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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공포와 에로스를 간직한 매혹의 대상,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애경, 2012. 7.
키스를 부르는 관능적인 붉은 입술,
손을 닿으면 금방 깨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살해를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숙명을 가진 자(者)의 처연한 눈빛.
뱀파이어를 묘사하고 보니, 이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은 없을 듯하다. 그들 주변에는 공포를 위반하는 에로스적 탐미주의가 가득하다. 뱀파이어가 야만과 공포의 상징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적절하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영원한 젊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의 운명은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적인 고통으로 고뇌하는 시지푸스와 같은 운명이 독자(관객)를 사로잡는다. 탐미와 비애를 아우라(aura)로 휘감고 탄생하였을지, 긴 세월을 거치면서 진화해 왔을지, 누구나 한번쯤 그(녀)의 운명에 의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뱀파이어 문화사를 하룻밤 동안 섭렵하다 보면,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의 체감 온도를 (적어도) 2도는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
■ 내가 만난 뱀파이어
여름마다 관객을 자극했던 뱀파이어 영화가 B급에서 장르 대중영화로 사랑 받기 시작했던 것은 닐 조던 감독이 연출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이었다. 1994년, 한창 꽃미남으로 주가를 날리던 브레드피트, 탐 크루즈, 당시 열 살이었던 커스틴 던스크가 등장했던 이 영화는 기존의 B급 뱀파이어 영화와 구별된다. 앤 라이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닐 조던 감독의 탁월한 미장센 연출로 원작 이상의 매력을 발산했다. 방송작가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는 - 이백년을 살아온 - 아름다운 청년 루이(브레드 피트), 죽음을 갈망하지만 죽을 수 없는 레스타트(톰 크루즈), 루이가 사랑하는 고아 소녀 클로디아(커스틴 던스트)의 욕망, 사랑, 복수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이틴 로맨스로 각광 받았던 <트와일라잇>은 시리즈로 제작될 만큼 십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리즈는 각각의 작품에 따른 질적 편차가 있었으나, 원작에서 빚어진 환호성을 고스란히 이어갔다. 여주인공인 고등학생 벨라, 꽃미남 뱀파이어 에드워드, 둘 사이의 늑대인간 제이콥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팬텀(phantom)에 기초한 목숨 걸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 남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운명적인 사랑, 온 세상이 한 여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순정 만화의 환상과 뱀파이어의 결합이었다.
뱀파이어를 조금 더 예술로 끌어올린 영화는 <렛미인>(Lat Den Ratte Komma In)(2008)과 <박쥐>(2009)였다. 두 편의 영화는 뱀파이어 영화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북유럽 스웨덴의 차가운 기온을 담고 있는 <렛미인>은 뱀파이어의 숙명과 딱 들어맞는다. 못된 친구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외로운 소년 오스칼, 창백한 피부의 음울한 소녀 이엘리는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된다. 이름을 알린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고, 명망 높은 감독이 연출한 것도 아니었던 이 영화는 평론가와 관객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슬픈 사랑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감각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전율케 한다.
