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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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차일드 44>로부터 5년, 톰 롭 스미스의 신작 <얼음 속의 소녀들>이 나왔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차일드 44>에서 시작된 전직 KGB 요원이었던 레오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얼음 속의 소녀들(The Farm)>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상당히 충격적인 도입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p.7)'지만, 그 아버지의 전화는 가족들 간에 쌓여 있던 신뢰를 뒤집고 애써 숨겨뒀던 거짓말을 꺼내게 만드는 방아쇠가 되었다. '엄마가 망상에 빠졌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망상에.(p.8)'


  어머니가 망상에 빠졌다니? 부모님은 스웨덴으로 건너가 농장에서 아주 잘 적응하고 계실 거라 생각했던 다니엘은, 어머니의 메일이 차츰 뜸해지는 것이 긍정적인 신호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그러나 다시 어머니의 메일을 열어보았을때, 다니엘은 어머니의 절규를 발견한다. 도대체 왜 어머니는, '다니엘!'이라는 한 단어만을 보냈을까.


  다니엘은 자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돕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러나 히드로 공항에서 다니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어머니와 마주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들'과 한패라 나를 망상에 빠진 환자로 몰아가고 있다며, 그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에 아버지가 연루되어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가 범죄자라 주장하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미쳤다는 아버지. 다니엘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이것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양자택일의 질문보다 더 가혹하기 그지없다.



  다니엘은 일단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최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머니는 그 농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다니엘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로 한다.




  어머니가 스웨덴으로 건너가 겪었던 일,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은 아들 다니엘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에게 부여된다. 독자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의 여부를 두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스웨덴의 시골 마을, 끈끈한 연대감이 있는 동시에 농장과 농장 사이의 거리감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는 어떤 공동체를 감싸고 있는 관계도에서 영국에서 불쑥 건너온 중년 부부의 위치를 함께 찾아 헤맨다. 이방인으로서의 고립감과 미친 (혹은 미치지 않은)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따라가 보자.


  어머니 틸데는 이방인에 대한 주민들의 꺼림칙한 태도에 맞서고 마을에 숨어 있는, 모두가 모른 체 하는 비밀을 찾아 숲 속을 거닌다. 그 불안감을 안고 마주하는 농장의 숲 속은 서늘한 비밀을 숨겨두고 있는 듯하다. 그 안에서 틸데는 실마리를 찾아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대로 퍼즐 조각을 맞춰나간다. 그리고 맞춰지고 있는 퍼즐의 그림을 보며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다니엘 그리고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할 수밖에! 그리고 마주하게 된 '진실' 역시 그 동안의 압박감과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일드 44>의 레오가 체제의 무게에 짓눌려 진실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에서 발견하는 것은 체제만큼이나 무거운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얼음 속의 소녀들>의 다니엘 역시 체제만큼이나 무거운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의 파편을 찾아가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친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더욱 무거운 것은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연대감' 그리고 그 틈을 살짝 파고드는 의심이라는 날카로운 송곳이 있기 때문이고, 그 틈을 파헤쳤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이라는 껍데기 속의 알맹이였기 때문이다. 그 알맹이의 모양새가 어떠했을까? 그 무게를 받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품어야 했던 그 알맹이는.



  <차일드 44>와 <얼음 속의 소녀들>은 다른 모양새로 같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진실을 마주하기란 이토록이나 어렵다.


  부디,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스웨덴의 숲 속을 거닐며 미치광이(혹은 멀쩡한)가 선사하는 서스펜스를 즐겨보시길.

 




_20150104~20150106





* 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_p.7

마지막으로 지난 몇 달간 일어난 사건들이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라면 정말이지 난 뭐든 다 할 거라는 말을 꼭 해둬야겠다. 아, 현실이 그렇다면 내 삶이 얼마나 편해질까. 무서운 정신병원에 가서 미치광이로 낙인찍히는 굴욕을 당한다 해도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범죄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 사소한 대가일 테니 말이다._p.46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기차에서 스치고 지나간 사람을 단순히 그 이유로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한 이야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단편적인 진실이 섞여 있다고 해서 그걸 진실이라고 주장할 순 없습니다._p.144

나는 익숙함을 통찰로 오해했고, 같이 보낸 시간을 서로에 대한 이해의 척도와 동일시했다. 그보다 더 나빴던 건, 아무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안락한 생활을 받아들이고, 부모님이 자신의 가정환경과는 아주 다른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바람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한 번도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만족해버렸다는 점이다._p.158

난 엄마의 손을 놨다.

"엄마, 날 믿어요?"

"난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절 믿어요?"

