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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장애인이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를 대놓고 차별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차츰 깨달아 갔다. 나는 늘 하나의 풍경인 것 같았다." (p19)  
   

 그는 스스로를 '풍경'으로 묘사했다. 유심히 보지 않고는 그 존재감마저 모호한 연극무대의 소품이 되어 버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부족할 청소년 시기를 장애와 씨름하며 보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골형성부전증을 앓았다. 약간의 충격에도 뼈가 쉽게 부러졌고 몇 번의 골절과 수술을 거치면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들어간 재활원에서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을 배웠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보살핌으로는 결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재활원에서 고등부로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특수시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심했고 힘겨운 싸움 끝에 진학에 성공했다.

 일반 고등학교는 재활원이나 특수학교와 같이 장애인을 위한 공간은 물론 아니었다. 평범한 공간 속에서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동안 누려왔던 편리함과 외부적 지원을 스스로 벗어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주변의 시선과도 직접 맞닿으려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에 당당하게 맞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별난 시선과 싸우며 세상과 부딪혔다. '슈퍼 장애인'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였고 모든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친구 명륜이를 통해 알게 된 인간관이 인상 깊다.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고 게임과 운동밖에 하는 것이 없어 보였던 그를 통해 장애와 비장애, 혹은 그 이외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람 사이의 융화는 머릿속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헌신과 배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세상에 대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는 명륜이와 함께 보낸 고교 생활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했고, 사람을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p106)  
   

 그는 일반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던 고등학교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드넓은 캠퍼스와 수많은 건물을 오가는 대학생활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장애인에게는 모든 것이 힘든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움직였다. 사회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나 '이동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이를 계기로 '장애인권연대사업팀'에 들어갔다. 이 활동을 통해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와 나의 부모가 져야 할 전생의 '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애인은 병원이나 수용 시설에서 살아가야 할 '환자'가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장애인도 세계 속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주체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장애를 사회적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 치료사나 사회복지사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장애가 단지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이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이 전 세계의 장애인 운동과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성취한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p129)  
   

   
   "그랬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장애인이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생물학적 손상은 이미 그 자체로 몸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결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손상된 몸에 부여된 사회적 차별을 극복한다는 의미였다. 전공 책을 옆에 끼고 다니고, 높은 학점과 토익 점수를 따서 '정상적인 사회'의 중심에 서고 싶었던 나를 포함한 많은 장애 학생들은, 그때야 비로소 장애인이 되었다." (p139)  
   

 그는 자신의 장애를 또렷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닌, 비장애인의 구분되는 수직적인 관계도 아닌 그저 '장애인'일 뿐이었다.
 장애에 대한 그의 자각은 그 어떤 선언보다 가슴깊이 와 닿는다.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건 노인이건, 학벌이 높든 낮든,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마주하지 못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희망이 현실을 왜곡할수록 자신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져갔고 급기야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과거나 미래, 상대방과 비교하며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만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신, '현실'이라는 가르침이 날카롭게 날아온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장애인들의 각성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이방인 취급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불행 속에 갇혀 지내는, 항상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특별한 존재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런 시선이 장애인을 더욱 움츠려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장애를 더욱 고립되게 만드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비장애인과 분리된 특수교육은 그들의 사회진출을 영원히 차단할 뿐만 아니라 (일부겠지만) 장애인 시설의 인권침해나 회계부정도 여전히 존재한다. 재활원 방문을 개인의 선량함을 과시하는 공연장으로 이용하는 곳도 적지않다.
 우리는 사랑으로 나서는 봉사활동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우월함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순과 비합리를 숨기기 위해 은연중에 장애인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너와 나, 혹은 장애인에 대해 더 이상 둘러말하지 말자. 장애인은 장애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실을 마주하고 솔직하게 마주하자. 장애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각성제처럼 느껴진다.

