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B는 출판사 대리로 일하는 학교 선배 구보와 일찌감치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잽싸게 근처 커피 체인점 퀀즈 테라스Queen's Terrace 안 에어컨 밑에 자리를 잡았다. 무더위에 주위 사람들이 평소보다 세배나 싼 행사 가격이 붙은 이집 얼음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몰렸는데, 커피를 마시러 온 건지, 커피 잔의 대부분을 차지한 얼음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를 정도였다. 소문에 인근 커피숍이었던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이 망하자마자 커피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구보는 이른바, 장르소설이라고 불리는 10대 타깃의 소설 담당 편집이었는데, 일이 밀릴 때마다 가끔씩 실직 상태인 B를 불렀다. 어쩌다보니 구보와 B는 같은 층 출신 작가 L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소설이랍시고, 읽고 보면 인문서적 두 줄짜리도 안 되는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게 태반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안 읽게 되거든요. 그런데, L의 소설은 우리가 모른 척하는 현실을 집요하게 후벼 판달지, 가슴으로 와닿는 게 있어요.”

“근데 구식이야. 이건 뭐, 60년대, 그래봐야 80년대식이니 누가 읽겠어? 안 그래도 소설을 읽지 않는데. 이건 뭐….”

“그 친구 이름을 검색해보면 시위 참사 추모 현장에서 정수리를 얻어터졌네 하는 기사가 뜨거든요? 그러니까 왠지 글이 더 설득력을 같더란 말이죠. 거 왜, 시인인데 간통 얘기나 나오는 K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그러니까 걔가 하는 얘기가 고루하다는 게 아니라, 푸는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야. 얼마 팔리기나 했나? 아무도 읽지 않으면 이건 뭐 자기만족인가?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니? 요즘 볼거리, 읽을거리, 놀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아이 참. 현재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어떻게 다른 식으로 풀어요? 에두르지 직구 승부를 하는 거죠. 이 바닥도 사실 얍삽한 놈들 많은 거 잘 아시잖아요.”

“얌마. 너, 아까부터…. 그러니까 우리 출판사 책이 얍삽하다는 거냐?”

형은 후루룩 마지막 남은 커피를 들이키더니, 얼음을 우두둑 씹었다.

“제가 언제요? 아이 참. 저도 같이 일하다 나왔잖아요?”

“아냐. 넌 어차피 잠깐 하는 일이다 이거지. 밥 먹을 때도 요즘 애들을 너무 깔본다는 둥 만화도 이거보다 낫겠다는 둥 그런 식이었어. 너 새꺄. 그럴 거면 다음부터 오지 마.”

“형 왜 그러세요. 안 그래도 요즘 일거리 다 짤리고 이거라도 안하면 저 정말 굶어 죽어요.”

“이거라도?”

“아니, 제 처지가 그렇다는 소리죠. 어! 형! 방금 봤어요? 뭔가 큰 게 떨어졌는데?”

“뜬금없이 뭔 소리야. 520층에서 뭐가 떨어져. 자식 엄하게 말 돌리네.”

“코끼리! 시위 진압용으로 경찰들이 끌고 다니는 아미타불인가 하는 코끼리! 그게 같은데?”

B는 창문에 코가 뭉개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아래를 쳐다봤지만 코끼리는 보이지 않았다. 저소공포증이 확 밀려오는 바람에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옆에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마다 앉은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은 OL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서민 주택가였던 이곳이 차츰 재개발되면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보다 더 자주 보는 풍경이었다. 

“알았어. 목소리 좀 줄여. 야. 너 전화벨 울리잖아.”

“여보세요? 아~. 예. 잠시만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 예.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너, 아까 밥 먹고 나오면서 갔다 왔잖아?”

“설사 왔나봐. 금방 다녀올게요.”

전화를 들고 황급히 화장실로 가는 B가 좀 수상한 듯도 했지만, 구보는 미처 눈치를 못했다. 구보 나름대로 B에게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있어서 망설이는 참이었다. B의 모습이 보였다. 구보는 아무래도 말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왔냐? 지금 내 처지가 아미타불이다. 나라고 좋은 소설 만들기 싫어서 그런 게 아냐. 거 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재미있고 뭔가 대놓고 씹지 않아도 우회적으로 메타포도 좀 있는 소설 같으면 당장 출간하지. 예를 들자면 바벨탑 얘기에 빗대서 말이야.”

“바벨탑? 그건 좀 아닌데. 아무튼 형네 회사가 돈도 안 되는 그런 소설을 잘도 내겠다. 그런데 형네 회사 사장이 개로 바뀌었어요?”

