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필립 마티작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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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창의적인 저서를 만났다. 처음에는 '로마에서 24시간 살아보기'라고 해서 당일치기 여행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했는데, '고대 로마의 24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통할 듯하다. 즉 2000년 전 일반적인 로마인(황제나 왕족, 귀족들은 제외하고)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한 저서라고나 할까. 하루의 시작, 자정부터(로마식 표현으로 하자면 밤의 여섯번째 시간) 그날의 자정이 될때까지 24시간을 한시간 씩 쪼개어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매 시간마다 순찰대원, 제빵사, 황제의 전령, 학생, 법학자, 석공, 점성술사, 요리사, 여사제, 상인 등 총 24명이 등장하지만 매 시간 속으로 직접 들어가보면 그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의 다른 인물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각 시간의 인물들이 시간이 끝나면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시간에 다시 등장하면서 마치 시리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매 시간 속 이야기는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들의 한시간이 모여 로마의 24시간을 그려내고 결국에는 황제나, 정치가나, 왕족이나 귀족들이 아닌 수많은 로마인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24시간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2000년 로마인들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특별한 하루의 시간적 배경을 제14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가 통치하던 어느 날로 선택한다. 참고로 하드리아누스는 고대 로마 5현제 중 한명으로 로마의 5현제가 통치하던 시기는 로마가 가장 평화롭고 번영를 누린 시기라는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웠던 시대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의 서신이나 각종 자료들을 참고하여 최대한 진정성있게 매 시간 시간을 구상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중간중간 삽입된 실제 편지 내용이나 저작물 및 각종 일화들의 인용 속에 담긴 내용은 저자가 만들어낸 로마의 24시간이 절대 허무맹랑한 소설만이 아님을 입증한다. 특히 유베날리스의 <풍자시>는 너무 적나라하게 까발린데다 현대의 유머코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통쾌했다. 나중에 그의 풍자시만 별도로 읽어봐도 재미있을 듯 하다. 로마인들의 하루를 24인의 눈으로 보고나니 그들의 다음날이 궁금해진다. 고대 로마의 역사, 정치에 관한 저서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다간 사람들의 시선은 또 다른 즐거움을 전해주었는데, 특히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적의 모습에서 찾아낸 그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보니 폼페이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감정이 다시금 역류하여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책속의 재미있는 가십하나 인용해본다.

마침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목욕탕에서 잘 아는 참전용사를 발견했다. 그 용사는 대리석 벽에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황제가 지금 뭘하는 건지 묻자, 자신을 마사지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줄 노예를 살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제는 그에게 노예와 돈을 선물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수많은 남성들이 벽에 몸을 문지르며 황제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그 남성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말했다.

" 두 명씩 짝지어라! "

- 아에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의 생애>,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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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
제프리 클루거 지음, 제효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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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와 달 착륙에는 실패했으나 결함과 여러가지 문제로 달을 선회하여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온 감동 드라마의 주인공 아폴로 13호를 제외하면 NASA의 다른 우주선에 관한 이야기들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화성에 관한 소설, 영화가 등장하고 인류가 화성탐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직은 공상과학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때에 (더 이상 달 탐험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는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비용이 한 몫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달 따위는 잊힌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아폴로13>의 저자인 제프리 클루거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아폴로 8호'에 대한 이야기를 써낸다. 인류 최초로 달의 궤도에 올랐던 우주선인 아폴로 8호를 내세움으로써 마치 초심으로 돌아가 기본에 충실한 인류의 위대한 탐험 정신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기념비적인 사건을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다큐 형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어느 정도의 노력이 더해졌을지 감히 짐작해본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미국 만세'적인 냄새를 약간 풍기기는 하지만 '아폴로 8호'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지녔던 달에 대한 애정과 도전 정신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는 그러한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상쇄시키기에 충분했다.

