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6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내가 3-4학년 즈음 배낭여행 붐이 일어서 그때부터 소설 창작 수업에서 아이들이 쓴 소설에 이국의 풍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난 과외를 세 개 정도 하던 때라 물론 그 대열에 동참하지는 못 했다. 해외여행을 못 간 것보다 그런 경험을 쓸 수 없다는 데에 더 좌절하곤 했다. 경험의 빈곤은 오래된 내 컴플렉스였다.

 

이십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게 되어 드디어 해외에 갈 명분이 생겼다. 태국의 한 휴양지였을 것이다, 아니. 필리핀이었나. 그때는 엄청나게 상처가 되었던 일인데 지금은 본래 어디를 가게 계획된 상품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는 게 신기하다.

 

당시 유행했던 결사모라는 카페를 통해 비교적 저렴한 패키지 상품을 예약했고 들떴다. 정신없이 식을 마치고 머리에 실핀을 수백 개 꽂은 채 공항으로 가서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서 이륙을 기다렸다. 그런데 출발은 하지 않고 기체 결함으로 점검이 있어야 하니 일단 내리라고 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신혼 부부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했고, 여행사는 부랴부랴 근처 속소를 제공했다.

 

다음날에는 그 무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누군가가 취재를 왔다. 저가항공의 문제 뭐 그런 주제였을 것이고 다들 기다리는데 난 가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 내가 예약한 상품이라 나 때문에 결혼 생활의 첫 출발을 공항에서 이렇게 난민같이 보내는 게 미안했다.

 

휴양지 풍의 원피스를 미리 차려입은 내가 여행가방을 끌며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과 남편이 황망한 심경을 담아 인터뷰하는 모습이 공중파로 방송이 되었다. (대체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왜 취재에 응한 것인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게 남편 학교 커뮤니티에 퍼져서 전화가 엄청 왔다. 그래도 신행은 가야 했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제주도 아무 호텔이나 예약하고 택시를 대절해서 무려 2000년대에 80년대식의 신혼여행을 하고 왔다. 기사님이 천지연 폭포나 섭지코지 같은 데 내려주셨고 심지어 식사도 같이 했다. 시무룩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찍힌 사진이 수십 장이나 된다. ㅋ

 

(인터뷰를 하고 나서 몇 시간 후 극적으로 비행기는 떴고 같은 무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중에 온라인으로 후기를 들었는데 공항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신혼 초에 한이 맺힌 듯 해외 패키지 관광 두 번, 자유여행을 한 차례 했지만, 해외여행을 만족스럽게 마친 기억이 별로 없다.

   

<여행의 이유>도 어쩌면 실패?로 돌아간 아니 조금은 실망스러운 첫 해외여행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가님이 운동권에 있던 시절에 대기업에서 중공 여행을 학생회 간부들에게 시켜준 적이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을 깨닫고 오라는 저의가 분명한 수상한 그 여행을 통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작가님과 후배는 우연히 만난 베이징대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인민의 삶을 고민하는 지식인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미국 유학을 갈 꿈에 부풀어 있었고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의견도 주지 않았다. 또한 여행 중 작가님은 교수님 뻘의 정보과 형사의 기념사진을 순수하게 호의로 친절하게 찍어주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인생의 경로를 진짜 미묘하게 바꾼다.  다 이야기하면 스포가 될듯하여 이만.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쪽

 

작가님은 해외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해외 곳곳에 머물며 글도 쓰셨고 여행도 많이 하신 걸로 유명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알쓸신잡이라는 여행예능도 하셨기에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주시리라 기대하며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책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가 처음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 품었던 기대와는 다른 내용이 전개된다. '여행'보다는 그렇게 기를 쓰고 여행에 나섰던 '심리적 근원'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한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국민학교를 해마다 다른 지역에서 다녔고 새로운 곳에서 잘 받아들여질까 두려워하고 받아들여졌을 때 안도하던 그 경험이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는 것이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감이 간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는 하지만 집안은 실은 노동의 공간이자 상처를 안은 공간이기도 하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63쪽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64쪽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65쪽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87쪽 인용

 