 물론 사회의 벽을 과감하게 깨뜨린 그에게도 아무런 갈등이나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냉철하게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 이면에 감추어진 이중성이 드러났다. 이제는 제법 '잘나가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 하는,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회적 차별과 장애인의 인권을 외치면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장애의 벽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나의 중첩된 사회적 위치와 정체성은 그 모든 것에 일정한 책임감은 느끼지만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않은 채 서로를 회피하고 있었다. 장애인인 나는 일반적인 이십대로서의 삶에 공감하지 않으려 했고, 대학을 다니는 이십대의 나는 장애인인 내 존재에 몰입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내가 그 모든 정체성이 겪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과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했지만, 어떤 정체성도 진심으로 살아낼 수는 없게 했다." (p256)  
   

 어쩌면 쿨함과 쫀쫀함, 장애인과 비장애인, 슈퍼 장애인과 인간 김원영 사이에서 선 그의 갈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지 싶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면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부른 이유를 철저하게 통감하게 된다. 장애 문제를 떠나 인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나와는 열 살 가까이 어린 나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크고 우람해 보인다. 그의 앞길에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장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열린 마음을 우리 사회에 기대해본다.


* p.s
 참, 그의 책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총 여섯 개로 구분된 각 장이 독립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엮여있어 부드럽게 이어진 언덕처럼 자연스럽다. 한두 가지 소소한 일상의 끈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모습이 여느 글 못지않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독서 때문인지 글을 꾸려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식적이지 않고 번잡하지 않은 글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고 자유롭지 못했던 육체는 정신의 자양분이 되어 글로써 날아다녔다. 그의 정신 못지않게, 그의 글에서 또 한 번의 감동을 맛본다.
 화이팅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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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볼프강 조프스키는 말했다. 인간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를 형성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만드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유지하는 것이지 않던가! 기존의 질서에 방해되는 일탈자를 구별해내기 위해 규율이 만들어졌고 공익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사람들을 억압했다. 가중되는 억압은 폭력으로 변형되어 우리를 짓눌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이 필요했다. 결국 육체적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사회와 질서가 폭력을 만들었고 이것이 다른 폭력을 유도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특히, 폭력의 해방구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강요로 인해 폭력이 태어났다는 말이 인상 깊다. 오랜 시간 버텨온 우리사회의 금기를 들켜버린 것 같은 조바심마저 들게 된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법률과 무기가 만들어졌지만 이 또한 거대한 조직에서 소수에게 행할 수 있는 폭력의 한 종류는 아닐까. 본인의 자유 의지와 상과 없이 타인의 논리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지 싶다. 순간, 무감각하게 살아온 우리의 일상이 억압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것 같이 느껴진다.
 또한 우리의 문화에 대해서도 폭력을 유도하는 원천이며, 그 결과라고 말한다. 불완전한 육체에 영속성을 주기 위해 각종 문화가 탄생되고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해 줄 것만 같은 문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자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탈바꿈해 버린다. 우리가 향유하고 있던 것들이 어쩌면 폭력의 잔영일수도 있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지금 쓰고 있는 컴퓨터와 아침에 타고 왔던 자동차 역시 노동이라는 집단폭력의 한 결과물일수도 있고 가족 간의 따뜻한 대화역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는 사실!
 공익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기계처럼 일했지만 사소한 잘못에도 생활을 위협받았다. 언제 치고 올라올지 모르는 동료와 후배들은 가족의 행복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고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문서는 모처럼 잡은 가족 나들이를 방해했다. 회식은 침대에 몸을 맞추듯 주어진 금액을 넘지 않아야했고 보이지 않는 눈치는 술잔은 무겁게만 만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금은 과장되게 보일수도 있지만) 일상이 어쩌면 거대한 폭력의 한 조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물론 이런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이면에 감추어졌을지 모르는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책은 폭력의 원리를 기본으로 무기, 격정, 불안, 고문, 광기, 사형, 전투, 사냥, 학살, 파괴 등의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서도 냉철하고 차분하게 분석한다. 폭력의 원인과 결과, 여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고통을 차례로 설명하고 인간 심리 깊숙이 숨어있는 무의식의 습관들을 철저하게 까발린다.
 각종 계략과 무기, 고문을 통해 사람을 죽이고 신체의 일부를 유기했다. 사형과 전쟁이라는 공인된 살인을 통해 군중을 자극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폭력 레이스는 내 감각을 무디게 점점 만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저자거리의 휴지조각처럼 하찮게 느껴지고 그 의미마저 모호하게 다가온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불편함이 눈을 거북하게 만들었고 잔혹한 폭력 영화에 열광하는 오늘날처럼 내 몸의 심장도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멈출 줄 모르는 폭력의 홀로코스트에 현실이라는 완충재가 없었다면 책읽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의 인과관계와 그 잔혹함이 무섭게 느껴진다. 어쩌면 과거 우리의 정치사도 이러한 길을 걸어왔기에 남의 일처럼 흘려들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협박과 폭행, 감금과 고문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아 왔고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우리를 괴롭혔고 대화와 절차를 무시한 주먹구구식의 행정이 세상을 뒤덮었다. 이렇게 삐뚤어진 톱니바퀴를 맞추기 위해 등장한 것 역시 폭력이다.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미군과 중동지역의 관계를 연구하는 전쟁 전문가나 인간의 폭력성에 관심을 갖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인간 이면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관찰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다. 어쩌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 불안, 절망, 고통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접근해봄으로써 폭력의 영향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 질 수 있지 싶다. 물론 이런 체계적인 접근도 폭력의 근원적인 원인이나 현실적인 어려움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확대되는 것을 막아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나친 하드코어는 책 읽는 목적을 의심케 했다. 피가 낭자하고 사지가 날아가 버리는 참혹함이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폭력의 잔혹함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확인하고 끄집어내는 계기로 작용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도 앞선다.

