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주말 그리고 월화에 걸쳐 스산한 책들만 파고들었다.

 

미아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듣던 대로 명성에 걸맞게 단번에 읽어낼 수 있게 흡인력이 있었다.

 

읽다가 미사를 갔는데 마리코와 요시오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범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철저하게 순결한? 피해자라서 그런지 더 감정 이입되어 읽었다. 의연한 삶의 태도로 큰 감동을 준 요시오 할아버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내용 유출 주의)

 

아리마 요시오는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고, 대담한 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범인이 손녀를 방패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죽음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인만큼 추측의 범위에 두면 되는 것도 과감히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아무리 처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허황된 희망이나 낙관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1권    276쪽

 

1권에서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을 다루는 언론들의 행태가 소개된다. 2권에서는 가해자들의 성장배경과 가해자들에 대한 추적이 주를 이룬다. 3권에서는 범인의 검거와 뒷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검거 과정이 사실 그간의 엄청난 사건들에 비하면 좀 싱겁게 예측 가능하게 끝나는 면이 있다.

 

 

 

 

 

 

 

 

 

 

 

 

 

 

 

 

사회파 추리소설이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 여기저기 서표를 붙이며 읽었다. 1, 2권에 좀 많이 붙이다가 3권에 이르러서는 좀 맥없이 끝나는 감이 있어 별로 붙이지 않았다.

 

돈과 몸을 물물교환하면 뒤끝이 없다. (중략) 그러나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치아키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치아키의 생명을 담보로 그녀의 감정을 마구 흔들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키가 한 번도 가격을 붙여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값어치를 매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해, 비밀스런 공간에 간직해두고 있는 것일수록 더 비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소녀였다면 자신의 몸만을 돈을 받고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2권 85쪽

 

작가가 가출 소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단순한 몸의 거래가 아닌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존'의 거래다. 성노동자라는 말은 허울 좋은 말뿐 그렇게 자존을 심각하게 훼손해야 하는 노동이라면 노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이코패스인 범인들은 피해자의 내밀한 과거를 억지로 이야기하게 하고 가족들에게 나중에 알리고 조롱하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들이 전지 전능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든지, 사회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든지 그런 생각을 조롱하는 지향성?"

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보다도, 따분하지 않은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지향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잠깐 생각하고는 덧붙였다.

"응, 맞아.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3권 284쪽

 

히로미나 피스 둘 다 어린시절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들의 명석한 두뇌와 멋진 용모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데에 쓰고 만다.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잇다면 피해자도 납득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2권 203쪽

 

무고한 여성들을 희생시킨 '피스'는 악의 화신이었다. 

 

'피스'는 특히 자신이 모든 범죄를 기획해 연출하는 전지전능한 유일무이한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 자부감을 갖고 있다가 그것 때문에 파멸한다. 르포작가 시게코가 '피스' 역시 다른 범죄의 모방범일 뿐이라 몰아붙이자 생방송에 자신의 악행을 고백하고 만다.

 

'악'을 두고 독창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작업일게다.

 

이밖에도 미야베 미유키가 여성을 타켓으로 한 강력 범죄가 자주 일어날 때 여성들은 어떤 심리 상태가 되는지 그 불안과 공포를 잘 살렸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가장 공포스럽지 않은가?

 

 

 

 

 

 

 

 

 

 

 

 

 

 

 

 

 

오래 전에 받아둔 책이다.

 

이제야 다 읽고 나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모방범>에 비하면 잔혹함이 덜하지만 가상의 범죄보다 더 오싹하다. 평범한 인간의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 소소한 악이 더 무섭다. 악이라 믿지 않는 악이 더 무섭다.

 

교양 있고 지각 있던 장모가 딸을 잃고 사위의 불륜을 확인하면서 황폐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소름 끼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불륜에 빠진 대학교수가 아내와 여행을 떠나다 아내는 즉사하고 자신은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남아 (사위의 불륜이 기록된 딸의 유품을 확인한) 장모에게 학대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오기'.

 

'오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나, 잘못 적힌 것이라는 뜻이 있다.

