찬 욕조에 살짝 발만 담그고 반신욕 한다는 기분으로 출발.





2. 우선 시 하나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단천 마을 - 전문,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110쪽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적벽을 마주한 이 마을에는 개를 전혀 키우지 않는다는데 그 까닭으로는 우선 개를 가져다 놓으면 어쩌다 한번 짖은 자기 목소리가 적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에 놀라 더 큰 소리로 짖고 그러면 그 소리는 더 큰 소리로 돌아와 결국 개는 밤새워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가 지쳐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죽어 나자빠지기 때문이라는데 사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당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면 죽은 개들이 웃을지도 모를 일인 것은 섣달이면 숫제 강이 쩡쩡 얼어 몸 트는 소리가 밤새 쩌엉쩌엉 울려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잔다는 말씀.


: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모항은 '개는 밤새워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가 지쳐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죽어 나자빠지'는데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잔다'라는 부분이다. '자기 목소리'는 존재가 말하는 내면의 소리, 양심이다. 실존적인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 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 지쳐 죽어 나자빠진 개와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3. '타자'는 내가 아닌 너와 그들이 아니다. '타인'은 타인은 자신을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 가리킨다.(152쪽). 나를 포함한 그들이 함께 거기(Da)에 있음이 타인들의 존재방식이다. '세계-내-존재'로 현존재(인간)와 존재적 사실(벌,꽃,책상 같은 여러 사물)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며 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관계망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실존'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세속적인 욕망의 틀에 같혀 있지 말고 내가 선택하고 판단해서 온전히 자기결정권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상기한 것만으로도 만화 '존재와 시간'은 '존재의미'가 있다.







4.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과거), 마주하면서(현재), 다가감(미래)이다.'(218쪽)
: 자신의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를 계획하면서 그 가능성 아래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향하는 존재로서 주어진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삶'을 산다면 적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겠지. 공포와 불안은 다르니까.






너무 심각한 얘기만 한 것 같다.

책장사는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하이데거의 사상에 접근하게 해 준 책이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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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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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요 선생님, 남호섭 동시집, 창비,
#놀아요선생님 #남호섭 #간디학교





1. 저자는 지리산 자락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일하는 현직교사다. ‘간디학교’ 연작시를 비롯해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하는 빨간 홍시 같은 동시한편 따다 먹었다.




- 만우절(간디학교 1) 14쪽, 전문


오늘은 쉽니다


교무실 문에 이렇게 써 붙여 놓고/선생님들 다 도망갔다./남의 교실에 들어가 시치미 떼기,/선생님 앞에서 싸우다가/의자 집어 던지고 나가기,/우리가 음모 꾸미는 사이에// 한발 앞서/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 기숙사(간디학교 9) 27쪽, 전문

백혈병 치료 중인 아이가/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여럿이 가슴 아파하며 울더니// 문득, 청란이 머리를 깎았다./ 안 그래도 작고 귀여운 청란이/ 동자승처럼 더 맑아졌다.// 다음날 친구들하고 목욕탕 가서/ 목욕하고 나와 옷 입기 전/ 할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청란이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기숙‘사’에서 왔습니다.




- 봄비 그친 뒤 51쪽, 전문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 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2. 동시라고 절대 쉽게 보면 안된다. 가장 쓰기 힘든 글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는 글이다. 글쓴이가 어른아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작가를 존경한다.





- 똥 86쪽, 전문

풀 뜯는 소가 똥 눈다.//긴 꼬리 쳐들고/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꼿꼿이 서서 푸짐하게 똥 눈다.//먹으면서 똥 눈다.

: ‘소가’를 ‘사람이’로 바꾸어 보면 다른 느낌이 든다. ‘먹으면서 똥 누는’ 인간, 생존을 위해 음식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소화시킬 새도 없이, 똥 누고 또 먹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애도하며.






