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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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예술가의 부드러운 손놀림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한낱 클럽에서의 주먹질에 불과하다!

러시아 문학 작품 소개들을 읽다 보면 종종 나보코프의 평들과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 아주 짧게 실려 있어서 어떤 이유로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궁금해서 찾다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발견했지만 절판돼서 아쉬웠는데 개정판이 나왔다.

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나치 정권을 피해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보코프는 1941년부터 대학에서 유럽과 러시아 문학 강의를 했고, 1955년에는 『롤리타』를 발표했다.

『러시아 문학 강의』는 당시 나보코프가 러시아 작가들에 대해 강의했던 강의록 필사본 중 일부를 실은 것으로, 러시아 작가 6명(니콜라이 고골 1809~1852, 이반 투르게네프 1818~188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21~1881, 레프 톨스토이 1828~1910, 안톤 체호프 1860~1904, 막심 고리키 1868~1936)의 작품 세계에 대해 냉철하면서도 신랄한 분석과 비평을 담고 있다.


'러시아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그 개념 자체에 대해 비러시아인들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명의 위대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떠올린다. 산문뿐 아니라 번역 불가한 시인들까지 포함시키는 러시아 독자들에게는 그 범주가 더 확장되지만, 이들 역시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눈부신 대작들이 탄생한 19세기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 문학'은 최근의 사건이다. 게다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러시아 문학을 이미 완성되고 종결된 것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난 40년간 소비에트 체제 아래에서 보잘것없는 주변 문학들만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7쪽

보통 '러시아 문학'은 19~20세기의 몇몇 작가로 대표된다. 다른 나라 문학에 비해 역사도 짧고 폭도 좁은 것처럼 보인다. 나보코프는 본격적으로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를 통해 왜 이런 오해가 빚어지게 됐는지 언급한다. 다른 나라 문학들은 몇 세기에 걸쳐서 발전해 왔지만, 러시아 문학은 그런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늦게 시작했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오래전 서구 국가들이 이루었던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문학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40년간의 절대 통치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한 통제를 놓은 적이 없었다. 나보코프는 "19세기 예술가의 혼을 앗아 가려 했던 세력, 소비에트 경찰국가가 예술에 가한 압박은 안타까움보다는 혐오를 자아낸다(45쪽)"며 "21세기의 러시아가 지금보다는 더 매혹적인 나라가 되어 있기를 기대한다(12쪽)"고 썼다. 현재의 러시아가 그의 기대만큼 매혹적이지 않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아쉬워할까?

이 책에 실려 있는 6명의 작가들(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에 대한 나보코프의 평은 고르지 못하다. 나보코프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를 순서(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대로 꼽고 있는데 충격적이게도 이 순위에 도스토옙스키는 없다.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무려 163쪽에 걸쳐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안나를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꼽기도 했으며 작품 자체는 별로 대단치 않다고 평가한 조지프 콘래드를 어이없는 망언을 한 사람으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를 향한 그의 애정(편애)은 책 전반을 통해 드러나지만, 반대로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는 아니다. 훌륭한 유머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196쪽)" 하며 감상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 톨스토이의 글들이 좀 더 내 성향과 맞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신랄한 비판이라니. 그것도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직 낯선 자국의 대작가를 소개하는 강연에서 말이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 자신의 형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208~209쪽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이 낯선 미국 대학생들을 위해 해당 문장들을 언급하며 아주 디테일하게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런 분석적인 해설은 아마도 그가 문학 작품들을 단숨에 읽지 않고 잘게 쪼개고 아삭아삭 씹어서 오랫동안 음미하는 방식으로 읽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러시아 문학처럼 방대한 분량의 작품들을 읽을 때는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기보다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약을 삼키듯이 단숨에 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려면 통독을 한번 한 뒤에, 나보코프처럼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보코프의 분석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나보코프는 본인이 활동했던 시기의 러시아 문학 작품들은 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나보코프처럼 해외 망명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의 전성기가 또다시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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