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를 리뷰해주세요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를 쓴 소설가 이재웅을 좋아한다. 그를 좋아한 계기가 좀 엉뚱한데, 우연히 인터넷 기사 검색에서 ‘소설가 이재웅 씨는 정수리 부분을 곤봉에 맞았다’는 기사를 보고난 뒤부터였다. 사건 시간은 2006년 5월 4일, 사건 장소는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시위 현장, 가해자는 경찰이었다. 이전까지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제 장편소설 1편이 고작인 신인 작가가 하필 장사밑천인 정수리를 맞았다고 하니 내 입에서 “어쩜 좋아”라는 한탄이 절로 나오더란 말이다. 비유를 하자면 막 개업한 노점을 둘러엎은 격이다. 정수리를 악에 받친 곤봉으로 맞았을 때, 날아간 작품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하겠느냔 말이다.

이후로 그는 단편 소설집을 한권 더 냈는데, 전작과 행보와 마찬가지로 우직하달 만큼 낮은 곳을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소설가 이재웅’을 검색(소설가를 연관 검색어로 붙이지 않으면 수많은 이재웅‘들’ 중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해서 용산참사 시위현장 등에 나타났다는 행보를 확인하곤 한다.

대부분 작가들이 그렇듯이 손과 발이 따로 놀 법도 한데, 그의 손과 발은 같이 움직인다. 동년배인 그의 손과 발이 같이 움직이는 한 나는 그의 소설이 시대를 읽는 눈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난쏘공>처럼 이후에도 시대를 읽는 눈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재웅(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Daum) 전 사장이 아닌 소설가)처럼 현장에 직접 뛰어드는 발빠름으로 작품과 현장을 조응하는 힘은 없으나, 공지영은 다음(Daum)에서 연재한 소설 <도가니>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 즉 동시대인들에게 한국의 권력 구조라는 안개 뒤에 감추어진 현실을 보라고 도발한다.

2005년 8월에야 실체가 드러난 광주인화학교 교장 등의 청각장애인 여학생 성폭력 사건은 공지영이 인식을 했을 당시에는 이미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이 가득 찬 이후였다.

소설가 이재웅의 정수리 구타 사건에서 언급한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시위의 이슈와 의미와 안타까움과 비참한 현실이 건설 확정 이후 흔적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언론과 세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듯이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작가가 우연히 본 기사 한 줄로 촉발한 <도가니>는 ‘사건 이후’인 2009년 연재를 시작하면서 실제 사건과 소설이 만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 매회 원고지 10매씩을 써내면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건 기사처럼 독자들에게 또 다른 현장감을 제시했다.

그렇게 소설에서도 등장하듯 성폭행 교장의 2심 집행유예 판결과 복직 등 솜방망이 처벌로 그 뿌리가 뽑히지 않는 지긋지긋한 권력 유착과 비리의 ‘현실’을 새롭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광주인화학교를 비롯해 비슷한 사건 사고에 대한 경계와 고발의 촉수를 세우게 했다. 

이 소설이 읽는 게 불편한 이유가 이 뿐만은 아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으로 알려진 가상의 무진시의 짙은 안개와 권력 관계의 동일화, 강인호가 등장과 성폭행 피해 아동 영수의 죽음의 교차,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등장인물의 치우친 감정, 강인호의 일관적 태도 미흡 등은 빠른 속독을 요구하는 인터넷 연재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해야 할지, 전형성이고 상투적인 틀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마피아 카르텔처럼 하나로 묶인 복지시설, 교회, 병원, 법원, 경찰서, 검찰, 교육청 등 무진시의 권력이란 권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개입한 소설 속 정황이 과연 있지도 않은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거짓 프로파간다인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후일담 소설이 아니라 진행형인 사실을 써내려간 사실 기반의 르포이다. 더욱이 책이 출간한 2009년 6월 대한민국 사회의 축척도로 이 이상 소설을 찾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다. 뿌연 안개 속에서 청각장애인의 가혹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무진시민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현실을 외면하는 바로 우리, 눈뜬장님들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작가는 연재 당시 초창기 압력을 받았으나 실시간 올라오는 독자들의 응원이 버팀목이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다시 말해, 마치 인터넷 성지라고 불리는 ‘아고라(agora)’의 아고리언처럼 논객 역할을 공지영이 해낸 셈이다. 독자와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 찾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화학작용을 불러일으킨 <도가니>는 한국의 독특한 인터넷 현실과 소설과의 새로운 시도와 방식의 긍정적 실마리를 찾은 첫 번째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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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인생>을 리뷰해주세요
헤세의 인생 - 삶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헤르만 헤세 : 사랑, 예술 그리고 인생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이재원 옮김 / 그책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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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시를 읽기 힘들었다. 두꺼운 인문서적은 그래도 가늠이 되는데, 얇은 시집에 도무지 손이 가지 않는다. 가끔 어지러운 방 안, 침대 밑, 책장 밑에서 발견되는 먼지를 자신의 두께만큼 지고 있는 시집들은 비온 뒤 달라붙은 낙엽처럼 성가시기만 했다.  

