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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노예제도가 아직 폐지되기 전, 그러니까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남부의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던 노예제 폐지에 뜻을 함께 한 백인과 흑인의 합동 비밀 조직으로 실제 10만명이 넘는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고 한다. 저자가 이 비밀조직인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바꾸어 쓴 소설이 바로 이 책,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이다.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지 15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런 소재가 관심을 받을 정도로 현대 사회에 악질적 인종우월주의가 여전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다.
아자리는 광폭한 바다 위 흰 포말처럼 목화솜이 넘실거리는 목화밭에서 죽었다...(중략) 어떻게 어디 다른 곳일 수 있었으랴. 자유는 다른 사람들, 저 북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펜실베니아주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납치됐던 그 밤 이후로 그녀는 값이 매겨지고 또 다시 매겨지고, 자고 일어나면 날마다 새로운 저울판 위에 있었다. 자기 값을 알고 나면 갈 자리를 알게 됐다. 농장을 탈출하는 것을 곧 존재의 근본 원칙을 이탈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했다. (p16)
아프리카에서 납치당한 수많은 흑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백인들의 땅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운명에 순응하고 만다, 아자리처럼. 농장에서 운좋게 탈출한다 하더라도 현상금을 노린 무자비한 노예 사냥꾼들과 밀고자들 때문에 금새 붙잡혀오기 마련이며 이렇게 붙잡혀온 노예들은, 다른 노예들 앞에서 본보기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새 비참함은 따라야 할 질서가 되어 버린다. 코라는 아자리의 손녀이자 메이블의 딸로서 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이다. 코라가 10살 즈음에 엄마 메이블이 농장을 탈출하는데,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노예 사냥꾼의 추격에도 잡히지 않아 그녀의 탈출은 전설이 된다. 하지만 코라는 농장을 탈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시저가 코라를 행운의 부적처럼 탈출의 동행자로 점찍기 전까지는.
코라는 시저로부터 남부의 노예들을 돕는 '지하철도'에 관해 듣게 되고 농장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는데, 코라가 조지아주 목화농장을 탈출해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주, 인디애나 주를 거쳐 마침내 북부에 발을 딛기까지의 여정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내용이다. 노예로 태어나 '인간'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그녀가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흑인 소녀에게 목례를 하는 백인을 만나고 백인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목화로 만든 보드라운 면 옷을 입으면서 기적을 경험한다. 코라의 탈출기도 극적이지만 그녀 같은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수많은 역장들과 기관사들과 동조자들의 노력 또한 대단하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독립선언문이 상징하는 미국의 근본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유인 신분이 된 흑인들이 제 주인들을 피해 달아났듯이, 백인들 역시 그들 주인의 폭정을 피해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이 땅에 왔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이상은 다른 이들의 이상을 부정했다. 코라는 마이클이 랜들 대농장 뒤편에서 독립선언문을 암송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성난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던 그의 목소리. 코라는 그 말들을 거의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정말로 모든 사람을 뜻하는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쓴 백인들 역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흙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든 자유처럼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들이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했다면, 아니었다. 코라가 경작하고 일했던 땅은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코라는 백인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죽여서 그 종족의 미래를 씨앗부터 말살해버리는 대학살의 효율성을 자랑스레 얘기한다는 것을 알았다.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