- 눈사람 93쪽 전문

학교 운동장에/ 눈사람이 서 있습니다.// 실컷 놀다 돌아간 아이들 발자국.// 눈사람이/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 눈사람도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교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 머리카락 변변이 없는 머리에 솜털모자라도 얹어주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과 손에 장갑이라도 껴 주면 좋지 않았을까.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의 손에 손난로 하나 쥐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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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6
기혁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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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민음사, 2014
#기혁 #모스크바예술극장의기립박수

1. 제1부 파주의 표제작 파주(坡州) 15쪽
-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택배 상자 속 대기가 궁금해진다//노을이 질 때마다/구름의 살결을 보면서 날씨를 매만지던 시절이/책의 사위에도 일렁이는 것이다//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다던 아버지,/대기가 없는 달의 중력을 가정하며 나보다 꼭 6분의 1만큼 가벼운 생애를 살았던//내 외로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어둠이다/근본 없는 혁명은 내내 과거의 혈육을 찾아가는 것,// ...... 타인의 우주를 받아 든 사람들은 사막을 표류하는 비행사를 떠올립니다 더러는 지구에 없는 암시(暗示)를 읽기도 했지만 직육면체의 밤하늘에 공전을 계속할 에움길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지리학자의 별을 지나 도착한 일곱 번째 행성에서 어둠은 그저 낮의 그늘일 뿐이었고 그런 나의 자괴를 사랑이라고 다독거리던 옛 애인은 어린 왕자를 모던 보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요 주변을 더듬어 자신의 어둠을 울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교양이라면 한평생 우주를 곁에 두었던 엄마의 교양은 인공위성이 틀림없습니다
(중략)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




당신이라는 낮달은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얇은 파본이었을지 모릅니다 조심조심 이불 속에 웅크려 택배 상자를 개봉하면 비좁은 우주를 품은 천막(天幕)이 고갯길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고갯길이 많은 동네를 파주라고 부르던 슬하가 슬퍼지는 것은 옆자리의 어둠으로 밤낮을 구분해 온 당신의 일생 어딘가 파주의 풀을 뜯던 양들이 자욱하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에게나 펼치치 못한 페이지가 있고 제목으로 알 수 없는 독서가 있습니다 문맹의 꽃들에게 붙여진 꽃말은 자궁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지구의 첫울음을 닮았습니다





: 우선 제목을 보자. ‘파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파주 아울렛’과 ‘파주 출판도시’다. 1연과 2연에서 택배 상자에 놓인 책과 상자 속 대기는 친숙한 연상이다.
이 시(詩)의 제목 밑에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바치는 시라고 적혀 있다. 생택쥐페리가 독일 나치의 프랑스 점령 이후에 미국으로 망명해 프랑스있는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 ‘어린 왕자’다. 제목과 부제에서 어린 왕자와 책이라는 힌트 카드를 들고 시를 읽어나간다.



3연,4연에서 “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던 아버지”를 “어둠”이라고 밝히는데 어둠은 우주를 상징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상자 속 대기에서 어둠을 떠올리고 어둠을 우주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후 어린왕자의 내용에서 모티브를 딴 서술, 소설 ‘어린 왕자’에서 왕자는 나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보채고 나는 사양하다가 상자를 그린 후에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라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 원했던 것은 상자 안, 당신 내면의 우주에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어디까지나 이 시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








2. 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이 시집의 표제작인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다. 42쪽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화이트 러시안의 표정을 지으며/허공에 허파를 만들고/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그 나라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의사는 처방전 대신/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하늘을 나는데/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그것을 적분해/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떠돌이 악공의 견가가 끝나 갈 무렵/+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는 나무의 본래 구실을 하지 못한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은 러시아가 1980년대 후반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며 서방세계에 문을 열기는 했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여전히 독재자로 평가받는 푸틴의 수하에 있다. 고질적인 병의 명칭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 뿌리가 허공을 향한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과 희망의 발견을 위해 애쓴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는 왼손과 오른손이 포개지는 기도다.






