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이 땅의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몹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정말 화가 나는 게 있다. SNS를 위시한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요란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순수하고 일차적인 슬픔의 표출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뿜어내는 방향성 잃은 감정의 폭발들이 문제다. 더욱이 몇몇 SNS의 글들은 거짓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일찍이 강조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곧 '무지無知'를 뜻한다. 무지는 사전적으로 "아는 것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넓은 의미로 확대하면 보다 입체적인 정의를 갖는다. 하나의 지식이나 사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일차적인 무지라면 타인의 마음과 현재의 상황에 몰이해한 것은 보다 궁극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재앙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사회는 후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무지의 집대성적 광기를 양산했다. 뉴스와 신문으로 대변되는 메스컴뿐만 아니라 대중과 위정자들까지도 이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력보다는 비본질에 함몰된 원심력의 방해로 국민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응집성을 잃어왔던 게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었다.

   방송과 SNS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적 표현들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그것을 만들어낸 제삼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 표현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참다 참다 못 참아서 폭발된 것일 수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로는 위로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해 시작된 위로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위로라고 할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의 무지에 대한 격언은 곧바로 공자孔子가 역설한 '중용中庸'의 철학과 연결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주자朱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중용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한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중용이며,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에서 출발한다는 게 중용 철학의 핵심이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하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忌憚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시중時中은 때, 곧 타이밍(timing)을 의미한다. 같은 진리라도 적절(timely)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학에서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시時 속에서 중中을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중용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지 않은 중이 어떻게 때에 맞게 발현되느냐(時中)를 뜻하는 것이다. 시기의 적절함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인 것이다.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폭포수처럼 분출되고 있는 세간의 관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공자 식으로 말해서 적절한 타이밍을 갖추고 있느냐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처한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락된 공허한 언어의 전달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꼭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아픔의 밀도와 궁극을 모르는 입장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할 수는 없는 걸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절제된 자세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게 수준 높은 위로의 모습이 아닐까. 위로가 과하여 잉여가 될 때 상대는 피로를 느끼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씹으면서 '이해'와 '위로'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종속적 선후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소설에서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반드시 관통해야 할 그 시절의 특질이라고 지적하면서,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위로는 분출이 아닌 이해를 전제한 기다림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위로하려는 대상이 현실에서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모호한 고유성과 불가해한 밀도를 가진 상황이라면, 진정한 위로는 나중의 영광을 기도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게 아닐까. 꼭 할 말을 해야 하고 상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할까. 손석희의 침묵이 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언어화하여 표현시켜야만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침묵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게 차원 높은 위로의 바른 순서다.

   절제하자. 차분해지자. 실제적인 것들을 살펴보고 챙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사실을 추출하는 것도 벅차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 지금으로서는 보다 절제하는 게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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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04-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동안 이번 뉴스를 보면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받더라도 그저 관심으로만 남는다면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 없이도 위로의 마음을 느끼고 전달하는 것도 충분하다고 봐요. 이 글을 제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싶은데 괜찮은지요?

다윗 2014-04-18 23:49   좋아요 0 | URL
네. 퍼가셔도 됩니다. 잉여된 위로는 항시 인간 사이의 피로감을 쌓을 뿐입니다. 공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