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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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전쟁과 일본을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정부를 향한 분노와 울분, 그리고 마침내 해방이 되었음에 대한 감격 때문에 1945년이라는 해를 우리나라가 없는 미,영,중,소 그리고 일본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유럽에서 독일군이 패전하고 극동 지역에서 여전히 일본이 동아시아 지배에 대한 야욕을 멈추지 않은 채 전쟁 중이긴 했지만 일본 역시 패전이 감지되던 1944년말부터 일본이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고 마침내 태평양전쟁이 종결되는 1945년 9월까지 연합국 특히 미국과 소련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발의 원자 폭탄이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원자 폭탄이 일본의 항복에 끼친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원자 폭탄이 아니라 바로 일소 중립조약을 파기한 소련의 전쟁 참전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 항복을 위해 소련의 전쟁 참전이 필요했고 소련은 전쟁 참전을 댓가로 남사할린과 쿠릴열도 반환 등을 주요골자로 하는 얄타밀약을 맺게 된다. 밀약을 맺을 당시에는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이 완료되지 않았을 때라 소련의 참전이 절대적이었지만 이후 원자 폭탄 개발이 완료되고 미국에게 소련의 참전은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니게 된다. 반면 소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참전하기 전 일본이 항복을 하게 되면 얄타밀약에서 약속받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되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을 최대한 늦추어 참전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으로 응수한다. 일본은 황실의 안태와 국체의 호지라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에 매달린 나머지 좀 더 빨리 전쟁을 종결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선택에서 멀어지게 된다. 심지어 소련이 참전하기 전까지는 온 나라와 국민이 멸망하더라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워야한다는 미친 논리를 들이대다가 나중에는 국민 보호 운운하면서 자기 한 몸 희생하겠다는 피해자 코스프레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더라. 미국과 소련은 전쟁 후 자신들이 얻게 될 이익과 전후 질서에서 패권을 장악할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희생된 다른 나라들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의 추가 도발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조선을 자기들 마음대로 반토막내어 신탁통치 아래 두겠다는 결정은 도대체 누구의 허락을 받았단 말인가.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서 천황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결국 전쟁의 책임을 천황과 황족들에 지우지 않고 전쟁을 종결한 이들 역시 연합국이었다는 점은 적군과 아군의 경계와 배신과 협력의 거리는 멀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잔인한 학살의 잘못됨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행위에 대해 일본인들이 져야 할 도덕적 책임이 미국의 원자 폭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상쇄시키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하지만 자신들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침묵하고 자신들의 야욕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이 갖지 않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책임을 운운하는 것 자체는 모순이 아닐까.

 

   항복문서에 천황이 직접 서명을 해야하는가 아니면 천황에게 그런 모욕을 줄 순 없고 대리인이 하게끔 해야하는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대리로 서명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에 대해 다른 연합국들인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합의를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 다른 연합국들이 보인 반응에 격하게 동의하면서 그 부분을 인용해보겠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서는 천황을 직접 항복문서에 서명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안도, 영국의 논평도 일본이 내건 조건에 내표돼 있는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얘기하는 천황의 특권이란 천황의 전쟁책임 소추를 면제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침략 전쟁을 시작하고 그 전쟁에 뒤따르는 잔혹행위를 저지른 데는 천황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회답에는 누구든 전쟁범죄에 관련된 자는 벌을 받아야 하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연합국 중에 천황의 명예를 보전하는 것을 도우려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런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연합국 정부들은 연합군의 태평양 작전에서 일본군이 어떤 잔혹 행위를 저질렀는지 충분히 모르거나 인식하지 않고 있다. 천황의 명령하에 야만인 취급을 당한 전쟁포로들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됐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천황과 그 대리자들의 면책 요구에는 굴복할 수 없으며 천황을 법정에 세우고 또 항복 뒤에는 그로부터 모든 통치권을 박탈해야 한다. (p460-461)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역사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설계하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것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1945년의 진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진실에 충실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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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2019-04-2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세가와 쓰요시의 책과 관련된 도서인 『8월의 폭풍』의 역자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357299

하세가와의 책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있다면, 『8월의 폭풍』은 하세가와 책이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서 소련군이 수행한 군사작전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8월의 폭풍』은『종전의 설계자들』의 참고문헌이기도 합니다.

『8월의 폭풍』을 『종전의 설계자들』과 같이 읽으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번역한 『8월의 폭풍』도 언젠가 소개해주시고 서평을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