 

"고마워요, 아폴로 8호. 당신들이 1968년을 구했습니다"

 

   프랭크 보먼, 짐 러벨, 빌 앤더스 - 닐 암스트롱만 기억하는 우리에게 이 세 사람의 이름은 낯설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 세 사람이 어떻게 NASA에 합류하였는지와 그들의 가족과 주변의 이야기들로 책의 절반을 할애한다. 또한 아폴로 8호에 이르기까지 어떤 도전과 희망과 성공과 희생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세부적 묘사 역시 탁월하다. 우주선 내부의 모습이라고 하면, 물건이 둥둥 떠다니는 장면만 생각하는 나같은 문외한도 이해할 수 있는 친절한 묘사와 설명 덕분에 당시 좁은 우주선에서 비행사들이 겪어야 했던 소소한 고충들에 대한 유머코드를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우주선이 장착된 거대한 새턴 로켓의 점화를 시작으로 카운트다운이 완료되고 드디어 이륙하여 37만 6114킬로미터 떨어진 달을 향해 나아가는 아폴로 8호를 그려본다. 1단계, 2단계 엔진이 제 역할을 다하자 아폴로 8호는 지구 궤도를 순항한다. 아직 18미터 길이의 새턴 로켓 3단계 엔진이 남아있다. 이 까다로운 엔진의 점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지구 궤도를 돌던 아폴로 8호가 달의 궤도로 진입할 수 있을만한 속도로 날아가게 된다. 유인 우주선으로서는 처음인 셈이다. 까다로운 과제를 해내고 드디어 달의 중력권에 들어간 아폴로 8호는 최초로 달의 뒷면을 보는 영예를 얻는다. 모든 숙제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달에 온 것 이상의 위험이 수반된다. 엄청난 속도로 지구를 향해 날아오던 우주선이 대기권과 충돌하면서 마주하는 엄청난 충격은 기본이고 좁은 재진입통로로 정확히 들어와야 한다는 것,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우주선이 산산조각 나거나 대기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우주를 영원히 떠도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대기권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비행사들이 살아서 착륙할 수 있게 되기까지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는 너무 많아 열거하기도 버겁다. 이 모든 위기와 위험과 난관을 극복하고 무사히 착륙한 아폴로 8호의 성공과 명예는 세 명의 비행사들, 아폴로 8호의 발사를 위해 수년 전부터 노력해온 엔지니어들, 관제사들, 결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리더들, 그리고 그들을 믿고 기다려 준 가족들의 몫일 것이다.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한가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가 관건이겠지요. 탐험은 인류 정신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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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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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떠한 말로도, 찬사로도, 놀라움으로도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가시나무 새'의 저자 콜린 매컬로가 준비작업 및 고증에만 13년, 집필에만 거의 20년이 걸린 'Masters of  Rome' 시리즈 중 그 첫번째, 로마의 일인자. 총 일곱 시리즈, 21권 중 첫번째 3권이다. 7부작으로 이루어진 Masters of Rome은 천년이 넘는 로마 역사 중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27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굳이 한마디로 하자면 그 기간동안 로마를 이끌었던 master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시대의 변화와 진보를 이끌어낸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첫번째 시리즈인 <로마의 일인자>는 기원전 110년에서 100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시대와 장소에 관한 묘사는 물론이고 각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 등을 표현한 부분은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독자가 그 시대로 타임슬립을 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게다가 로마의 포룸 로마눔과 일곱언덕들에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다보니, 그 생생한 묘사들이 어찌나 시각적인지 상투적이고 평범한 감탄으로는 부족하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1부에서 주인공, 즉 로마의 일인자는 당연 가이우스 마리우스이다. 로마의 정통 귀족 출신이 아닌 '그리스어도 못하는 이탈리아 촌놈'인 그가 왜 로마의 일인자이고 제3의 로마건국자로 불리우는지는..책을 읽어야만 한다. 인물에도 원조라는게 있다면, 로마하면 무조건적으로 떠오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원조라고 할만하다. 그 시대에 마리우스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을만큼 그의 공헌은 지대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로마는 이미 기원전 100년이 되기 전에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명의 주목할만한 인물은 마리우스와 한때 동서지간이기도 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인데, 1부에서는 마리우스의 보좌관정도로만 등장함에도 그의 존재는 거대하게 다가온다. 마리우스라는 일인자가 있기 위해서는 술라 같은 서포터가 있어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인물이다. 2부 <풀잎관>에서는 아마도 술라가 또 한명의 Master가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마리우스와 술라 이외에도 많은 원로원 의원이나 호민관, 그리고 율리아나 율릴라, 아우렐리아 같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개개인에 대한 묘사에서 어찌나 개성이 뚝뚝 묻어나는지 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이름이 외우기 어려워도 대화 한마디, 행동 하나만 보아도 누구인지가 명확해진다. 이는 작가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번역의 힘이라고도 보여진다.

