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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지음 / 한길사 / 2014년 12월
평점 :
1994년2월, 내가 런던이라는 도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만 해도 홍차라는 걸 마셔본 적도 없었고 빵이라고는 학교 매점에서 팔던 크림 빵, 단팥 빵 아니면 소보루..케이크라고는 단단하고 매끈한 하얀 색 혹은 분홍 색 설탕크림으로 중무장이 되어있던 그런 것만 먹어본 입맛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이질적인 풍경이 아마도 머그컵 가득 우려낸 홍차에 우유를 타서 시간날 때마다 마시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홍차와 티푸드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따로있고 유명한 호텔들의 애프터눈 티룸은 몇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가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당시에는 도대체 홍차가 뭐길래라는 생각이 들었고 런던을 떠나올 때 쯤 나도 홍차와 크림바른 스콘의 애찬론자가 되어있었다.
이 책을 보았을 때,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 같았다. 홍차나 영국의 홍차 문화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은 아니지만 한 그루의 차나무도 나지 않는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왜 그토록 홍차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충분하다.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는 영국인들이 유독 차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르다. 스파이를 보내 차나무와 차를 제조하는 과정을 빼내오고 아편전쟁을 유발하면서까지 차를 마시고자 했고, 상류층에서 시작된 차에 대한 열망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는 힘들고 지친 도시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소울음료로 자리잡았지만 그 뒤에는 커피나 초컬릿처럼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책에서는 크게 세 파트로 구분하여 이야기를 담아낸다. 첫번째는 영국인들에게 드리운 홍차의 아우라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부분이고 두번째는 자국에서 재배할 수 없는 차나무에 대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은 결국은 홍차 마니아를 넘어 홍차 중독에 이른 영국인들의 다양한 모습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홍차 이외에도 지극히 영국적인 문화나 풍습에 관한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유명 작가들의 런던에 관한 위트있는 인용들을 읽는 재미, 중간중간 삽입된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물론 그림은 책의 내용과 백퍼센트 들어맞는 그림들이 아닌 것도 많아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읽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문장들을 소개해본다.
/1939년 영국 여행을 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국 기행>에서 런던의 안개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런던의 안개는 한바탕 짙은 꿈과도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 바람과 비와 서리로 '운명'을 개조하기에 딱 좋다. 눅눅하고 노르스름한 안개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담을 핥고 사람들과 나무들을 감싸고 그들의 폐로 침투한다. 안개는 서서히 솟아오르며 넬슨 동상을 지워버린다. 그것은 다시 서서히 내려앉으며 사소한 것들을 덮어버리고 거친 윤곽을 부드럽게 하고 넝마 조각들을 미화시키고, 온갖 추악한 형상에 신비로운 저승 분위기를 부여한다. (p65)/
영국인들의 맹목적 홍차 사랑에 관한 묘사도 있다.
영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문화인류학자의 시각으로 접근한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에서 인용된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항일텐데, 차 끓이기는 최고의 전이 행동, 즉 분위기 바꾸기이다. 영국인은 사교적인 상황에서 난처하고 불편하면 언제든 차를 끓인다. 누군가 집에 찾아오면 인사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면 "자, 주전자를 올리러 갔다 올게"라는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 중에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이미 날씨 이야기도 다 했고 별로 더 할 말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자, 누구 차 더 하실 분은 없으신가요? 내가 가서 주전자를 올려놓을께요"라고 한다.
상담 중 돈 얘기를 꼭 해야 할 순간이 되면 불편한 상황을 잠깐 미루고 모두 차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아주 험한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도 차가 필요하다. 제3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곧 원자 폭탄이 떨어질 것 같다. "가서 내가 물 올리고 올게요"
이제 당신은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홍차를 좋아한다. (p88-89)/
마지막으로 실업수당과 연금으로 겨우 살아가는 하류층 사람들이 설탕과 홍차를 사는데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현실적 당위성을 어필한 조지 오웰의 말이다.
/참 얄궂은 것은,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건강식에는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백만장자라면 아침 식사로 오렌지 주스와 호밀 비스킷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실업자는 그렇지 않다....말하자면 실업자가 되어 못 먹고, 시달리고 따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면 몸에 좋은 음식은 심심해서 먹기가 싫은 것이다.... 실업으로 인한 끝없는 비참함은 계속해서 고통 완화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차원에서 차야말로 영국인의 아편이다. (p149)/
나도 위로가 필요한 오늘 아침, 얼그레이로 시작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