 

다 읽고나니 주인공 이름에 대해 그 두 가지 해석 다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남이나 운명에 지기 싫어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잘못 적힌, 본래 쓰려던 것과는 다른 것을 써버린 듯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큰 사고로 장애를 입고 이렇게 생의 막다른 데까지 치닫다 보면 의사든 주변 사람이든 의지를 좀더 가지라고 한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은 '의지'로도 부족해 진짜 어떤 '오기'를 품고 끝까지 생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지만 결국 거대한 구멍에 빠지고 만다.

 

아프지 않았을 때는 마주칠 가능성도 없었던 교양 없고 양심은 더 없는 간병인의 살냄새와 감촉, 간병인의 망나니 아들이 입술에 축여준 싸구려 위스키에 감동하기도 하는 생의 아이러니라니.

 

간병인도 못 믿고 그 비용마저 아까워 장모가 직접 오기를 간병하면서 오기의 존엄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장모는 오기의 이전 불륜 상대를 병실로 불러내어 오기의 망가진 삶을 보여준다. 오기는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바라지만 다시 그녀가 오기를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전에 아내가 한 남자가 아내를 배신하고 이름을 바꾸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인과 사는 소설을 읽고 울 때 오기가 그런 아내를 달래준 적이 있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이 곧바로 다른 걸로도 대체될 수도 있다는 데 절망한 아내를 그때의 '오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209쪽

 

결말이 다했다, 진짜.

 

각자의 슬픔, 구멍은 고유하다, 정말.

 

오기는 참혹한 사고를 겪고 살아남아 불륜을 후회한다거나 아내를 추억하는 일 없이 자신의 몸상태 회복과 이전 상대와의 만남, 좀 더 나은 상태만을 열망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욕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을 것이다.

 

집 밖으로 탈출하려다 장모가 파놓은 구멍에 빠져서 울면서도 그간의 자신의 생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 울어줄 때가 되어서 운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생의 깊은 구멍에 빠진다 해도 전에 구멍에 빠졌던 이들을 이해한다거나 그들의 슬픔을 똑같이 겪을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대신해 그만큼은 슬퍼할 수 없다는 것.

비정한 생의 진실만이 엄정하게 남는다.

 

 

 

 

 

 

 

 

    

 

 

 

  

 

 

 

어쩌다 눈에 띄어 도서관에서 집어든 책인데 아직은 읽고 있다.

 

사람은 함께 산 배우자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형태로 종지부가 찍힌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고는 좀 더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다, 얘기를 들어줄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러나 가령 살아 있을 때 대화를 나누고 얘기를 들어주었다 한들, 그래서 과연 이해가 깊어졌을까.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가족은 생활을 함께하는 타인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쩌다 보니 <홀>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중반까지 읽고 있는데 가족관계에 대한 쿨하고 건조한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겠지.

 

 

 

 

 

 

 

 

 

 

 

 

 

 

 

 

딸이 그렇듯이 나도 어둠이나 구멍을 들여다보는 걸 이 나이까지 참 무서워한다.

 

그런데 요 며칠 스산한 책을 읽다보니 참 버겁다.

 

이런 책들만 보다보니 버겁고 오싹해져서 딸아이가 밤에도 무서움 없이 자주 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 나오는 어둠이나 구멍은 스산하지 않고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듯한 그런 느낌을 준다.

따스한 삽화가 더해져서 더 그렇다.

 

수프를 만들어주는 토끼, 머리 감겨주는 라쿤, 방아깨비 과학선생님 다 정겹다.

 

마음을 꺼내 닦아줄 수 없으니 머리를 감겨준다는 라쿤의 말처럼

혼탁한 마음을 닦아주고 마음 속 깊은 구멍을 메울 뭔가가 필요하다.

 

너무 며칠간 음지의 책들만 봐서 주문.

 

 

 

 

 

 

 

 

 

 

 

 

 

 

 

 

 

 

 

 

 

 

 

 

 

 

 

 

 

이 책들이 배송중이라고 뜨네.

사전 투표도 했으니 여유롭게 읽어봐야겠다.

 

다시 양지의 독서로 나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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