2편의 시만 소개했지만, 기혁의 시는 어렵다. 몇 번을 읽어도, 뒤쪽의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어도 선뜻 이해가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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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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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3
#시간의향기 #한병철 #사색



1. 철학자 한병철의 가장 유명한 책은 '피로사회(2010)'다.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의 전작으로 후근대사회가 야기한 문제들을 시간적 차원에서 고찰한 저작이다. 제목과 부제를 통해 책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속화의 원인은 사물을 지배,조종하는 근대적 세계관에 기인한 것이고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향기'와 '시간적 중력'을 회복해야 한다. 머무름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색적 삶,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2. 저자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겠지만 기존에 가졌던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들이 흥미로웠다. '느리게 살기'가 유행인데 한병철은 '느리게 사는 것'은 가속화에서 파생된 현상이지 대안은 될 수 없다고 한다.



-- 한병철에 따르면 이러한 사색적 삶은 이른바 느리게 살기와는 다르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직면한 시간문제의 원인을 근대 이래 다양한 층위에서 진행되어온 삶의 가속화 과정으로 환원하는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가속화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결국 속도를 포기하는 느리게 살기에서 삶의 대안을 찾게 된다. .... 가속화라는 현상은 세계를 인간 의지에 따라 조작하고 지배하는 활동적 삶을 인간 존재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보는 세계관의 파생적 결과일 뿐이다. 11쪽



이른바 느리게 살기 전략으로는 이러한 시간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전략은 심지어 본질적인 문제를 은폐하기까지 한다. 17쪽


: 느리게 살기 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리게 사는 것도 어쨌든 활동적 삶이라는 홍수에서 조금씩 떠밀려가다가 결국 익사하는 결론이 예정된 삶이기 때문이다. 활동적 삶에 대항하는 '적극적 사색'와 '일단 멈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 친구나 직장동료들끼리의 대화에서 "엊그제 만난 것 같은데 벌써 몇 년이 흘렀다"는 말을 곧잘 한다. 하루하루는 그리도 시간이 안가는데, 왜 몇 년은 후딱 갈까? 직장인처럼 규칙적인 업무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특히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계화, 자동화는 진진되고 여가 시간은 많아진 것 같은데 왜 피곤함은 더해갈까? 왜 점점 삶이 팍팍하고 힘들게 느껴질까? 이 책에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물의 생산과 소비는 노동의 주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서, 사물 곁에 사색적으로 머무르는 태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의 사회야말로 완전히 노동의 주체가 되어 버린 인간이 저 자유로운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감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점점 증가하는 생산성은 점점 더 많은 여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여가 시간은 더 고차적 활동을 위해서도 쓰이지 않고, 한가로움을 위해서도 쓰이지 않는다. 그 시간은 일에서의 회복이나 소비에 사용될 뿐이다. 일하는 동물은 쉬는 시간만 알 뿐, 사색적 인식에 대해서는 무지하다."160-161쪽


: 운동선수가 30대 중반에 은퇴식을 한 뒤 다음날 깨면 허무함을 느낀다. 매일 가던 직장인 운동장에는 더이상 선수로 갈 수 없다. 여가 시간이 무한정 생겼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 그동안의 활동적 삶이 자아를 갉아 먹은 것이다. 영리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뜻있게 쓰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은퇴자는 자영업을 하거나 진로를 정하지 못해 시간과 돈을 까먹는다. 사색적 삶의 훈련을 평소에 하지 않은 탓은 아닐까.



4.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멈추고, 사색하고, 머물러야'한다.



후기의 하이데거는 행위의 강조를 철회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옹호한다. 그것의 이름은 “느긋함(Gelassenheit)"이다. 느긋함은 결연한 행동에 맞서는 ”맞쉼(Gegenruhe)"으로서,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머뭇거림” “수줍음” “자제” 등도 행위의 강조와 맞서는 표현들이다. ...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이면이다.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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