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한국사회포럼에서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의 의약품 개발 독점에 따른 특허와 약가 결정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 적절한 가격의 의약품을 개발하기 위한 공공의 지원이 필요하며, 그것이 어렵다면 공공 성격을 띤 연구소나 제약사를 만들 필요가 있다." 라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이 말은 "의약품 개발에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 줄 아느냐? 우리나라 제약산업이나 보건 예산 같은걸로는 턱도 없다." 라는 어떤 대학 교수님의 반론을 받았다.
그에 대해서 나는 "한 국가 단위에서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WHO 같은 UN산하 기구를 움직여서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라고 대답했었다.
물론, 나도 그 이상의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다소 황당했을 나의 발언은 아마 나자신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고,
국내에서는 아무런 액션도 취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년 이맘때 어떤 미국인이 자비를 들여서 한국에 왔다.
자신과 몇몇 과학자들이 내놓은 R&D Plus라는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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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현재의 의약품 연구개발 패턴은 다음과 같다.
의약품 개발자가 어떤 새로운 약을 개발해서 그것을 특허 내면,
개발자는 그 약을 독점적으로 생산, 판매를 할 수 있는 특허권을 인정받는다.
특허권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 든 경비를 보상하는 차원으로 주어지지만, 몇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1. 실재로 들어간 개발 경비나 생산가와는 관계 없이, 특허권자 임의로 약가를 부적절하게 비싸게 책정할 수 있다.
예> 항암제나 HIV/AIDS 치료제와 같이 '생명'이 걸린 질환에 대한 치료제는
그 개발비나 원가에 관계 없이 약가가 비싸게 매겨진다.
약가의 기준은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선진국 환자들이 부담 가능한 수준에서 결정되며,
그 가격은 전 세계에 거의 동일하게 적용된다.
2. 이윤은 약이 팔린 양에 비례하게 되므로, 잘 사는 나라들에 많은 질환, 즉 비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고객이 많은 질환들 위주로 약의 개발이 이루어진다.
예> 말라리아, 결핵 등의 질병에 대한 의약품 개발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
비만 치료제, 노화 예방 치료제 등은 앞다투어 개발되고 있다.
3. 실재 의약품 개발에 있어서는 그 약품 개발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연구 등,
사회 공공자원의 기여도 크므로, 그만큼의 보수가 공공영역에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편, 신약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생산할 능력이 없는 개발자는 이 특허권을 큰 제약사에 팔게 된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특허권 제도에서는 의약품의 최종 특허권자에게만 이권이 돌아간다.
자, 이제 R&D Plus란?
1. 보상은 약을 파는 제약회사가 아니라 약을 개발한 자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좋은 아이디어나 연구 결과가 있으면 R&D 지원을 신청할 수 있고,
보상도 약품의 기여도에 따라 받을 수 있다.
2. R&D에 의해 개발된 약을 파는 것은 독점이 아니라 자유경쟁이다.
특허약을 독점적으로 생산함으로 인해 높은 가격을 매겨왔던 방식과 달리,
여러 제약회사가 같은 약을 제조, 판매할 수 있게 된다. 경쟁에 의해 약가에 끼여있던 거품이 빠지게 된다.
양질의 약을 생산하는 제너릭 회사들의 입지가 넓어지고, 환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약을 살 수 있다.
3.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질환들의 치료제 개발을 촉진시킨다.
판매량과 관계 없이 개발에 대한 보상을 받기 때문에 부유병 치료제가 아니라도 개발동기가 부여된다.
그뿐 아니라 방치된 질환의 치료제를 개발했을 경우 추가의 인센티브가 주어지게 된다.
4. R&D를 위한 기금의 조성, 심사, 지급을 위한 국제 위원회를 구성한다.
기금은 각 국가별로 분담을 하되, 그 방법은 국가 예산의 일정부분, 제약회사 매출의 일정부분 등,
몇 가지 옵션 중에서 선택한다.
대략 이런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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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현실적인 것 같던 이 제안이,
미국/유럽의 제약회사들의 반대 로비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WHO의 최고 의결기구인 WHA 에서 채택되었다.
단, 모든 의약품에 대한 전면적인 시행은 아니고, 그동안 방치된 부문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의약품 개발, 나아가서 모든 신기술 개발에 있어서의 새로운 paradigm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여기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
그래도 상상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니 괜시리 혼자 감개가 무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