 인문학, 조금은 낯설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자칫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삶의 부분들을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보는 토대가 될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이해관계에만 집중했던 신경을 좀 더 넓은 곳으로 확장시켜보면 어떨까. 언덕에 올라 숲을 보듯 인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인문학의 진정한 힘은 일상과의 적당한 거리감에서 오는 통찰에 있지 않을까 싶다.


- p.s.
 번역의 매끄러움은 늘 감탄스럽다. 번역이나 외국어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이 좋은 번역인지 느끼게 된다. 저자의 의도를 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리를 최대한 낮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역자의 능력이라 보고 싶다.
 <폭력사회>는 외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과 깊이가 책 전반에 가득한 것 같다. 저자의 냉철한 분석력도 돋보이지만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 전달해놓은 번역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두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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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4-0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리뷰 괜히 읽었는데요. 사고 싶어집니다.
 
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라고 하면 일단 어렵고, 난해한데다 일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구름 속의 학문’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내가 심취했던 몇 권의 명상 관련 도서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그저 교과서에나 한번 나올법한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막연하게 흘려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을 쉽게 풀어놓았다는 소개 글을 보고 초보적인 인문학 공부는 물론이고 <자본론>과 같은 고전에 대한 기초지식도 쌓을 겸 구입했었다.

 <철학 콘서트>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석가, 공자, 예수, 노자, 마르크스 등 이름만으로 우리를 위축되게 만드는 사상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험을 위해 외웠던 철학자와 저서가 머릿속에서 남아있기에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각 철학자의 주장과 사회적 배경을 듣자 내가 너무 철학을 막연하게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짚어보게 되었다.
 여기서는 철학자의 저서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황을 통해 그가 주장한 핵심내용에 접근한다. 한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 가운데 등장한 것이 철학이고 사상인데, 그런 통찰 없이 이해하려다보니 철학이 어렵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또한,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서, 사회학 혹은 경제학 관련 전문서적들도 줄줄이 만나볼 수 있다. 물론 <도덕경>(노자)처럼 해설서로나마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면이다. <논어>(공자)는 한문 수업에 조금 공부했던 기억이 있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크리톤>, <파이돈>, <국가>나 <반야심경>(석가), <성서>(예수), <성학십도>(이황), <유토피아>(토마스 모어), <국부론>(애덤 스미스), <자본론>(마르크스)과 같은 경우는 교과서나 텔레비전 퀴즈쇼에서나 들어봤던,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난해한 '경전'과도 같았다.