엄마는 잠시 내가 한 질문을 생각해보더니 생긋 미소를 지었다._p.328

나는 오래전에 이 이야기들을 직접 읽어보고 내가 이 이야기를 읽어주길 엄마가 원한 건 아닌지 궁금해했어야 했다. 엄마는 아주 쉽게 이 책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가까이 두고,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이유는 밝히길 거부한 채 이 이야기들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전했다. 나는 그렇게 하면 그 순간이 더 밝고 길게 타오를 거라 믿으며 엄마와 행복을 나누었던 걸 떠올렸다. 한편으로 슬픔 역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슬픔을 나누면 그 순간은 훨씬 더 짧고 덜 선명하게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나는 엄마에게 슬픔을 나누자고 할 수 있게 되었다._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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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키메 스토리콜렉터 2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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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간만에 읽었다. '도조 겐야 시리즈'에 이어 단편집 <붉은 눈>에 이어 호러를 중점으로 하는 장편을 읽게 된 것은 <노조키메>가 처음인데,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그것도 물리적인 결합이 아닌 화학적인 변화까지 일으키는 융합인 것일까 하는 측면에서 <노조키메>는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타일을 더 선호하게 된다.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한, 논리적인 추론을 나름대로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키메>가 실마리를 얻어 '어떤 의문점'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노조키메>의 화자는 작가 '미쓰다 신조'다. 심지어 서장에서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애초에 내가 <붉은 집>을 읽으면서 만나봤던 구체적인 작품명이 들먹여지면서 리얼리티를 강조하기까지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이건 진짜 이야기일까, 아닐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서장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솜씨, 정말 탁월하다.

 

  그리고 '노조키메'라는 존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야기 밖으로 물러나고 두 명이 다른 시기에 경험했던 이야기를 연달아 들려준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떠난 곳에서 겪은 '엿보는 저택의 괴이' 그리고 민속학 연구자가 50년동안 수기로 담아둔 채 세상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종말 저택의 흉사'. 이 역시 누군가의 경험담이라는 형태로 이것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아리까리하게 만들고 있어 모호함과 공포심을 슬쩍 배가시킨다는 것은 두 말 하면 입 아플테고.

 

 

  '엿보는 저택의 괴이'에서는 리조트에 아르바이트를 떠난 네 명의 대학생이 리조트를 둘러싸고 있는 산 너머의 폐촌에 방문하면서 벌어진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묘한 순례자 모녀의 존재, 마치 깨어진 경계를 나타내는 듯한 사각형의 바위, 그리고 폐촌이 틀림없는 마을의 빈 집에서 느껴지는 찌를 듯한 시선, 그 이후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일행들의 시선과 기묘한 죽음, 그리고 어딘가 빈 틈이 있으면 나타나는 한 소녀.

 

  '엿보는 저택의 괴이'에서는 그 모든 사건의 원인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민속학자의 수기 속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친구의 고향을 방문하면서도 집락촌에서 친구의 본가의 미묘한 위치와 친구의 기묘한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다. 게다가 흉사가 벌어지는 당시의 분위기가 꼼꼼하게 그려지면서 '엿보는 저택의 괴이'에서의 실마리들이 하나 둘 엮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노조키메>의 포인트는 바로 '나름의 조리'다. 분명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원천을 찾아갈 법도 하지만, 오히려 소설은 그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키메'라는 존재는 나름의 조리를 가지고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사람에게는 시선을 느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노조키메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흐름을 기저로 '엿보는 저택의 괴이'에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기묘한 이야기들이 '종말 저택의 흉사' 속 실마리를 단서로 '나름의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조리 있는 이야기'로 치환된다. 이것은 마치 '사건'편에서 단서를 흩어두고 '해결'편에서 그 조각들을, 조리 있게 맞춰나가는 과정과 흡사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모든 것을 속시원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미쓰다 신조는 아마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일 테다. 기괴한 죽음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조리는 알 수 있다니, 이것 참 묘한 이야기이다.

 

 

 

그런 존재를 이론으로 생각하는 건, 우스운 얘기죠. 그렇지만 무슨 일에나 조리가 있는 법입니다. 어디까지 인간의 지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은 괴이한 현상도 그 조리를 따라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_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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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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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의 어떤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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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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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짧은 독서력을 돌이켜 보았을 때, 실은 판타지로 분류되는 소설은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몇몇의 작품은 내 학창시절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는데, 판타지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던 이우혁의 [퇴마록]은 내 중학교 1,2학년의 순정을(준후가 다.. 했잖아요..), 전민희의 [세월의 돌]과 [룬의 아이들 - 윈터러],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눈물을,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는 고등학교 2,3학년의 학업을 앗아가 버렸으니, 이 정도면 꽤나 굵직한 사건으로 자리잡고 있는 책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받고, 전동조의 [묵향]이 어느 한 여름방학을 흠뻑 적셨는데 아직 완결도 안 났거니와 더 이상 읽지를 않고 있어 리스트에 넣지는 않고 살짝 언급만 해 둘까 한다. 아, 물론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있다. (쓰고 보니 많이 읽었네;;)

 

 

  어쨌든, 나는 왜 그렇게 판타지 소설에 열광한 것일까. 수많은 작품들이 다른 형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누구나 품고 있는 그 '하나의 우주'를 보여주는 근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돌고 돌아왔을테다.

