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이란 원래 한 번 듣고는 흘려버리는 것인데,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음모설은 참 생명력이 끈질기다. 사그라지기는커녕 갈수록 내용이 덧보태지고 상황변화에 맞춰 적당히 수정도 돼가며 새로운 버전을 재생산해내고 있다.
한 후배 기자가 외교가에 퍼진 ‘FTA 음모론’을 전해준다. 서울 주재 모(某)대사관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 화제가 나와 한참을 떠들었다는 거다. 외교가의 FTA 음모론에도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가장 그럴듯한 것이 ‘꽃놀이패’ 버전이다. 한·미 FTA는 노무현 대통령(혹은 정권 핵심부)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기획·설계한 ‘양수겸장의 통치게임’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1. 미국과 협상이 잘 풀려 FTA가 체결되면? 최상의 결과다. 노 대통령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2. 협상이 잘 안 되면? 이 경우가 핵심인데, 음모론엔 노 대통령이 ‘자주’를 내걸고 협상을 깨고 나가 대반전의 승부수를 던질 것으로 그려져 있다. 미국의 가혹한 개방요구로 분출될 반미(反美) 후폭풍을 ‘제2의 미선·효순양 사건’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버전에 따라 청와대의 무게중심이 2번에 실려 있다는 얘기도 있고, 노 대통령은 진심으로 FTA를 바라는데 주위 실세들이 딴 생각한다는 설도 있다. 요컨대 이 정권은 FTA를 꼭 성공시키겠다는 사활적 의지가 없다는 게 음모론의 요체다. 상황이 달라지면 ‘역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증거 없는 추측투성이의 얘기이나,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까닭은 있다. 음모론이 사실 여부를 떠나 실제로 FTA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FTA의 홍보 역할을 맡은 관변단체 임원 A씨는 이렇게 실토한다.
“시키니까 총대는 멨지만 솔직히 어디까지 뛰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척후병으로 선발된 것은 영광스러운데, 너무 앞서 뛰다가 ‘본대(本隊·청와대를 지칭)’가 퇴각해버리면 우리 신세는 뭐가 되나.”
FTA 협상을 측면 지원하는 경제부처 과장급 관리 B씨는 ‘노래방’ 비유를 들었다.
“상관이 시키길래 마이크 잡고 열심히 FTA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상관이 딴전 보고 있다면 얼마나 머쓱하겠느냐.”
노 대통령이 열정적으로 한·미 FTA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의지를 피력하는데 왜 이런 딴소리가 나오는가. 관료며, 학자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음모설에 솔깃하는 것은, 노 대통령 말과 달리 청와대 주변에서 발신되는 신호음이 헷갈리기 때문이다.
한·미 FTA란 안보동맹에 버금가는 구상이고, 미국과 경제 공동체가 되겠다는 결심 없이는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6자 회담·탈북자·평택사태 초기대응 등에서 엿보이는 정권 핵심부의 코드엔 아직 반미 색채가 강하다.
게다가 부동산·강남 문제 등에서 보듯, 정권의 포퓰리즘 코드도 여전하다. 미국이 온갖 개방압력을 쏟아내고 국내 업계의 반발이 폭발할 때 노 대통령이 과연 인기 없는 FTA를 고수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FTA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해야 마땅할 경제학자들조차 선뜻 찬성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저명 경제학자 C교수는 자신이 음모론을 믿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안에서 FTA의 득실 분석조차 제대로 안 돼 있다더라. 준비 안 된 상태에서 1년 안에 협상을 끝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음모론에 끌릴 수밖에.”
FTA 지지 그룹, 그리고 우군(友軍)이 돼줘야 할 경제학자들조차 갸우뚱하게 만드는 한·미 FTA의 앞날은 참으로 험난하다. 해법은 청와대가 FTA에 대한 진심을 확신시켜주는 것뿐인데, 노 대통령은 시중에 파다한 음모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