한때, 낙엽이 찬란한 잎사귀였듯이 시집 역시 내 젊음의 흔적이었음에야 다르지 않을 것을. 그리고 때를 모르는 나무가 그렇듯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펴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럴 나이가 왜 지금인지는 몰랐다.

<헤세의 인생>은 최초로 헤세의 전집을 편집했던 폴커 미헬스가 <헤세의 사랑>, <헤세의 예술>과 같이 출간한 아포리즘 가운데 한 권이다. 

영혼의 순례자, ‘나’로 살아가기, 모든 아이들은 시인이다, 청춘에 대한 오해, 나이 든다는 것은 이라는 소제목으로 단락을 나눈 책은, 연도 별 혹은 작품 별 구분이 애써 무시되고 있다. 작품의 한 대목이, 주고받은 편지의 한 구절이, 때로는 연도만 밝히기도 한다.

폴커 미헬스가 들은 말이 아닌 읽은 글로 헤세와 대화를 하면서 흥에 겨워 옮기지 않았을까 싶다.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글을 쓴 목적과 대상이 다르거늘, 자칫 헤세의 온 인생을 걸쳐 나누었던 말 중에서 가려 뽑은 아포리즘은 오해를 사거나 뭉뚱그려질 수도 있겠다 싶지만 ‘헤세’라는 이름보다도 마음을 비우고 흐르는 구름을 보듯이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만지듯이 같이 걸음걸이를 맞춰 읽다보면 문학의 대가, 헤세의 인생을 만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모습을 반추하게 된다.

구름과 나뭇잎을 통해 바람을 보듯이 말이다. 부러 페이지를 접어 둔 구절을 옮겨 적을까 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책을 가까이 두면서 내 마음을 확인했으면 족하지, 뭘.