 하지만 <철학 콘서트>를 읽으면서 고전에 대한 중압감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간단 명로하고 재치 있는 말투는 철학이라는 어려움을 일상의 언어로 쉽게 풀어낸다. 독자는 그저 흐르는 계곡에 띄어진 낙엽처럼 몸을 맡기면 그만이다. 주변으로 스쳐지나가는 철학의 언저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공부가 된다.
 책을 읽을수록 저자 황광우 님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 뒤표지에 보면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는데 어디서 이런 통찰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거기다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들을 이토록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가 다 이를 설명할 수는 없을 진데 저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해치워버렸다. 오랜 관심과 노력으로 이룩한 그이 해안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어렵다. 글은 쉽지만 철학이 갖고 있는 원리를 이해하기는 나의 무지가 너무 크다. 수백 페이지의 형이상학적 언어로 구성된 철학서를 몇 페이지의 해설서로 마스터한다는 것은 너무 배부른 소린가?
 어쩌면 한번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철학이라면 그 깊이는 지금과 같이 않았으리라. 도달할 수 없는 더 깊은 곳으로의 사유, 그 사유 속에 철학이, 인생의 깊이가 숨어있지 싶다.
철학,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흘려보내기에는 소중한 울림이 너무 많다. 비록 당장의 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세상과 물질, 우리와 나를 둘러볼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지 않을까. 깊은 사유 속으로 나를 던져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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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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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출판된 역사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이 ‘한홍구’일 것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반드시 최고라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와 같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한 발 비껴 있었던 분야가 사람들의 입에 새로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나 비교적 근래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안티’들의 불편한 심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지 싶다.
 무한스피드 사회에서 과거의 일을 회고하고 반성해 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직접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 정확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거기다 우리가 배웠던 암기식 교육으로 인해 역사라는 것 차체를 고리타분한 학문의 범주에만 가둬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역시를 보는 시각도 삐뚤어져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제한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한홍구님이 써내려가고 있는 한 줄의 역사(책)는 우리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역사’이지 싶다.

 사실 한홍구님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근현대사 관련 글을 엮은 <대한민국史(사)>로 <한겨레21>에서 5년간 연재한 글을 엮었는데 촛불집해니 용산사태니 하는 혼란한 정국과 맞물려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4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굵직한 사건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되었기에 관심 있게 지켜봤었다. 그 와중에 출판된 책이 바로 <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이다. 2008년 이뤄진 강좌를 책으로 옮긴 것으로 이전의 4부작과는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여 선뜻 구입해버렸다. 그가 말하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최근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보고 그의 생각을 가름해보고자 했지만, 사실은 ‘역사’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부담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우리 역사도 제대로 읽어 내려가지 못할 것 같은, 무식이 탄로 날 것 같은 두려움, 혹은 부끄러움도 한 몫 했었다.


 1. 역사의내전,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뉴라이트, 신보수주의라 해야 할까,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의 득세로 좌익은 몰살되다시피 했고 그 틈을 노려 한국의 대표우익으로 자리매김해온 현실을 개탄한다. 제대로 된 우파가 없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 계산에 의해 급조되었다는 뉴라이트!
 최근 촛불시위와 맞물려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호국집회 역시 국가라는 거대 권력을 내세워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지나치게 간섭하려는 편협한 애국주의는 아니지 되돌아본다. 보수진영은 진보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과 반성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만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2. 간첩이 돌아왔다, 잊혀진 추억이 현실로
 군대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간첩이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그 많다던 간첩들의 대부분이 허술한 조작사건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중앙정보부, 안기부와 같은 집권층이 꾸며낸 이야기에 익숙해져 우리의 사고도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부지불식간에 전이된 우편향적 모순점을 여실히 드러난다.

 3. 토건족의 나라, 대한민국은 공사 중
 박정희 시대부터 앞뒤 안보고 달려온 토건국가를 비판한다. 관(關)이 연합해 땅을 매립하고 도시를 계획한다. 뒷돈을 주고 캐낸 정보로 땅값을 굴리며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이렇게 우리는 땀 흘리지 않고 부자 되는 법을 너무 쉽게 알아버렸다. 힘들게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근시안적으로 파헤치는 강산에서부터 우리시대를 휘감고 있는 투기 열풍까지 부에 대한 삐뚤어진 열정을 비판한다.

 4. 헌법 정신과 민영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묻는다
 "결국 공공성 부분이 사라지고, 노동 강도가 더욱 세지고,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동시에 민영화의 본질인 수익 창출을 위한 전기, 가스, 수도, 교통 요금 등 국민들의 기초생활 부분들이 터무니없이 비싸지겠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민영화인가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무한경쟁을 모토로 내건 사업들이 줄기차게 벌어진다. 나 아니면 적이 될 수밖에 상황이다 보니 공공의 편익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만 집착해 온 것도 사실이다. 누구를 위한 정책이고 누구를 위한 기업인지 살펴본다.