“거 왜 영화배우로 돈 많이 번 개 있잖아. 오늘 아침에 취임했다. 앞으로 문화 사업을 한다나 뭐라나 하더니만 덜컥 우리 회사를 샀더라고.”

“그래서, 사무실마다 개껌이 있었구나. 개비스킷은 먹을 만하던데요? 처음에는 모르고 먹었지만.”

“전에 사장도 밤만 되면 개였는데, 이젠 정말 개가 그 자리에 왔으니, 참내. 지금 미디어 2팀 애들은 뭐하는지 아니? 개 자서전 집필 중이다. 것도 세 권짜리로.”

“그래서 걔네 일이 나한테 왔구나. 나 같은 프리들한테는 고맙죠. 며칠 계속 출근했더니 직원 같은 기분이 다 들어요.”

“고맙기도 하겠다. 암튼, 그래서 말인데, 너 들어오는 게 좀 미뤄질 것 같아.”

“예? 갑자기 뭔 소리예요?”

“사장 갑자기 바뀌고 다들 눈치 슬슬 보느라 바쁜데, 신입 직원을 들이려고 하겠어?”

“그럼 기획 <타워>는요?”

“그게, 그냥 있는 인력으로 알아서 하라네.”

“형, 그거 제 기획이잖아요!”

“나야 물론 알지. 우리 팀장도 알고. 그런데 뭐 어쩌겠어. 상황이 뒤숭숭해서 누가 잘릴지 모르는 판인데 팀장이 성과는 내야겠고. 뻔한 거지. 뭐.”

“정말 너무한다. 말이 안 나온다. 완전 개판이네. 이거.”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도 경우가 아닌 건 아는데. 그래도 네가 기획 아이디어도 냈고….”

“아이디어를 내요? <타워>는 제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가 만들어서 준 거잖아요.”

“그게 내부 회의를 하면서 세련되게 바뀌었지. 암튼 그래서 네가 적임자고, 2팀도 바쁘고 하니까 지금처럼 맡아줬으면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짠 기획을 가지고 알바로 해라? 곰이 안무 짜고 재주까지 부리고 돈은 알아서 챙기시겠다?”

“그런 게 아니라도. 이번 기회에 너도 좀 경험도 쌓고….”

“정규직도 아니고 인턴 약속도 기분 더러운데. 그렇게는 못해요.”

“야. 요즘 빈스토크에서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3년 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됐고요. 그냥 제 기획 받아주는 데로 가겠습니다. 잡일만 하는 것도 지쳤고요.”

“뭐야? 너 혹시 <타워> 여기저기 뿌렸냐?”

“뿌린 건 아니고, 두어 군데 보내긴 했죠.”

“야! 너 어떻게 학교 선배한테 이럴 수가 있나? 이거 완전히 뒤통수 때릴 녀석이네.”

“학교 후배 기획이나 가로채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그 소리는 제가 할 소립니다. 암튼 얼굴 붉히기 전에 그만 얘기하죠.”

B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카페 문을 확 밀쳤다. 뜨거운 바람에 목이 턱 막히는 바람에 잠시 망설였지만 곧장 거리로 나왔다. 아무래도 며칠 일한 알바비를 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오늘까지만 일한다고 말할 참이었다.

방금 화장실에서 다른 회사도 아닌 빈스토크 최고의 위성 디자인 회사 이앤케이 자회사에서 <타워> 기획을 진행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나 몰라서 구보 선배에게 건넨 기획서를 몇 배나 보강한 실제 기획서였다. 이를테면 단편 소설을 연작소설집으로 묶은 식이랄까.

안 그래도 눈치가 빤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B는 이앤케이가 있는 장거리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아 탔다.

문득 궁금했다. 아미타브가 실제로 떨어진 걸까? 그런 것 치고는 거리가 너무 조용하다. 코끼리 한 마리 떨어졌다고 누구 한 명 신경을 쓸  빈스토크 주민들이 아니었지만 새삼 이 동네도 재개발을 하면서 인심이 참 각박해졌다고 생각했다. 새삼 학교 선후배들과 자주 어울렸던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이 망하면서 뭔가 갑자기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고 생각했다.

B는 아무려나 아미타브가 실제로 떨어졌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타워> 기획 안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먼저 써먹기 전에 말이다. 이를테면 얍삽한 구보 선배 같은.

**소설 <타워> 부록에 실린  ‘카페 빈스토킹Cafe Bean's Talking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를 읽고 나름 재구성한 가상도시 빈스토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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