시집을 보고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했다. 의무로 공부하듯이, 애써 짜낸다고 내 안으로 들어올 게 아니라고 마음먹었다. 오히려 먼지처럼 잡으려고 해도 주위를 떠돌던 시어들이 자연스럽게 햇살처럼 깃들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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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를 리뷰해주세요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
누주드 무함마드 알리.델핀 미누이 지음, 문은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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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예멘의회는 17세 미만 소녀들을 기준으로 <강제 조혼 폐지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아랍권에서 강제 조혼으로 고통을 받는 비슷한 처지의 소녀들의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이다. (‘강제결혼 사우디 8세 소녀 사우디 법원 결국 이혼 허용’ - 서울신문, 2009.05.02) 관습처럼 신부 가족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고 어린 소녀를 사왔던 강제 조혼의 폐단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데에는 작년 4월 15일, 예멘의 10살 소녀 누주드 알리의 이혼 판결 소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주드 알리는 강제 결혼으로 2달여의 성폭행과 구타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법원을 찾았고, 다행히 그곳에서 인권변호사 샤다 나세르를 만나면서 그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랍권의 강제 조혼의 끔찍함은 형사 사건이 아닌 민사 사건인 이혼 소송에서 보듯이 강제 조혼을 인신매매와는 전혀 별개인 관습처럼, 심지어 ‘아홉 살 소녀와 결혼하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지난한 삶은 누주드 만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16번의 임신과 세 번의 유산을 한 누주드의 어머니 쇼야는 누주드의 정확한 나이와 생일을 모른다. 다시 말해 호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열여섯에 조혼을 한 어머니 역시 가난과 문맹과 조혼의 예멘 여성들의 악순환 고리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에 따라 누주드의 전남편인 30살의 파에즈 알리 타메르는 누주드의 나이가 13살인 줄 알았다고 법정 증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또한 1999년 개정된 예멘의 결혼법에 의하면 2차 성징이 나타나는 13살 소녀인 경우 결혼 및 초야가 사회적으로 납득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나온 발언으로, 예멘을 비롯한 중동 지역의 조혼 풍습이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사회적인 악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강제 조혼, 성폭행, 구타, 고된 시집살이 등을 겪는 예멘 소녀들의 현실 고발과 그 굴레에서 벗어난 어린 누주드의 희망찾기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이 인권 보고서인 동시에 누주드의 가족사를 담은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강제 조혼을 시킬 수밖에 없는 예멘 최하층민의 삶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수 세기동안 식민지였다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북국으로 대립을 했던 예멘의 근현대사는 우리의 역사와 많은 부분이 겹친다. 통일된 이후에도 2008년까지 4년 간 내전을 겪으면서 누주드의 가족과 같은 빈민들이 전형적인 도시 최하층민으로 전략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지참금 거래나 마찬가지인 강제 조혼 같은 전근대적인 관습이 우리와는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누주드의 비극이 어머니와 언니 모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천형처럼 짊어진 빈곤의 굴레에 의한 불행이 약자들 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면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손을 든 초등학교 2학년으로 되돌아온 누주드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의 수익금 중 일부는 중동 지역 어린이의 교육 지원과 강제 조혼 예방으로 쓰인다’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불행을 겪은 누주드가 앞으로 견디어야할 삶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과거도 문제지만 무장단체의 故 엄영선 씨의 납치 살해 사건으로 알려진 곳인바, 대외적으로도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실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치적 혼란이 자칫 보수적인 무슬림의 회귀를 불러올 경우, 관습법이라는 도그마에 도전장을 내고 서방 언론의 도움을 받은 누주드의 행동을 곱게 볼 리가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11살 누주드도 곧 여름 방학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새롭게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다가오는 방학이 싫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누주드와 많은 소녀들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는 방법이 이 책을 사서 읽은 정도만으로도 가능하다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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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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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출판사 대리로 일하는 학교 선배 구보와 일찌감치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잽싸게 근처 커피 체인점 퀀즈 테라스Queen's Terrace 안 에어컨 밑에 자리를 잡았다. 무더위에 주위 사람들이 평소보다 세배나 싼 행사 가격이 붙은 이집 얼음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몰렸는데, 커피를 마시러 온 건지, 커피 잔의 대부분을 차지한 얼음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를 정도였다. 소문에 인근 커피숍이었던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이 망하자마자 커피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구보는 이른바, 장르소설이라고 불리는 10대 타깃의 소설 담당 편집이었는데, 일이 밀릴 때마다 가끔씩 실직 상태인 B를 불렀다. 어쩌다보니 구보와 B는 같은 층 출신 작가 L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소설이랍시고, 읽고 보면 인문서적 두 줄짜리도 안 되는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게 태반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안 읽게 되거든요. 그런데, L의 소설은 우리가 모른 척하는 현실을 집요하게 후벼 판달지, 가슴으로 와닿는 게 있어요.”

“근데 구식이야. 이건 뭐, 60년대, 그래봐야 80년대식이니 누가 읽겠어? 안 그래도 소설을 읽지 않는데. 이건 뭐….”

“그 친구 이름을 검색해보면 시위 참사 추모 현장에서 정수리를 얻어터졌네 하는 기사가 뜨거든요? 그러니까 왠지 글이 더 설득력을 같더란 말이죠. 거 왜, 시인인데 간통 얘기나 나오는 K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그러니까 걔가 하는 얘기가 고루하다는 게 아니라, 푸는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야. 얼마 팔리기나 했나? 아무도 읽지 않으면 이건 뭐 자기만족인가?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니? 요즘 볼거리, 읽을거리, 놀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 참. 현재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어떻게 다른 식으로 풀어요? 에두르지 직구 승부를 하는 거죠. 이 바닥도 사실 얍삽한 놈들 많은 거 잘 아시잖아요.”

“얌마. 너, 아까부터…. 그러니까 우리 출판사 책이 얍삽하다는 거냐?”

형은 후루룩 마지막 남은 커피를 들이키더니, 얼음을 우두둑 씹었다.

“제가 언제요? 아이 참. 저도 같이 일하다 나왔잖아요?”

“아냐. 넌 어차피 잠깐 하는 일이다 이거지. 밥 먹을 때도 요즘 애들을 너무 깔본다는 둥 만화도 이거보다 낫겠다는 둥 그런 식이었어. 너 새꺄. 그럴 거면 다음부터 오지 마.”

“형 왜 그러세요. 안 그래도 요즘 일거리 다 짤리고 이거라도 안하면 저 정말 굶어 죽어요.”

“이거라도?”

“아니, 제 처지가 그렇다는 소리죠. 어! 형! 방금 봤어요? 뭔가 큰 게 떨어졌는데?”

“뜬금없이 뭔 소리야. 520층에서 뭐가 떨어져. 자식 엄하게 말 돌리네.”

“코끼리! 시위 진압용으로 경찰들이 끌고 다니는 아미타불인가 하는 코끼리! 그게 같은데?”

