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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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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피에서 한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운 시(詩) 읽기의 난해함은 작가주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의 시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시의 난해함을 극복한다면 응축된 시 세계를 만날 수 있지만, 그 고비를 넘는 일은 자연스러운 감수성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렸을 미세한 경험과 감정에서 호흡을 멈추고, 존재를 던져 사유했을 것이다. 그들의 절망과 고뇌를 짐작한다면, 시를 이해하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다.  

서정(敍情)과 서사(敍事)가 내포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시인(詩人)의 이해를 자신의 고유어로 형용할 수 있다면, 각자의 개별 경험 사이에서 이탈하는 궤적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강신주는 열네명의 시인과 열네명의 철학자를, 또한 우리와 시인·철학자를 적극적으로 중매한다. 시를 읽는 일도 쉽지 않은데, 차가운 이성을 선호하는 논리와 분석의 철학을 시 이해의 도구로 삼는다는 일은 그 수고로움을 몇 곱절 배가하는 일이다. 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강신주는 도제적 노력으로 그들을 새롭게 빚어낸다.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풍광이 다르듯, 우리시대 철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의 세계는 자연의 산만큼이나 다채롭고, 각각의 의미로 우리의 시야를 자극한다. 그의 사유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각각의 해석은 낯설었던 시의 느낌을 서서히 보편의 감수성으로 끌어올린다.  

이 책은 읽는 동안 우리는 시와 철학으로부터 위무 받고, ‘자유’에 한걸음 다가서게 된다. 각자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견고한 성을 쌓았으나, 실은 빈 창고와 같았던 내면이 무너지는 느낌을 선물 받는다. 내 삶의 고유한 주름들 사이의 굴곡과 상처가 실은 인간의 삶에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일정정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하는 근대적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나에게는 해방구와도 같은 책이었다.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 감추어둔 다음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는 것처럼 - 적재적소에 포진해있는 시들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허용하고 받아들여도 좋다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 삶을 성찰하고,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길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무수한 사회과학서 보다도 마이클 무어의 영화 한편이 더 유용할 수 있는 것처럼, 두꺼운 철학책에 다가서는 걸음으로 한 편의 시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 이 책의 미덕은 ‘글’이 아니라, 철학자의 친절한 ‘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청중을 앞에 두고 기획된 프로젝트였던 만큼, 난삽한 문맥사이를 헤매지 않아도 될 만큼 친절하다. 저자의 친절함은 ‘더 읽어볼 책들’에서 빛을 발한다. 이 책은 다른 책으로 연결되는 안내서와도 같다. ‘산’처럼 버티고 있는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서 거쳐 갔던 그 길을 상냥한 주석까지 달면서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치 어렸을 적 소풍에서 보물쪽지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마침 어제 저녁 강신주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자신과 가족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성찰적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방법을 모르는 사랑’이라는 그의 말이 아마도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또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 또 읽고, 문학으로 옷을 갈아입은 철학을 만나는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섬세한 저자는 자신을 만나러 온 독자들을 고유명사로 부르고 기억하려 애썼다. 책을 탈고하고 세 번 울었다는 그는 절정을 다시 느낄 가능성이 사라진다면 글쓰기는 멈출 것이다. 아마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탈고하고도 그는 통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무수한 통곡을 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깨달음을 나눠주려는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얼어붙은 영혼을 깨트리는 한 자루의 도끼”를 쥐어준다. 스물두번째 시인이 되어야 할 우리는 철학자와 시인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적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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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로스 2011-11-0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이 좋은데 책 제목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말씀드린거였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