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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평점 :
"서문은 책의 작은 우주다"
(엮은 이 서문에서 인용)
위 한마디에 이 책의 의미가 모두 담겨있다. 물론 서문이 없는 저작물 중에도 위대한 것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좋은 서문은 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서문이 훌륭한데 본문이 훌륭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즉 서문만 읽고서도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도 저자의 서문을 꼼꼼히 읽는 편인데, 이유는 서문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어떻게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훌륭하다고 판단한 총 27편의 책의 서문을 엮은 책이다. 4세기 로마시대부터 시작해서 20세기 초의 저술까지 다양한 시대의 전략서, 인문서, 철학서, 소설, 시 등의 서문을 골고루 배치했으며 시대순으로 되어있어 쓰여진 장소와 시기가 다름에도 서문의 변천사를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게다가 책의 서문이 마음에 든다면 책 뒤 출처란에서 엮은이가 참조한 번역본을 찾아 책 전체를 읽어볼 수도 있어 훌륭한 독서 가이드 역할까지 해낸다.
총 27편의 서문 중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의 서문이다.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인데 종교가 대중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공포를 조장하고 미신을 이용해 대중들을 통치한다고 비난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 이성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인물이다. 여기에 소개된 <신학정치론>은 당시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지금 읽어도 완전 사이다 같은 문구가 가득하다. 보통 대중들이 불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미신의 제물이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을 잠깐 인용해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운이 자신들에게 미소지을 때에는, ..(중략) 자신들에게 제공되는 어떤 조언이든 모욕으로 간주할 정도로 지혜가 풍부한 반면, 역경 속에서의 그들은 사방에 조언을 간청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또 그때에는 어리석다거나 불합리하다거나 공허하다 하여 따르지 못할 조언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게다가, 그들이 어떤 이상한 현상을 접하고 경이감에 사로잡히면 그들은 이것을 신들 또는 최고신의 노여움을 의미하는 전조라고 믿으며 따라서 희생물과 서원으로써 악을 피하는 것이 경건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징조의 종류는 끝이 없으며 마치 전체 자연이 그들의 광기의 파트너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 속에서 별스러운 것들을 읽어낸다...(중략) 그들은 자신들이 탐하는 무의미한 것에 확실한 길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성을 장님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지혜를 공허하게 생각하지만 환영과 몽상과 유치하고도 어리석은 짓은 신의 신탁들로 여긴다.(p87-88)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에 인용된 서문 중 많은 서문들이 주로 독자에게 이해를 구하고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나 비평가가 할 독설을 미리 예견하고 그에 대한 일종의 방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을 비판할 때는 그냥 선동자니, 불신자니, 이렇게 모호하게 비난하지 말고 이 책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취약한지를 증명하라거나, 나도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도 있으니 너그럽게 봐달라거나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부분이 꽤 있는 걸 보면 그 당시에도 독자들의 비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저자들의 고충이 느껴진다. 인터넷에 악의성 댓글이 난무하는 요즘 세태를 본다면 아마도 책을 출간하기를 포기했을 저자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본문은 서문을 완성하기 위한 글쓰기와도 같다는 저자의 생각에 완전 공감하게 되는 멋진 서문들을 발견하고 멋진 서문에 버금가는 멋진 본문이 탄생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새로운 탐험의 동기를 부여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서문이 있는 책이라면 좀 더 신경써서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