B는 창문에 코가 뭉개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아래를 쳐다봤지만 코끼리는 보이지 않았다. 저소공포증이 확 밀려오는 바람에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옆에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마다 앉은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은 OL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서민 주택가였던 이곳이 차츰 재개발되면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보다 더 자주 보는 풍경이었다. 

“알았어. 목소리 좀 줄여. 야. 너 전화벨 울리잖아.”

“여보세요? 아~. 예. 잠시만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 예.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너, 아까 밥 먹고 나오면서 갔다 왔잖아?”

“설사 왔나봐. 금방 다녀올게요.”

전화를 들고 황급히 화장실로 가는 B가 좀 수상한 듯도 했지만, 구보는 미처 눈치를 못했다. 구보 나름대로 B에게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있어서 망설이는 참이었다. B의 모습이 보였다. 구보는 아무래도 말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왔냐? 지금 내 처지가 아미타불이다. 나라고 좋은 소설 만들기 싫어서 그런 게 아냐. 거 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재미있고 뭔가 대놓고 씹지 않아도 우회적으로 메타포도 좀 있는 소설 같으면 당장 출간하지. 예를 들자면 바벨탑 얘기에 빗대서 말이야.”

“바벨탑? 그건 좀 아닌데. 아무튼 형네 회사가 돈도 안 되는 그런 소설을 잘도 내겠다. 그런데 형네 회사 사장이 개로 바뀌었어요?”

“거 왜 영화배우로 돈 많이 번 개 있잖아. 오늘 아침에 취임했다. 앞으로 문화 사업을 한다나 뭐라나 하더니만 덜컥 우리 회사를 샀더라고.”

“그래서, 사무실마다 개껌이 있었구나. 개비스킷은 먹을 만하던데요? 처음에는 모르고 먹었지만.”

“전에 사장도 밤만 되면 개였는데, 이젠 정말 개가 그 자리에 왔으니, 참내. 지금 미디어 2팀 애들은 뭐하는지 아니? 개 자서전 집필 중이다. 것도 세 권짜리로.”

“그래서 걔네 일이 나한테 왔구나. 나 같은 프리들한테는 고맙죠. 며칠 계속 출근했더니 직원 같은 기분이 다 들어요.”

“고맙기도 하겠다. 암튼, 그래서 말인데, 너 들어오는 게 좀 미뤄질 것 같아.”

“예? 갑자기 뭔 소리예요?”

“사장 갑자기 바뀌고 다들 눈치 슬슬 보느라 바쁜데, 신입 직원을 들이려고 하겠어?”

“그럼 기획 <타워>는요?”

“그게, 그냥 있는 인력으로 알아서 하라네.”

“형, 그거 제 기획이잖아요!”

“나야 물론 알지. 우리 팀장도 알고. 그런데 뭐 어쩌겠어. 상황이 뒤숭숭해서 누가 잘릴지 모르는 판인데 팀장이 성과는 내야겠고. 뻔한 거지. 뭐.”

“정말 너무한다. 말이 안 나온다. 완전 개판이네. 이거.”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도 경우가 아닌 건 아는데. 그래도 네가 기획 아이디어도 냈고….”

“아이디어를 내요? <타워>는 제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가 만들어서 준 거잖아요.”

“그게 내부 회의를 하면서 세련되게 바뀌었지. 암튼 그래서 네가 적임자고, 2팀도 바쁘고 하니까 지금처럼 맡아줬으면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짠 기획을 가지고 알바로 해라? 곰이 안무 짜고 재주까지 부리고 돈은 알아서 챙기시겠다?”

“그런 게 아니라도. 이번 기회에 너도 좀 경험도 쌓고….”

“정규직도 아니고 인턴 약속도 기분 더러운데. 그렇게는 못해요.”

“야. 요즘 빈스토크에서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3년 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됐고요. 그냥 제 기획 받아주는 데로 가겠습니다. 잡일만 하는 것도 지쳤고요.”

“뭐야? 너 혹시 <타워> 여기저기 뿌렸냐?”

“뿌린 건 아니고, 두어 군데 보내긴 했죠.”

“야! 너 어떻게 학교 선배한테 이럴 수가 있나? 이거 완전히 뒤통수 때릴 녀석이네.”

“학교 후배 기획이나 가로채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그 소리는 제가 할 소립니다. 암튼 얼굴 붉히기 전에 그만 얘기하죠.”

B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카페 문을 확 밀쳤다. 뜨거운 바람에 목이 턱 막히는 바람에 잠시 망설였지만 곧장 거리로 나왔다. 아무래도 며칠 일한 알바비를 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오늘까지만 일한다고 말할 참이었다.

