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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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지인의 극찬을 통해 알게 된 <장미의 이름>, 하지만 그 삼엄한 분위기와 함께 일천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쉬 들지 못했던 책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책장속의 소품으로 놓아두기에는 ‘에코’라는 대작가를 너무 홀대하는 일인지라 이번 연휴를 맞이해서 책을 들었다.
따뜻한 방바닥, 스탠드 불빛아래 이불을 펴고 가장 편한 자세로 엎드린 체 오랜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장미의 수도원으로 향한다.

수도원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 실낱같은 흔적을 뒤쫓는다. 낙숫물이 떨어지는 수도원의 지하통로를 지나는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마치 셜록홈즈가 되어 사건을 추리하는가 하면 제갈공명이 되어 범인을 추적할 전략을 듣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서관을 탐험할 때는 마치 영화 <큐브>를 연상하게 된다. 큐브(정육면체의 방)의 각 면에 접한 방은 탈출구인 동시에 생명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함정이었던 것처럼, 화학약품과 특수 장치를 이용해 외부인의 접근을 막아온 장서관의 각 방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비밀공간처럼 다가온다.
결국 수도원과 장서관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번의 나팔소리처럼 인간의 집착과 교회속의 모순을 하나씩 태워 버린다. 책장의 한 귀퉁이가 시커멓게 타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로 맹렬하게 타오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치밀하지만 무엇보다 그 사건을 풀어가는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가 돋보인다.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결말을 얻기까지의 가설과 추론의 미묘한 심리가 제자(아드소)와의 대화에서 슬쩍 비쳐진다. 그래서 오락영화의 ‘만능주인공’ 같은 진부함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다.
거기다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과정에서 보이는 저자, 에코의 박식함에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인문학적인 지식은 물론 철학과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해 다양한 설명과 논리들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어 책의 날개지에 장식된 “저명한 기호학자이며,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볼로냐 대학의 교수”라는 말이 헛것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초반부(상권)의 지나치게 장황하고 치밀한 종교적 설명 때문에 로마교회와 기독교, 성서와 요한계시록 등의 기본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화려한 액션장면 전의 지루한 상황설명이나 이어폰 밖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잡음처럼 건성으로 넘긴 부분도 꽤 많았다. 굵직한 사건의 사이마다 자꾸 책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움베르토 에코’는 내게 너무 어려운 존재인가?
책 뒤표지의 “스트레가 상, 메디치 상 수상작”이라는 문구를 보자 이 책의 진정한 깊이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하는 부끄러움도 들지만 우선은 이것으로 만족하자! 언제고 기독교와 성서에 더 많은 관심과 지식이 있을 때 다시 정독해 보리라 생각하며 다음 책을 꺼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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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2006-06-1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에 나오는 중세 기독교의 이단과 정통에 관한 풍부한 역사적 사실은 주석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어, 꼼꼼히 따라가기만 한다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많이 어려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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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
오래전에 잊혀진 옛사랑의 추억이라 밀쳐버렸지만
사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쥰세이와 아오이.
쥰세이는 밀라노에서, 아오이는 피렌체에서
서로를 잊었다고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서로의 기억은
두 사람의 시간과 거리를 넘어 공존한다.

냉정한 현실에 가려진 과거의 열정을 찾아내는,
명화의 원색을 복원하는 쥰세이의 작업처럼
그들의 묵은 마음도 서서히 세정되어 간다.

하지만,
열정 속에 잠재되어 있는 냉정의 씨앗처럼
새로운 만남은 늘 현재의 이별 위에서 자라나고,
시리고 아픈 가슴을 달래듯이 아오이는 목욕을 한다.
또 한번의 이별을 감수하며 서로의 공간을 확인한다.

파란 표지에 담겨진 쥰세이의 이야기,
빨간 표지에 담겨진 아오이의 이야기.
두 연인을 오가며,
두 책을 오가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창가에 부서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나는 쥰세이가 되어 아오이에게 글을 쓴다.

"혹, 우리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가더라도
 나, 쥰세이는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어.
 당신에 대한 믿음,
 그 하나만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사랑해, 아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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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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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몰랐기에 쉬 손에 잡히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독서토론회를 한다는 광고와 이 책을 설명해놓은 문구에 호기심이 동해 진열된 책을 골라들었다.

소외된 이웃들의 이야기를 연작형식으로 담아놓았다.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펼쳐지는 비주류계층의 인생이랄까...
하지만 각 단편들은 ‘연작을 위한 연작’들처럼 억지스러워 보인다. 연작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급조된 듯한 우연이나 소설가의 작위적 설정 등이 소설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다루는 데는 지나치게 도식적인 형식은 아닐는지.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아픔이나 삶의 애환이 잘 표현되지 못하고 겉도는 듯 보인다. 인물설정과 배경묘사가 특정 형식을 그대로 답습해놓은 정형화된 단막극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그들의 입장에 서보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나만의 이질감인가? 책을 소개한 문구에서 봤던 “겪어보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을 잘 그려놓은”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소설’ 이상의 의미로는 와 닿지 않는다.
어쩌면, 난 그들의 색다른 경험과 이야기에 웃고 우는 일회성의 관객은 아닐는지. 막이 내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유랑을 떠날 것이고, 무심한 관객이었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대로 살아갈 것처럼...