테레즈 라캥( Therese Raquin)에 대한 헌사이기도 했던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피를 탐하는 자기의 생존 욕구와 신앙심의 충돌을 잘 그려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태주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인간적인 쾌락과 욕망에 빠져드는 과정이 - 사진을 배열한 것처럼 - 미학적으로 아름답다. 욕망을 억제하고, 수줍게 움츠려 있던 태주는 상현을 통해서 뱀파이어가 되면서 인성이 바뀐다. 태주가 본능대로 행동하는 생기발랄한 모습이 매력적이다. 인간다움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상현은 진지함과 코믹의 양가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 뱀파이어의 사회·문화사
뱀파이어는 예술매체의 텍스트로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지속적으로 문학, 영화, 음악, 만화의 소재로 변주되는 이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접근해야 하는 책이 바로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저자는 문학연구가이자 문화사가로서, 예술가의 인생을 주로 다루어 온 요아힘 나겔(Joachim Nagel)이다. 이 책은 신화, 민담, 문학을 거쳐 연극,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까지 전 방위로 활약(!!)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추적한다. ‘뱀파이어 역사 사전’ 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뱀파이어의 사회·문화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빈틈없이 담아내고 있다. 고대의 신화 세계, 중세의 민담과 소설, 현대의 스크린과 연극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뱀파이어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고대 뱀파이어의 선조는 대부분 여성이고, 신(神)의 영역에 속하였다. 중세 기독교가 지배했던 시기조차, 미신은 가장 오래된 믿음으로 모든 신앙에 뿌리 내렸다. 기독교도,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도 뱀파이어를 제거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성의 배후에서 그들의 세력을 키워갔다. 신(神)의 영역에 있던 뱀파이어는 이제 귀족으로 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라는 담시는 검은 낭만주의의 서막이었고, 호프만의 『뱀파이어 이야기』또는 『섬뜩한 이야기』는 ‘유령 낭만주의’의 기원을 세웠다. 뱀파이어는 성(城)에서 묘지로 활동 배경을 이동했고, 혐오스런 마녀와 매력적인 여성의 이중성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공격은 더 이상 파괴가 아니라, 생의 기쁨이었다. 폴리도리의 소설 『뱀파이어』는 하인리히 마르쉬너의 오페라 <뱀파이어>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말, 팜므 파탈 뱀파이어는 상류층 여성의 동일시 모델이었지만,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화가 롭스, 뭉크는 뱀파이어의 부정적 속성만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에 피를 빠는 ‘드라큘라’가 등장하고, 1897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출간되었다. 7년에 걸친 조사와 집필, 탐정 소설가 코난 도일과의 친분은 세부사항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가는 공포소설·탐정소설·모험소설의 요소들을 노련하게 결합하고, 당대의 정신 병리학과 범죄학에서 얻은 최신지식을 첨가했을 뿐 아니라 실제의 것처럼 보이는 일기에 편지·전보문·신문 기사, 그리고 드라큘라가 잉글랜드로 갈 때 탄 배의 항해일지 등 다양한 기록들을 가지고 실화를 이야기하는 듯 한 서술방식을 채택했다(131쪽). 스토커가 창조한 드라큘라는 스크린 속에서 영원한 삶을 부여 받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무르나우가 연출한 <노스페라투>(1922)는 드라큘라에게 햇빛의 치명성과 뾰족한 송곳니 두 개를 추가했다. 드라큘라의 현신이라고 느껴지는 - 검은 망토를 입은 박쥐같은 -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1931), 송곳니의 전형적인 드라큘라를 보여주었던 크리스토퍼 리 주연의 <드라큘라>(1958),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밤의 유령>(1979),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블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까지 뱀파이어 영화는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공포가 욕망과 쾌락으로, 쾌락은 패러디와 희화화로 변주된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가미된 로만 폴란스키의 <박쥐성의 무도회>(1967), 섹시한 금발 머리 뱀파이어와 드라큘라가 만나는 <못 말리는 드라큘라>(1995), 무르나우 감독이 <노스페라투>를 만드는 과정을 픽션으로 구성한 <뱀파이어의 그림자>(2001>까지 드라큘라는 공포를 넘어 서서, 위트와 유머의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불멸의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앞으로도 새로운 버전으로 모든 예술 영역에서 재창조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의 앎이 세상의 모든 부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두려움은 뱀파이어와 함께할 것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의 세계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는다. 도덕과 질서의 범주에서 위반되는 것들이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 가능하므로, 예술은 일상 밖의 것을 취함으로써 매력과 매혹을 수반할 것이다. 드라큘라의 사회·문화사를 단순 기술한 것에서 멈춘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영원한 젊음’과 함께 싱싱한 피를 원하는 ‘모든’ 드라큘라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