   인물들이 뱉어내는 촌철살인이 많지만 그 중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라 생각되는 말은 루푸스가 마리우스에게 쓴 편지 속에 등장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재능이 결여된 야망처럼 위험한 게  또 없다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마리우스가 집정관을 일곱번 지낼거라고 한 예언이 과연 성취될까. 1부에서는 6번의 집정관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술라는 어떻게 될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은 언제 등장할까 등등 궁금한게 너무 많다. 하지만 2부인 <풀잎관> 세 권을 시작하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너무 빠지지 않도록 잠시 다른 책으로 마음을 다스려 봐야겠다. 로마 만세! (이 말은 마리우스를  따라해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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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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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이 책이 출간된지 10년이 넘었고 한국에서 30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야 이 책을 읽는 나처럼 여전히 읽는 독자가 있는 스테디셀러라 하니 어쩐지 작은 위안이 되는 듯 하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가 고민이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다이어트를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살고있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해마다 수백만명이 기아로 죽임을 당하고 10억명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한쪽의 잉여 식량은 다른 한쪽의 기아를 커버하고도 남을만한데, 왜 세계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가. 이 책은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카림이라는 아이와 아빠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 쉽고 가독성도 좋은 책이다. 카림이 질문한다.

 

"아빠!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서 사람들이 비만을 걱정하고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도 마구 버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니 정말 기막힌 일 아니에요?"

 

   씁쓸한 것은, 아이일때는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던 순수한 마음이 어른이 된 이후에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희생과 고통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극도의 빈곤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그들의 한뙤기도 되지 않는 땅들을 매입(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읽는다)하여 자기네 이익을 위한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다국적 기업들, 이런 약탈에 필요한 대금을 지원하는 세계 은행이나 투자자들, 그리하여 자급자족할 능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꼭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비싼 값에 판매하며 기아는 자연도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굶주리는 세계의 절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반인류 범죄자들이다.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힌 아이들"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기업들의 행태는 학살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한 예로, 책에서는 1970년 스위스 네슬레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칠레의 인민전선이라는 동맹은 자신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루 0.5 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후 공약을 지키기 위해 당시 칠레에서 분유시장을 독점하던 네슬레에게 '제 값'을 주고 분유를 사기 위해 협력을 요청하는데, 네슬레 본사는 칠레 민주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한다. 분유를 공짜로 달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아옌데 정권의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높이려는 개혁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면 그때까지 미국 기업들이 누려온 많은 특혜들이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지원을 끊고 파업을 조종하고 태업을 부채질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아옌데 정권을 방해했는데 네슬레 역시 거기에 동조하는 기업이었다. 결국 아옌데의 공약은 우유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공급처를 구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고 미국 CIA가 도운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국적 기업들의 물품을 불매운동 해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있는가? 탐욕스런 기업들과 이기적인 금융 자본이 존재하는 한 세계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릴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며 조직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뭐든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무심해지지 않는 것.

 

"나는 신에게 꼭 한 가지만 청한다네
고통 앞에서 내가 무심해지지 않기를
창백한 죽음이 이 땅에서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한 채
텅 비고 고독한 나를 찾게 되지 않기를 -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 출신 여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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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지음 / 한길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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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2월, 내가 런던이라는 도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만 해도 홍차라는 걸 마셔본 적도 없었고 빵이라고는 학교 매점에서 팔던 크림 빵, 단팥 빵 아니면 소보루..케이크라고는 단단하고 매끈한 하얀 색 혹은 분홍 색 설탕크림으로 중무장이 되어있던 그런 것만 먹어본 입맛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이질적인 풍경이 아마도 머그컵 가득 우려낸 홍차에 우유를 타서 시간날 때마다 마시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홍차와 티푸드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따로있고 유명한 호텔들의 애프터눈 티룸은 몇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가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당시에는 도대체 홍차가 뭐길래라는 생각이 들었고 런던을 떠나올 때 쯤 나도 홍차와 크림바른 스콘의 애찬론자가 되어있었다.


