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 소년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패트릭 맥케이브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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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좀 도와줘! 소년의 절규 [푸줏간 소년]

 

소년 프랜시에게는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삶의 문제는 생애 초기의 가족 경험에서 시작된다.

가족 간의 협력이 잘 이루어질 때 아이는 힘차게 성장한다.

그렇게 성장해야 어른이 되어서도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아들러

 

그 때,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제대로 된 충고를 해주었더라면, 그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부친에게서 버려진 기억을 곱씹으며 현재를 망쳐가고 있는 중이었고 엄마는...유리같은 얇은 신경이 산산조각나버려 정신병원을 들락거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널리 부인이 예쁜 새 외투를 입었구나 하고 말하다가도 곧 수돗물이 끊길 거라는 얘기를 하는 엄마. 페스트리 반죽을 쉴새없이 밀어서 나비 모양 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엄마.  

하나 뿐인 친구 조는 필립 누전트라는 번듯한 집안의 아이가 전학오자마자 프랜시에게서 멀어져간다.

그리하여 어느 한 쪽으로 그 울분을 풀어버려야 살 것만 같았을 프랜시는 단정하게 끝나던 독백을 길고 길게 늘여서 말하기 시작한다.

마침표를 알맞게 찍어 말하던 때에서 정신없이, 두서없이 말하는 때로 언제 넘어갔는지도 모르게.

 프랜시의 정신세계는 황폐해져 간다.

 

이십 년인가 삼십 년인가 사십 년 전 아직 어렸을 때 나는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내가 누전트 부인에게 저지른 일 때문에 나를 잡으려고 들었다. -6

 

[푸줏간 소년]의 첫 문장이다.

칼을 잡고 무자비하게 고깃덩어리를 해체하고 피를 쏟아내는 곳인 "푸줏간"이

맑고 순진하고 어린 "소년"이라는 단어와 만난 것이 기이하게 여겨져서 첫 문장에 관심을 많이 쏟았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나이조차 어림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을 만나버렸다.

소년의 독백이겠지.

소년이 나이 든 뒤에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로구나. 하고 감을 잡기 무섭게 어린 시절의 프랜시로 훌쩍 넘어간다.

프랜시를 둘러싼 환경은 척박하기 그지없고 이 소년이 웃음을 짓는 순간이 나오기는 할까, 하는 암울함으로 전반부가 뒤덮여 있다.

프랜시가 하는 말과 행동은 스스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만 정상일 따름이다.

프랜시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도 극명하다.

'이 아이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는데...어쩔 수 없이 마주쳐 버렸네.

정말 재수 없어. '

프랜시는 그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지만 더욱더 엇나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대놓고 그들을 놀리고 조롱한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프랜시의 정신병자같은 기나긴 문장에 적응될 때쯤, 프랜시가 주위 사람들을 '돼지'라고 부르는 것에도 익숙해져 갔다.

어느날 프랜시는 정확히 자신의 가정과 반대인, 부유하고 안락하며 안정적인, 필립 누전트의 집이 빈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간다.

혼자 누전트 집안의 식구들 역할을 번갈아 하며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집안을 휘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상황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린다.

"돼지는 똥을 싸! 그래 돼지는 언제나 농장 사방에 똥을 싸, 그래서 가엾은 농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필립이 있는 힘껏 애를 쓰자 침실 카펫 위에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었다, 최고의 똥이.-102

 

그 일로 인해 일명 돼지들을 위한 학교, 에 들어가게 된 프랜시는 또다시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엄마도 안계시고, 학교도 갈 수 없으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만 하는 처지라

어쩔 수 없이 누구라도 받아주는 래디 아저씨네 푸줏간에서 일해야만 한다.

그리고 푸줏간과 소년이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리라 여겨지는 일이 벌어진다.

 

소년이 독백에 갇혀 있을 때보다 차라리 사건이 일어나는 편이, 독자로서는 읽기 편하다.

어쩌다 이런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작가는 프랜시를, 독자를 거칠게 밀어붙인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희열을 느끼게 된다고나, 할까.

이제, 겨우 끝이야.

이 힘겨운 소설을 덮을 수 있게 되었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뾰족한 것이 쿡쿡 찌르는 느낌에 숨을 내쉬는 것조차 버거웠었다.

지긋지긋하게도 달라붙는 파리, 파리가 낳는 구더기, 푸줏간에 쌓이는 창자.

절로 구역질이 날 듯한 배경 속에서 끊임없이 독백을 뱉어내는 소년이 대단해 보인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한 번 소리를 내 보겠다고, 딴에는  엄청난 저항을 한다고 하는 것이 지리멸렬하고 기다란 독백이 아니었을까.

아무 반항 없이 조용히 속으로 침잠해가는, 그러다 결국엔 미쳐버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소년은 눈에 띄는 존재다.

프랜시가 마지막에 흘리는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둘씩 자기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 자기가 떠나버리게 만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자기의 최선을 다해 감정을 표현한 것일까.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는, 꽤 특별한 의미에서 반할만 한 작품이다.

 





푸줏간소년,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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