 5. 괴담의 사회사, 여고괴담에서 광우병 괴담까지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소문은 인터넷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그 영향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작은 견해차에서 비롯된 오해일지라도 수십만 건의 댓글과 악플을 통해 괴담으로 발전되어 사회와 여론을 움직이고 사람을 죽인다. 한홍구님은 이런 괴담마저도 즐길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될 것을 주문한다.
 "무조건 없애려고 할 게 아니라 괴담을 만들어내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따라갈 때 괴담은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괴담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 더 신나는 일들이 많을 때 괴담은 줄어들 겁니다. 괴담은 그저 괴담으로, 이야기로, 우리가 가볍게 소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민주화와 정보 공개를 통해 풀어가야 합니다."

 6. 경찰 폭력의 역사, 일본 순사에서 백골단 부활까지
 일제 강점기 이후 경찰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정책과 맞물려 경찰이라는 공권력으로 계속적인 힘을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런 모순 속에 시작된 경찰은 스스로의 허물을 벗어버리지 못한 체 몇몇 집단의 행동대원으로 일선에 나서며 군대로까지 그 ‘폭력’의 영역을 확대했다.

 7. 사교육 공화국, 잃어버린 교육을 찾아서
 딜레마에 빠져버린 우리나라 교육을 살펴본다. 공교육은 무력화 되고 사교육은 거대한 공룡으로 증식하면서 권력세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을 개탄한다. 또한 전교조 등 교사 집단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친 왜곡과 과장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학교라는 존재를 규제와 억압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하거나 지식교육의 가치를 등한시한 체 교육의 표면적 평준화에만 초점을 맞춰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게 마음에 안 들고, 심지어는 학생을 가르친다는 교육의 본질적인 면까지도 공교육의 병폐라며 매도하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한홍구님의 말대로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점도 많고 고칠 점도 많다. 하지만 교육현장에서의 노력들을 평론집에나 쓰일 논리로만 저울질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다.

 8. 촛불, 몸에 밴 민주주의의 역동성
 1987년 6월항쟁부터 오늘날의 촛불시위까지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들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특히 현장에 뛰어든 학생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의미를 찾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강구한다.
 사실 나는 촛불시위에 참가한 적이 없다. 물론 호국시위도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촛불을 들고 거리고 나서지도 않았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 한 몫을 했지만 그보다는 대중 집회가 갖고 있는 선동성,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의 생각을 끼워 맞추고 논리화시키는 집단화에 반신반의한 것이 사실이다. 나 스스로도 명확한 기준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이끌려, 학생들이 나서니 나도 가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촛불이라는 몽환적인 이미지에 이끌려 달려가기에는 내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거리에 나섰던 그들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진지함을 빙자한 나의 비겁함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손에 피어난 한 송이의 촛불이 모여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힐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단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섣부르게 말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행동이 갖고 있는 힘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이나마 진지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무지 때문에 <특강>을 읽고 있지만 말이다.


 역사에 대해 강준만 교수님의 책은 몇 권 꾸준히 읽어 봤지만 특히 이런 진보적 색체가 강한 글은 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사실 진보를 넘어 체제비판적인 글이 주를 이루는 소위 ‘빨간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긴 이것 역시 기존의 틀을 유지해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보수진영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진보보다는 보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개혁보다는 안정을, 무엇을 얻으려하기 보다는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럴수록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더 필요하지 싶다.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어느 쪽으로 치우쳐버린 편협된 생각이 아니라 상하좌우의 장단점을 두루 살피고 행동하되 그 중심은 언제나 사람,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넓은 시선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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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스펜서 존슨
스펜서 존슨 지음, 이혜승 옮김 / 청림출판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쌍둥이라는데... 어떻해~”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들뜬 목소리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근심과 걱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첫째아이 돌을 지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쌍둥이라니. 물론 ‘쌍’이 갖고 있는 ‘Double(두 배)’의 기쁨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세 명의 아이를 누가 돌보며 이들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양육비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하지만 막상 쌍둥이들이 태어나자 이런 외적인 어려움보다는 어린 쌍둥이 동생을 마주하게 된 첫 아이에 대한 문제가 더 급하게 다가왔다. 어린 두 동생을 때리고 꼬집는 것은 다반사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떼를 쓰고, 고함을 지르는 등의 행동이 두드러지게 잦아졌다. 물론 부모의 사랑을 나눠 갖는 것에 대한 첫째의 질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화내고 야단치며,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커가는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변화된 것은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문득 내가 자녀에 대해 너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정작 그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봤다. 