난, 번잡한 일상에서 타인의 일상까지 보듬을 여유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현실의 수레바퀴에 갇혀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걸까. 무감각하게 책을 읽는 내 모습과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 사이에서 설명하기 힘든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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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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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 은빛 장판 위의 여행 가방, 가이드북, 카메라, 그리고 구석에 널브러진 속옷들. 여행의 여운을 뒤로하고 책을 읽는다.
엎드린 작은 방, 몇 해 전에 준비한 스탠드는 하얀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을 발하며 책읽기를 돕는다.

#1.
사실 잠이 오지 않아 펼쳐들었다. 스토리 중심의 책이라기보다 장면과 대화, 그 속의 은밀한 흔적을 찾아가는 조금은 새로운 형식 - 다시 말해 잠.오.는. 책인 것 같아 수면제 대용으로 펼쳤다. 하지만 짤막하게 이어진 상황과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 속으로 금방 빠져들었다.
새벽이슬이 내리는 습한 골목길을 뚜벅거리며 걷는 느낌? 스쳐지나가는 옆 사람에게서 엿듣게 되는 - 나와 상관없어 뵈지만 괜스레 흥미가 가는 그런 대화 같다고 할까. 은근히 몰입하게 만드는 장면이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인물들이 날 훔쳐보는 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든다.
싱숭생숭한 새벽의 기분과 맞아떨어진 ‘어둠의 저편’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2.
문득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쓴다.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느낄 수 있다고...
다시 ‘어둠의 저편’으로 걸어간다.
공간을 뛰어넘는 시점과 일상적이지만 상반되고 미묘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그녀에게 띄우는 편지처럼
알 수 없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는 그 무엇을...

#3.
사랑, 열정, 욕망 and 인식과 의식.

#4.
“영화의 장면들처럼 마리와 에리의 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작가는, 더 이상 판단하고 조정하는 전통적인 저자가 아니다. 그는 권위적 입장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소설이 영화처럼 쓰였으니, 독자도 판단을 보류하고, 카메라를 따라 천천히 가는 수밖에 없다.”
- 권택영 (‘어둠의 저편’을 위한 감상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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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인간 - 전2권 세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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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닭갈비와 양배추를 적당히 섞어 지글지글 뽁아 먹는 그 맛, 그리고 소주한잔... 은은한 달빛 아래서 맘 편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아쉬운 대로 <장외인간>이나 읽으며 허기진 가슴을 채우련다.

달과 함께 사라진 소녀와 우연히 만난 범상치 않은 노인, 그리고 ‘금불알’이라는 닭갈비집을 운영하는 시인지망생을 중심으로 ‘달 실종 사건’을 맛깔스럽게 그려놓는다. ‘달’과 ‘닭’의 한판 명승부전이랄까.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처럼 ‘달’은 도시의 삭막함에 의해 사라져버린 정신적 가치, 예를 들면 이상이나 꿈, 낭만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달 따위에 신경 쓰기보다는 먹고 싸는, ‘닭’과 같은 물질적인 가치에만 집착하고 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인지라 현실적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지만 어느 정도는 정신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시인지망생 이헌수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스스로 ‘장외인간’이길 자처한다.
“내게는 바깥세상이 개방정신병원이다. 정체성과 가치관을 상실해 버린 정신병자들이 자신을 정상인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아수라장이다. 온갖 부조리와 흉악범이 난무하는 저 동물의 왕국에서 정상인이라면 어떻게 태연자약하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내게는 퇴원수속이 곧 입원수속이나 다름이 없다.” (2권, p171)

하지만 후반부에는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바뀐다. 현실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가상의 세계로,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순식간에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포장마차에서 닭갈비를 먹고 있다가 일순간에 달빛아래, 선계로 이동해 버린 듯 얼떨떨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특성에서 볼 때 그리 엉뚱한 것만은 아니다. 도(道)와 술(酒), 백발의 노인, 일상의 소소함과 대비해서 엮어놓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이나 무릉도원과도 같은 이상향으로의 귀환 등 외수님만의 독특한 색깔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래서 약간은 식상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옛 외수님을 되찾은 듯한 생각에 반가움이 앞선다. 최근 작품들에서 봤던 밍밍한 이야기가 아니라 초기의 작품들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다시 전해지는 것 같다. 세상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투정꾼에서 좀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가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근작들에 비해선 상당히, 외수다운 외수책!

술도 좋지만 우선은 커다란 보름달부터 보고 싶다.
설사, 구름에 가려 그 존재마저 희미하더라도
달은 여전히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보듬고 있다.
기다리련다. 둥근 달이 차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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