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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여전히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으로 촘촘하게 읽어야 할 사회계약설 철학자 쟝 자크 루소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애드먼즈, 존 에이디노 저 |임현경 역 |난장 |2011.10.31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은 근대의 두 철학자, 루소(J. J. Rousseau)와 흄(D. Hume) 사이에 인간적인 접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18세기 역사, 철학, 정치, 사회의 중심에 서 있던 두 사람의 18개월 간 지속된 논쟁이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조 에이디노를 통해서 21세기에 재현되었다. 21세기의 독자는 18세기와 다른 에피스테메로 그들의 논쟁을 바라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들의 우정과 진흙탕 싸움 끝의 결별은 감정의 가감 없이 상당 부분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드러난 실체에 가려진 거대한 성인의 왜소해진 그림자는 그들의 실제 사이즈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을 비판하고, 만인의 공통된 ‘이익’에 기초한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리주의를 제시했던 경험론 철학자 흄, ‘이성’을 가진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사회계약을 통해서 보편적 일반 의지를 산출하여 사회를 구성하고자 했던 사회계약설 학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거장의 철학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BBC 시사 다큐멘터리 전문작가와 프로듀서로 만난 두 사람 데이비드 에드먼즈·존 에이디노는 한편의 다큐를 보여주듯이 두 철학자 사이에 있었던 18개월의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현재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글쓰기는 결론으로 치닫는 전 과정에 자연스런 몰입을 가능케 한다. 이백 여 년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역사에는 사라진 부분과 부식된 지층들이 존재한다. 작가들은 루소와 흄이 남긴 글과 왕래한 서신, 두 사람을 지켜보았던 주변 사람들의 기록 사이사이의 틈새에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촘촘하게 엮는다. 철학사의 거대담론에 가려진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미시사를 복원하는 일은 고고학 탐사처럼 조심스럽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복원된 의미 있는 역사의 한 지점을 마주하는 값진 시간을 갖는다.

 

책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루소와 흄이 동등한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흄은 당시 루소를 바라보는 철학자의 전형일수도 있겠다. 루소에게 온전한 사랑과 이해를 주었던 이들은 - 우정을 나누었던 흄이 아니라 - 수준도, 관점도 전혀 다른 가정부 르바쇠르와 그의 개 쉴탕이였다. 인간적인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유럽의 유명인으로 살아간 루소의 고독과 외로움에 관한 출처를 벗어나서, 인간 루소를 비판하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 사상과 삶(실천)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대표 주자로 언급되는 루소는 직접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의사(意思)는 대표될 수 없다”로 유명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루소가 새롭게 읽혀질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외로움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탄생이 어머니의 죽음이었던 기억 이전의 트라우마를 안고 이 세상에 온 루소는 『고백』에서 “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나의 탄생이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상실로 아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던 아버지 마저 루소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인간의 불행에 관한한 뛰어난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서사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항상 망명가의 심정으로 살았을 루소는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책’을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정부, 귀족, 교회의 노여움의 대상이었다. 저서를 통해서 모든 종교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도전은 루소를 유럽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가 펜을 들면 제도가 몰락했다.” 구속당하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분석, 교육에 대한 기존 질서를 뒤집는 이론은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이는 치명적인 적대 세력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문자 메커니즘을 장악하고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집단과 나약한 개인으로서 루소의 싸움은 루소에 대한 심각한 이미지 훼손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공모가 만들어낸 ‘사실’을 후세대는 진실이라고 오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늘날 지식인 집단과 언론이 하는 일들과 당시 살롱과 학계가 했던 일 사이에는 분명 공통점이 존재한다.

 

역사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 사이사이의 오인을 들추어내고, 근거를 찾아가고, 거대담론에 가려 있거나 의도적으로 묻혀버린 미시사를 복원하여 진실에 근접해 나가며, 우리 삶의 은유로서 역사를 활용하는 일은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당시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역사 서술 작업이 갖는 함의이다. 역사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능성의 역사’가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루소를 프랑스 살롱에 진입하게 한 후견인 바랑부인이 아니라, 가정부이자 루소의 다섯 아이를 출산했던 르바르쇠였다. 루소가 살롱에서 만나는 귀부인들과 달리 르바르쇠는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이 부엌과 세탁실에서 일만 하는 하녀였다. 루소의 전기 작가들은 “엄청나게 무식한 여성”, “불행한 여인”, “악독하고 천하고 열등한…맥베스 부인 같은 여자”라고 묘사했다. 흄은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교활하게 쓸 수 있을 정도의 지성만 지녔다.”는 악평을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르바르쇠는 루소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루소의 개, 슐탕과 함께 그의 옆을 지킨다. 아직도 그녀는 루소와 함께 여전히 새롭게 읽어야만 하는 열린 텍스트로 존재한다.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재현하는 일은 엄청난 고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 역사적 인물을 재현한 드라마와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이다. 다만 다큐적 기술 방식은 소설 같은 재미를 반감하기도 한다. 루소와 흄의 논쟁 뿐 아니라, 당시 철학의 바탕을 이루었던 18세기 유럽의 문화를 간접경험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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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2-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정신인 흄보다 미치광이었던 루소가 사랑을 더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숲님의 리뷰에서도 읽을 수 있네요.^^
루소의 불완전성,기질적으로 우울하고 예민했던 그의 성향들, 모순적인 그의 행적들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하면서도 동정심을 함께 가지는 건, 본디 우리 모두가 트라우마를 가진, 혹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러지 않을까....더 많이 그쪽으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까 싶은데,,
숲님은 어찌하여! 루소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겁니까?,,,,,ㅎㅎㅎ 듣고 싶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