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끝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항상 쌍방향으로 뿜어지는 핑크빛은 아니다. 때론 누군가만의 일방통행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론 방향을 잘못 잡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살다보면 그런 때가 종종 찾아온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괜찮아, 단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그 사람과 연인인 척 해보는 것도 괜찮아. 그러나 항상 생각하는 것만 쉬울 뿐이다.

 

이선 프롬, 유난히 겨울이 긴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살고 있는 그는 좀처럼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나이 52세, 그를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어느날 그 마을을 찾은 낯선 남자,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을 가지고 있었던 이선 프롬의 썰매를 타게 된다. 며칠 동안 함께 했던 그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 것 같던 이선이 드디어 말문을 연다.

 

이선은 화학자나 엔지니어를 꿈꾸며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병을 얻어 드러눕자 시골로 내려온다. 아버지가 나으면 다시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다. 이때 그의 사촌 누이인 지나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도우러 온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선은 자신보다 일곱살 위인 지나와 결혼을 하고 다시 도시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나가 병을 얻고 만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한창 꿈을 꾸며 나아갈 때에 그는 또다시 주저앉고 만다. 아픈 지나 대신 집안 일을 돕기 위해 지나의 사촌 조카인 매티가 그들의 집으로 온다. 병 때문에 항상 신경질적이고 이선보다 훨씬 늙어보였던 지나와는 달리, 매티는 발랄함을 간직한 처녀였다. 이선이 그런 매티에게 핑크빛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예쁜 그녀에게는 다른 청년이 있었고, 그는 지나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그녀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픈 아내가 다른 마을에 있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간 것이다. 온전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하루라는 시간이 생겼다. 아내가 없는 집 안에서 매티는 전날 아내가 이선을 맞이했던 모습 그대로 그를 맞이한다. 그 얼마나 꿈꾸었던 모습인가. 그러나 더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나 그녀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왜 이렇게도 까닭 없이 행복한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손을 댄 적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단둘이 밤을 같이 한 일이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게 되면 인생이 어떠하리라는 환상을 보여 주었고, 그런 달콤한 광경에 찬물을 끼얹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그가 무엇 때문에 행동을 삼갔는지 아마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01~102)

 

「우리는 다시는 이렇게 단 둘이 있을 수 없겠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 (p. 103)

 

아무리 아픈 여자더라도 그녀들만의 고유한 직감만은 발휘되는 것일까. 집을 비웠던 아내 지나가 남편의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 급기야 매티를 쫓아내려 한다. 매티는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이선은 밤새 고민한다. 지나와 헤어지고 매티와 함께 서부로 갈까.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매티를 행복하게 해 줄 만큼의 돈은 커녕 서부로 갈 여비조차 없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혼자 남게 될 아픈 아내도 걱정이 됐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음날 그녀를 역까지 바래다 주는 것 밖에 없었다. 정말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인가.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던 이선, 항상 무언가에 의해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남아 있었을까. 매티를 바래다주러 역으로 향하던 그는 갑자기 느릅나무가 있는 곳으로 썰매를 돌린다. 얼마전 그는 느릅나무 아래서 썰매를 태워주겠다고 매티에게 약속을 했었지만 지키지 않았다. 썰매를 잘못 몰면 느릅나무에 부딪혀 죽을 수도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는 바로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맷, 겁내지 마! 저 느릅나무 속으로 돌진할까 봐 겁이 났었지?」

「아저씨만 같이 계시면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렇지만 여기는 참으로 위험한 곳이야. 조금만 비켜 갔더라도 우린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머리카락만치도 안 틀리게 거리를 잴 수가 있지 ─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씀이야.」

「전 아저씨가 제일 정확한 눈을 갖고 있다고 늘 말하지요……」 (p. 168)

 

그녀와의 약속은 지켰지만 더이상 그녀와 함께 할 수는 없다. 다시 역으로 향하려는 이선을 그녀가 붙잡는다. 머리카락만치도 안 틀리게 느릅나무를 비켜갈 수 있다는 것은 정확하게 느릅나무와 부딪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선과 매티는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썰매를 탄다.

 

「오, 맷. 난 널 보내지 못하겠어!」

「아, 저도 떠나지 못하겠어요!」

「맷,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떡하면 좋아?」

「지금 우리가 서로 헤어진다면 어디 간들 무슨 소용이야?」

「이선 아저씨! 이선 아저씨! 다시 한번 썰매를 태워 내려가 주세요.」

「어디로 내려간단 말이냐?」

「저 비탈길요. 지금 당장요. 다시는 우리가 올라오지 못하게 말이에요.

바로 저 느릅나무로 말이에요. 아저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서로 떨어질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이선 아저씨, 제가 아저씨와 헤어진다면 어디로 가요?

전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아저씨도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p.170~172)

 

이선, 그가 그 어떤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처음으로 행한 일이 바로 느릅나무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돌진은 실패했지만 그들은 그 날 이후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선과 메티가 느릅나무를 향해 썰매를 돌진시키는 장면에서 내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파문은.

어쩌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신의 의지를 꺾이고, 그 외부의 힘을 핑계 삼아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이선 프롬이 지금의 나 혹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절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그렇다고, 그래서 내 의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내 탓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외치며 더이상 무언가에 부딪히려 하지 않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아 있어도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정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2007/10/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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