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책이 주는 여운 때문에 책장을 덮고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책들이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수레바퀴 아래서』가 그랬습니다다. 한스의 마지막이 어찌나 씁쓸하던지, 그렇게 쉽게 떨쳐버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캐릭터이기도 한 '한스 기벤라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아이(8쪽)였습니다. 얼마나 기품 있고 남다른지, 심지어 사람들이 "지난 8, 9백 년 동안 유능한 시민들은 많이 배출했지만 천재나 재능 있는 인물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오래된 작은 마을에 정말이지 저 위에서 신비로운 불꽃 하나가 뚝 떨어진 셈"(9쪽)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스가 태어난 "슈바벤 지방에서 재능 있는 소년들에게는 부모가 부유하지 않으면 단 하나의 좁을 길"(10쪽)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주(州)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그후 튀빙겐 대학에 들어간 다음 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10쪽)이었습니다.
   한스는 경쟁이 치열한 주 시험을 통과해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래서 라틴어 학교에서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가 바라는 '영예'를 누릴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니까요.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모든 즐거움보다 훨씬 귀중한 시간을 맛보기도 했다. 자부심과 도취감, 승리감이 넘치는 꿈같은 묘한 시간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학교와 시험과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더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고 그리워했다. 20쪽

   다행히 한스는 주 시험에도 2등으로 붙어 원하던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불안함 때문에 신학교 입학 전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선행학습을 합니다. 덕분에 한스는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노력형 모범생이라는 좋은 평판도 얻게 됩니다.

   신학교에서는 동급생 9명이 같은 방을 사용하며 생활했는데, 그 중 시인을 꿈꾸는 헤르만 하일너와 친하게 지냅니다. 그는 한스와는 반대로 천재형이었고, 생각과 행동이 모두 자유분방하고 활달했습니다. 특히, 그는 신학교의 획일적이고 이론만 반복하는 교육방식을 못 견뎌 합니다.

   "수업시간에 겨우 두 줄을 읽고 한 자 한 자 되새기고 구역질이 날 때까지 자세히 살펴보지. 하지만 마지막에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니까. '이 시인이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보았지요. 여러분은 시작(詩作)의 비밀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흥, 그건 불변화사와 동사과거형에 숨이 막혀 죽지 않도록 소스를 쪽뿌려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 식이라면 난 호메로스에 아무 흥미도 느낄 수 없어. 대체 고대 그리스의 잡동사니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식으로 살려고 시도만 해도 당장 쫓겨날걸." 87쪽

   한스가 갖고 있는 걱정과 소원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하일너는 그만의 생각과 말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뜨겁고 더 자유롭게 살았다. 이상한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들을 다 경멸하는 듯했다. 또 오래된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영혼을 시로 표현하고, 상상으로 고유한 허구의 삶을 만들어내는 기묘하고 신비한 재주가 있었다. 명민하고 구속을 싫어하며, 한스가 1년 동안 할 농담을 매일같이 했다. 그는 우울했지만 자신의 슬픔조차 이국의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88쪽

   이런 생각을 가진 하일너와 가까워지면서 한스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그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주목받는 것을 더 꿈꿨기 때문에 하일너와 함께한 시간만큼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룸메이트 중 한 명인 힌딩거가 연못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스에게 하일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전보다 더 하일너와 가까워지면서 한스의 성적은 점점 더 떨어지고, 모범생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그러다가 하일너가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또한 신경쇠약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141쪽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산책 등을 하면서 쉽니다. 때마침 "곤경과 고독 속에서 다른 유령이 병든 소년에게 다가와 점점 친숙해졌고 꼭 필요한 존재"(147~148쪽)가 됩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자살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생기자 한스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그동안 피했던 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되는데, 이때 만난 '엠마'라는 소녀가 그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엠마는 소년의 마음을 기만하고 떠나버립니다.

   한스는 어쩌면 너무 일찍 사랑의 비밀을 맛보았다. 그것은 살짝 달콤하고, 많이 썼다. 190쪽

   한스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것 같기도 하고,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에게 기계공과 서기 중에 선택하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라틴어 학교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아구스트가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에게 물어봅니다. 아우구스트는 체력적으로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머리도 좋아야 하니 같이 해보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스는 생각지도 않았던 수습공이 됩니다.

   …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땀흘렸는데, 작은 즐거움을 그렇게 많이 포기하고, 그렇게 자부심과 명예욕을 느끼고 희망에 부풀어 꿈을 꾸었는데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지금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모든 사람의 비웃음을 사며 가장 낮은 수습공으로 작업장에 들어가려고 그 모든 일을 했단 말인가! 191쪽

   한스는 생전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또 이해했다. 그 찬가는 최소한 초보자에게는 감동을 주었고,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었다. 한스는 자신의 작은 존재와 인생이 커다란 리듬 속에 들어가 어우러지는 것을 느꼈다. 196쪽

   몇 달 만에 다시 일요일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평일에 손이 시커멓게 되고 팔다리가 노곤하도록 일을 해야 일요일에 거리가 더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태양이 더 환하게 빛나고, 모든 것이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199쪽

   인생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같이 술집에 앉아 그래도 되고 그럴 자격도 있는 사람처럼 일요일을 즐겁게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206쪽

   기계공 일을 시작한 처음에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자괴감이 들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의 기쁨과 즐기는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요일 밤에 아우구스트를 비롯한 기계공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신 후 혼자 집으로 돌아오다가 물에 빠져 쓸쓸하게 죽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혼을 내려고 별렀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커먼 강물을 따라 조용히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도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그를 떠났다.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가을밤이 어슴푸레 떠내려가는 그의 여윈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커먼 강물이 그의 손과 머리카락과 창백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장난쳤다. 날이 밝기 전에 사냥을 하러 나온 겁 많은 수달이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미끄러지듯 그 결을 스쳐지나갔을 뿐,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길을 잃고 헤매다 가파른 곳에서 미끄러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물을 마시려다가 삐끗 균형을 잃었을 수도 있다. 혹은 아름다운 강물에 홀려 몸을 숙였다가 평화와 깉은 안식이 가득 깃든 밤과 창백한 달을 보고, 피로와 두려움의 조용한 강요에 떠밀려 죽음의 그늘에 빠졌을 수도 있다. 213~214쪽

   소년은 한창 꽃필 시기에 갑자기 뚝 꺾여 즐거운 인생길을 벗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도 피로와 외로운 슬픔에 젖어 아들이 살포시 미소 짓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졌다. 214쪽

   그렇게 한스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말입니다. 그의 죽음이 실족사였는지, 자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 그가 눈을 감을 때는 그의 곁에 아무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누구를 위해 살았던 것일까요? 어쩌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살포시 미소 짓고 있었다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립니다.

   헤르만 헤세 또한 고향에서 촉망받던 소년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도망쳤고, 열다섯 살에는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한스 기벤라트는 작가 자신이었고,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과 행동을 했던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수레바퀴 아래서』는 분명 1906년에 발표된 소설인데, 지금의 우리 교육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놀라울 정도입니다.

   자, 이제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들을 떠올리고 대면해 보세요.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도록, 즐거운 인생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119쪽

   누구에게나 빛나는 멋진 나날이었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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