다른 장에서도 여행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있지만, 내가 주중에 근처 카페를 찾는 이유와도 통한다. 이후로도 책에 무수히 서표를 붙여두었는데, 아마 여행하는 이유가 결국은 살아가는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목적을 분명히 한다고 했는데 막상 여행길에 나서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황당한 일을 당하거나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적대적인 시선을 받기도 하고 별로 한 것도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

<알쓸신잡> 촬영담도 흥미로웠다. '프로그램 제작과정이 보르헤스나 카프카의 소설처럼 기이하고 환상적인 구석이 있'다는 데에 놀랐다. 의심병 환자라서 사실 제작진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주고 작가들이 요소요소에 빵빵 터지는 대본도 주었으리라고 짐작했는데 그냥 진짜 출연자 각자가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하게 두었다는 데 놀랐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 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117쪽  

 

가족과 함께한 반려동물에 대한 '작가의 말'도 따스하다.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개와 고양이를 반려라고 생각하면 너무 애닲다. 무슨 반려들이 이토록 자주, 먼저 떠나는가.  (중략)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12쪽  

 

*

 

기대했던 은유 작가님의 신작도 천천히 읽고 있다. 내 생활과 너무나 맞닿아 있는 내용이라 그런지 조금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을 자꾸 건드리게 되니 그런가보다.

 

엄마들과 가벼운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언뜻언뜻 남편과 시가와의 일을 비추기도 하지만 대개는 영화, 드라마, 책, 주변 나들이, 아이들의 사소한 반항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덩달아 무거워지고 서로 짓눌리기 마련이니.

 

전에는 사오십대 아줌마들이 꽃놀이에 몰려다니며 과장되게 웃는 걸 질색했는데 요즘 내가 딱 그 모양이다. 며칠 전에 이 지역 유채꽃이 한창인 동네에 가서 걷고 초밥을 먹고 근처 핫플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유채꽃밭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남기려다 주변 아가씨들에게 부탁을 했다.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는 아가씨들은 물론 우리처럼 이렇게 사진을 부탁하지 않는다. 리모콘이 잘 작용하는 삼각대를 사서 친구들과 구도를 잡고 상큼하게 연사를 날릴 뿐. 

 

"아이가 태어나고,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이란 것을 알고 나면 그 생명을 키우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130쪽) 그것을 출산 전에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몰라서 낳는다. 그리고 키우면서 알아간다. 어디로도 도망칠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참 곤란한 관계를 출산과 양육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그 무수한 날들, 너무도 모질어서 존재가 공글려지는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은 자랐다.

 

56쪽  

우에노 지즈코 외,<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서식처를 옮기며 이 자리에 이르렀다. 여행자가 가이드북을 기초로 여정을 짜듯이 남편의 임지가 바뀌어 새로운 곳으로 갈 때마다 각 지역의 맘카페에 가입해 새로운 곳의 보육기관, 가게들, 성당, 도서관, 나들이 장소 등을 익히며 사람들을 알아가고 도움도 받고 실망도 하며 그렇게 그곳에서 몇 차례 계절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이전 지역에서 우리를 알았던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만큼 쑥 자라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 학교 문제로 남편이 이동을 하고 우리는 시가 근처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자리 잡혔다. 그래도 간섭이 심하지 않은 어머니여서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초기에는 여러 행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 받기도 해서 부담스러웠다.

 

누가 만든 명언인지는 몰라도 시집살이는 결국 남편이 시키는 것이라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내가 원하는 자리만 가는 편이다.   

 

 

*

 

<우주에서 가장 쉬운 어휘 1, 2, 3>은 아들 주려고 빌렸다가 늘 그렇듯이 내가 더 잘 읽었다. 뭔가 일본말 같았는데 의외로 '야로'가 우리말이구나.

 

야로 (冶爐) [야ː로]                                                             

[명사]
1. [같은 말] 풀무(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이외에도 얼마 전에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온 망고하다, 자몽하다, 오이하다 같은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어휘들이 실려 있다.

 

*

여러 책을 동시에 읽으며 페이퍼를 마무리하기 어렵구나.

휴일 아침이라 라면도 대령해야 하고.

 

책 읽다 보니 오래 전에 들었던 노래가 불쑥 떠오른다.

강건히 잘 계시겠지.

삶의 여정에서 이렇게라도 가끔 만나면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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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 이상은

의미를 모를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버린 새를 그려
새장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걸 아쉬워 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 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간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에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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