   이 책을 보았을 때,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 같았다. 홍차나 영국의 홍차 문화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은 아니지만 한 그루의 차나무도 나지 않는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왜 그토록 홍차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충분하다.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는 영국인들이 유독 차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르다. 스파이를 보내 차나무와 차를 제조하는 과정을 빼내오고 아편전쟁을 유발하면서까지 차를 마시고자 했고, 상류층에서 시작된 차에 대한 열망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는 힘들고 지친 도시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소울음료로 자리잡았지만 그 뒤에는 커피나 초컬릿처럼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책에서는 크게 세 파트로 구분하여 이야기를 담아낸다. 첫번째는 영국인들에게 드리운 홍차의 아우라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부분이고 두번째는 자국에서 재배할 수 없는 차나무에 대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은 결국은 홍차 마니아를 넘어 홍차 중독에 이른 영국인들의 다양한 모습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홍차 이외에도 지극히 영국적인 문화나 풍습에 관한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유명 작가들의 런던에 관한 위트있는 인용들을 읽는 재미, 중간중간 삽입된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물론 그림은 책의 내용과 백퍼센트 들어맞는 그림들이 아닌 것도 많아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읽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문장들을 소개해본다.

 

/1939년 영국 여행을 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국 기행>에서 런던의 안개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런던의 안개는 한바탕 짙은 꿈과도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 바람과 비와 서리로 '운명'을 개조하기에 딱 좋다. 눅눅하고 노르스름한 안개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담을 핥고 사람들과 나무들을 감싸고 그들의 폐로 침투한다. 안개는 서서히 솟아오르며 넬슨 동상을 지워버린다. 그것은 다시 서서히 내려앉으며 사소한 것들을 덮어버리고 거친 윤곽을 부드럽게 하고 넝마 조각들을 미화시키고, 온갖 추악한 형상에 신비로운 저승 분위기를 부여한다. (p65)/

 

   영국인들의 맹목적 홍차 사랑에 관한 묘사도 있다.
   영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문화인류학자의 시각으로 접근한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에서 인용된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항일텐데, 차 끓이기는 최고의 전이 행동, 즉 분위기 바꾸기이다. 영국인은 사교적인 상황에서 난처하고 불편하면 언제든 차를 끓인다. 누군가 집에 찾아오면 인사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면 "자, 주전자를 올리러 갔다 올게"라는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 중에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이미 날씨 이야기도 다 했고 별로 더 할 말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자, 누구 차 더 하실 분은 없으신가요? 내가 가서 주전자를 올려놓을께요"라고 한다.

  

   상담 중 돈 얘기를 꼭 해야 할 순간이 되면 불편한 상황을 잠깐 미루고 모두 차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아주 험한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도 차가 필요하다. 제3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곧 원자 폭탄이 떨어질 것 같다. "가서 내가 물 올리고 올게요"

이제 당신은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홍차를 좋아한다. (p88-89)/

 

   마지막으로 실업수당과 연금으로 겨우 살아가는 하류층 사람들이 설탕과 홍차를 사는데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현실적 당위성을 어필한 조지 오웰의 말이다.

 

   /참 얄궂은 것은,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건강식에는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백만장자라면 아침 식사로 오렌지 주스와 호밀 비스킷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실업자는 그렇지 않다....말하자면 실업자가 되어 못 먹고, 시달리고 따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면 몸에 좋은 음식은 심심해서 먹기가 싫은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끝없는 비참함은 계속해서 고통 완화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차원에서 차야말로 영국인의 아편이다. (p149)/

 

   나도 위로가 필요한 오늘 아침, 얼그레이로 시작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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