 “그래, 사랑하는 방법을 공부하자.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이렇게 읽기 시작한 <부모>는 이전에 봤던 육아 관련 서적과는 접근방식부터 달랐기에 그 느낌도 자못 컸다. 자기 계발서로 유명했던 스펜서 존슨의 글이라 더 의미 있었는지 모르겠다.
 책은 일상에서 간단하게 적용할 수 있는 ‘1분 교육법’을 강조한다. 1분 목표, 1분 칭찬, 1분 훈계와 같이 얼핏 들을 때는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 같았지만 그 가치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예화를 바탕으로 되짚어 본다.
 1분 목표, 먼저 아이에게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게 한다. 단 1분 이내로 읽을 수 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삶이란 지도 없이 먼 항해를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그 목표의 중요성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정확한 목적지도 없이 어찌 제대로 된 출발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1분 목표는 좋은 시작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목적 달성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보게 만든다.
 1분 칭찬, 아이의 잘한 점을 찾아 적극적으로 칭찬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했고, 어떤 점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했는지 자세하게 말해준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책 제목처럼 한마디의 칭찬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잘한 점을 찾아 칭찬해 줌으로써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고, 긍정적인 생활방식을 키우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를 통해 장점은 더 발전시키고, 단점은 극복될 수 있도록 내적 강화를 줄 수 있으리라.
 1분 훈계,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명확한 표현으로 즉시 훈계한다. 이때 아이의 가치는 존중해 주되 잘못된 행동만을 훈계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결과가 있게 마련인데 이를 잘 활용한다면 또 한 번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나이기에 주위의 엄마, 아빠가 도움은 필수적인 것 같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아이를 야단치다보면 잘못한 행동 이외의 모든 것까지 부정하고 단죄하려는 경향이 있다. 꼭 아이의 잘못만을 훈계해야지 아이의 존재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꼭 안아준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되지 싶다.
 부모가 알아야 할 세 가지 지침뿐만 아니라 이것이 왜 중요한지도 자세히 일러준다. 우리가 미처 실행하지 못했던 단순한 교육법을 막강한 결과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목표를 통해 자신의 할 일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그 해결과정을 통해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칭찬은 아이들의 행동에 자신감과 확신을 주며 훈계를 통해서는 실수나 잘못을 바로잡아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문제를 미연에 해결할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아이들의 ‘자존감’에 귀결된다고 하겠다. 여러 연구물을 통해서도 알고 있듯이 “스스로를 좋아하는 아이는 바르게 행동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명심해야겠다.

 단순히 아이들의 교육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하고 읽었지만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엉터리 사랑이 아니라 부모도 아이들과 똑같이 웃고 우는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한 체계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 같다. 함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며 칭찬, 훈계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가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겠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어나서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고, 서류 정리하고 수업하고 보고서 만들고, 아침부터 시작되는 하루를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은 아닌지. 그저 사고 없이 하루를 버텨내야하는 하루살이처럼 생활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그날 할 일을 정해놓고 퇴근할 때에는 그날의 일을 정리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처세법이 없지 싶다. 그날의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으니 당연히 능률도 오를 것이고 흥미도 자연스레 뒤따라올 것이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또 얼마나 클 것이며 설사 실수가 있었다고 한들 다음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직장, 학교, 군대, 교회, 공사장, 어디하나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도 최고의 처세서가 아닌가 싶다.
 이제 막 세 살을 넘긴 첫째아이에게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두고두고 읽으며 음미해야겠다. 책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헬렌이 마지막에 강조했듯이 ‘오늘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 아내와 이웃들과 함께, 훗날에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읽어봐야겠다. <부모>와 함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점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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