방금 화장실에서 다른 회사도 아닌 빈스토크 최고의 위성 디자인 회사 이앤케이 자회사에서 <타워> 기획을 진행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나 몰라서 구보 선배에게 건넨 기획서를 몇 배나 보강한 실제 기획서였다. 이를테면 단편 소설을 연작소설집으로 묶은 식이랄까.

안 그래도 눈치가 빤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B는 이앤케이가 있는 장거리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아 탔다.

문득 궁금했다. 아미타브가 실제로 떨어진 걸까? 그런 것 치고는 거리가 너무 조용하다. 코끼리 한 마리 떨어졌다고 누구 한 명 신경을 쓸  빈스토크 주민들이 아니었지만 새삼 이 동네도 재개발을 하면서 인심이 참 각박해졌다고 생각했다. 새삼 학교 선후배들과 자주 어울렸던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이 망하면서 뭔가 갑자기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고 생각했다.

B는 아무려나 아미타브가 실제로 떨어졌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타워> 기획 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먼저 써먹기 전에 말이다. 이를테면 얍삽한 구보 선배 같은.

**소설 <타워> 부록에 실린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를 읽고 나름 재구성한 가상도시 빈스토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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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며>를 리뷰해주세요.
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한국은 2018년이면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 14% 이상)로 진입한다. 지금도 한국의 의약시장 규모는 2008년 기준 세계 12위 수준이다. 현재 다국적 의약기업이 가장 눈여겨보는 분야는 노인질환 관련 분야이다.  

한국사회에서 돈벌이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는 노후에 대한 사회복지체계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이 없는 노인들의 빈곤, 가난, 고통, 외로움 등 삶 전반에 대한 문제는 당장 시급한 사회 이슈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우려를 하는 점은 삶의 처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는 현 사회 제도는 젊은 세대를 ‘돈 버는 기계’로 내모는 악순환을 반복케 한다.

그래서 건강한 노년을 위한 안티 에이징(anti aging)의 기본 조건으로 금연, 절주, 체중감량, 휴식,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조절, 타인과의 유대관계 등을 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항목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는 미래에 저당 잡힌 삶을 사는 사회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인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실제로 7년 동안 돌본 기록인 <어머니를 돌보며>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띤 부분은 집에서 보낸 2년 이후, 노인 요양원에서 보낸 삶에 대한 기록이다.

감상적인 부분을 최대한 절제하고 자신이 겪은 7년의 과정을 담담하게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적은 이 책은 사회시스템을 고발하는 식의 내용은 아니다. 예순이 가까운 그녀 자신도 녹내장을 앓는 등의 과정 속에서 힘들게 버틴 삶에 대한 비망록이자 이후 같은 과정을 겪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이다. 

미국인구 3억 명 중 4천만 명이 아예 의료보험 시스템으로부터 격리된 미국 영리의료시스템의 공포는 익히 알려진 터, 그녀의 어머니와 심장병을 앓는 아버지는 다행히도 보험사의 혜택을 받는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사설 노인 요양원에서 만난 “평생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할 정도로 고마웠던 직원은 요양원 서기 빌리로, 보험금 문제로 짜증내고 화를 내는 저자를 위해 “아버지가 60일간의 장기요양 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여섯 차례나 어머니의 의무기록을 인쇄해 블루 실드(미국 의료보험 조합)에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빌리는 “거의 착취라고 할 만큼” 요양원에서 힘들게 일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월마트에 가서 또 일해야 했다”고 말한다.  

사실, 저자는 치매를 앓는 부모를 둔 자녀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답이 될 정보”로 “11. 언제나 당신의 말을 들어 주고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 뿐”이라고 할 정도로 개인적인 태도, 각오, 다짐에 지침을 쓴 것이지,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에 대한 비판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책 속에는 요양원의 시설, 직원 등에 대한 불만이 섞여 나온다.  

어머니의 투병 기간 7년 중 요양원에서 보낸 5년 세월에 저자의 헌신이 뒷받침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망상, 우울증, 기억상실, 거동 불편 등이 점점 심해진 5년 세월은 치매 초기 집에서 함께 보낸 2년 세월보다 더 힘겨운 인내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에는 저자의 이웃집 친절한 아주머니 같은 애정과 염려와 동질감이 책 전체에서 가득 묻어난다. 그럼에도 자국 내 의료시스템 밖에 있는 4천만 명에 속한 치매환자의 가족들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거나 박수를 보내기가 힘들다. 노인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가족 역시 나머지 4천만 명에 속한다는 현실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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