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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ㅣ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평점 :
프라하는 카프카다.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카프카 평전』이동주 지음, 소나무, 2012. 4
프라하는 카프카다. 내가 프라하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카프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금소로 22번지에 그가 집필에 몰두했던 이층집이 있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다. 하루 스물 네 계절이 있다는 변덕스런 날씨의 프라하에서 체코 맥주를 마실 때마다 나는 현존하는 카프카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세계와 불화했던 그도 늘 고독했을 것이다. 작가의 삶이란 상식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므로 나는 이미 그랬으리라 단정했다.
프라하에 머무는 매일 밤, 나는 그곳의 감흥을 오래오래 잊지 않기 위해서 프라하 하늘의 처연한 달을 맥주에 담아 마셨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바램이었다. 불운해도 좋으니 ‘유사 작가’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도 같다. 관념을 머리에 이고 살던 나의 청춘의 밤에 카프카가 있었다. 빵을 벌기 위한 직업과 밤의 글쓰기를 규칙적으로 지킨 작가, 프라하를 떠나본 경험이 별로 없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독하게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의 삶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군대의 ‘기동 연습’ 같은 엄격한 시간표”가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밥벌이와 분리하는 순간, 그에게 글쓰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신성한 행위가 되었다.
카프카는 나의 청춘이었다. 낮과 밤의 다른 삶을 살았던 그처럼 - 한계를 초연하게 업으로 받들되 - 창작을 생명수로 받아 마시고 싶었다. 언젠가 나도 “카프카처럼” 그의 삶을 흉내 내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하며 미래를 그려가던 날들이었다. 황금소로 시절 카프카는 프라하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표작인 『성(城)』을 완성했다. 전 세계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을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카프카는 오로지 실존과 구원을 위한 글쓰기로 마흔 한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통해서 다시 카프카를 만난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 부피가 매우 부담스럽지만 -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들고 가고 싶다. 이 책은 불멸의 작가인 카프카 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만날 수 있는 장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프라하의 해지는 벤치에서, 카페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신경증과 우유부단함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카프카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하다 보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어질 것이다.
이동주 선생님의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의 난해함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와 결별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카프카 전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논문을 썼던 이동주 선생님의 필생의 작업이 단단한 도끼로 탄생했다. 오독이라면, 모든 독자가 오독일 것이고, 해석이라면 모두 합당한 해석이겠으나, 그간의 카프카의 연구는 그를 이해하는데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전의 평전과 달리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가 공식적으로 썼던 글보다는 주로 자전적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기, 편지, 미완성 작품, 유고(遺稿), 공무 증명 기록들은 ‘인간’ 카프카에 방점을 찍으며 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전적 증거와 논증을 통해서 저자의 주관에 몰입하지 않도록 경계를 지킨다. 또한 창작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며 기술하는 사이사이에 중요한 주제와 해설을 가미시켜 - 삶과 예술의 - 상보적인 형태의 전기(傳記)로 구성하였다.
재담하기 좋아했던 까마귀, Kavka. 모든 것이 지나쳤던 -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겸손하고, 지나치게 고독해하면서도 수다스러웠던 Kavka. 빵만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던 Kavka. 그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최종심급의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긴장 상태를 유지하되, 주어진 ‘지위’를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쓰는 만큼 읽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던 카프카는 “독서하고 싶은 마음과 책에 대한 갈망을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례였다. 그는 독서 행위를 “나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객관적인 것으로 충동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서가 문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모방능력과 유희”였을 것이다.
카프카가 체험한 시간과 공간의 협소함을 넘어 서서, 그가 살던 유럽은 세계의 심장이었고, 다양한 사상과 양식이 공존하는 교차점이었다. 카프카의 생애를 들여다보다 보면,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지식인 사이에서 정신분석학이 유행처럼 번졌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카프카가 보여주는 행동은 초자아로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탈착하지 못하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성적(性的) 억압으로 나타났고, 관계 맺기의 곤혹스러움으로 드러났다. 약혼식을 앞두고도 그는 항상 결혼의 불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의 삶 역시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전례 없던 세계대전을 경험한 시대가 예고하는 “고통과 상실”이 가져온 고뇌와 통찰이었다. 전통적 가치와 통일된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해석’의 자유가 주어졌다.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자”로서 주관에 충실한 카프카는 자신만의 “절대적 메타포”를 구성함으로써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주었다.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성찰적 글쓰기뿐이었다. 문학적 삶만이 유일한 실존이었던 카프카에게 문학은 삶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의무감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했던 카프카처럼, 하루에 한 두 시간 혼자 카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프카가 될 수 있다. 익명이지만, 더불어 있으니 은둔이나 소외가 아니다. 다만 제 몫의 고독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뿐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공과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규칙적인 체험 속에서 동일하게 읽고 쓰다 보면, 성찰과 성장을 선물 받을 것이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 카프카의 글은 어려서 읽고, 어른이 되어 또 읽고, 늙어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 자신이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듯이, 그의 책은 우리의 뇌를 두 쪽 내는 도끼의 강렬함이 있다. 카프카의 글은 독자가 놓인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매번 짙어지는 농도와 질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