  그리고 감히 생각건대 판타지, 그 환상의 세계는 비일상이라는 형태로 이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그 곳에서는 개인과 사회가 때로는 분리된다. 떠남과 머무름이 쉼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일상임에도, 이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중세 유럽의 어느 한 단면일 수도 있고, 실크로드를 건너던 어떤 대상(大商)의 발자취일 수도 있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길을 떠난 젊은 선비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하나 켜켜이 쌓인 역사의 한 단면을 빌려 그 안에 조금은 이질적인 무언가를 가미해 만들어낸 세계. 그렇기에 그 곳에서는 이상(理想)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딛고 있는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을 노래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 높이는 상대적인 비유일지언정,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고 '피를 마시는 새'가 되며 '세월의 돌'을 찾는 과정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프롤로그가 있다. 달의 그림자가 비추어진 바다를 건너 도달한 하나의 세계.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이 있는 세계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누군가, 그러나 온전히 마음을 두기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며 시작된 모험, 지극히 당연히 떠오르는 '왜 나여야만 했을까'라는 의문, 혹독한 여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숨겨졌던 나의 일면,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 다다른 장소.

 

  붉은 머리카락이 신경쓰이는 요코는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여고생이었다. 학급의 분위기를 쥐고 있는 무리들이 따돌리는 여학생에게 모진 소리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편을 들며 그 무리들과 대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어느 날, 그런 일상이 뒤흔들렸다. 자신을 찾아온 이상한 차림새의 남자에 이끌려 난생 처음 보는 짐승과 대적해야 했고, 그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니. 반강제로 이끌려 요코는 바다 위 달의 그림자를 건너 낯선 세계로 내동댕이쳐졌다. 자신을 '해객'이라 부르는,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 속에서 요코는 사람에 대한 불신을, 사람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믿고 싶은 그 마음을 발견하는 여정을 거쳐간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요코의 마음의 여정에 있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여고생이었던 요코는 오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자신에게 다가온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 호의는 거짓의 가면이었고 이를 계기로 요코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호의가 아니다, 그저 내가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한 행동일 뿐이다, 라고, 요코는 자신을 끊임없이 습격하는 요마와 해객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계에 혼자 싸워나가야 할 정당성을 돌아갈 고국에서 찾아내며 모진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반수인 라쿠슌을 만나면서 요코는 다시금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이다지도 가혹한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믿고 싶은 마음이 갈팡질팡한 와중 자신은 '기린'인 게이키가 선택한 '경국의 왕'이라는 사실을 소화시켜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십이국의 세계에서 요코의,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왕으로서의 운명이 드러나면서부터 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코는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통받는 경국의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요코는 어깨를 짓누르는 왕의 무게에 괴로워하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요코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기로 한다. 결국 '높은 곳'에 다다른 필연. 그 필연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왕에 대한 이상을 거리낌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타협한 왕의 모습을 본다. 또 한 번, 이 환상의 세계 속에서, 결국 현실에서 벗어난 세계이기에, 우리는 마음껏 그들의 정치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엿보게 될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 대신, 열두 개의 국가로 압축된 이 세상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그 이야기의 위대한 프롤로그다.

 

 

 

빛 속으로 뛰어든 순간, 내동댕이쳐지는 충격을 각오했지만 그런 아픔은 전혀 없었다. (…) 수면 쪽을 돌아보니 하얀 빛이 달 모양대로 어둠을 도려내었다. 그 표면이 크게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 요코를 태운 짐승은 번쩍이는 빛 속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와 둥근 빛 안으로 돌진했다. 다시 얇은 천이 몸을 스치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뛰쳐나온 곳은 바다 위었다. 위아래 감각이 뒤바뀌었다._p.50

 

사람은 몸속에 바다를 품고 있다. 그 바다가 지금 격렬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진다. 표피를 찢어 눈앞의 남자에게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_p.154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니다. 살고 싶은 것도 아니리라. 요코는 포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돌아간다. 반드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뭐가 기다릴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 하니까 내 몸을 지킨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_p.204

 

이런 세계에 내던져져 배고프고 애달프고 상처투성이고, 이제 일어날 수조차 없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고, 그것만으로 이를 악물었건만. 솔직히 요코가 고국에서 맺어 온 인간관계는 이런 것뿐이었다. (…) 기다리는 사람 따위 없는데. 요코의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사람들은 요코를 이해하지 못한다. 속이고 배신한다. 그런 건 이쪽이고 저쪽이고 아무 차이도 없다._p.230

 

이 세계에 요코의 편은 없다.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고독한지 깨달았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내 편, 머무를 곳 하나 없는 목숨이라서 진심으로 아까웠다. 이 세계 모든 것이 내 죽음을 바란다면 살아남겠다. 원래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귀환을 바라지 않아도 돌아가 보이겠다._p.240

 

─그렇게 목숨이 아까운가.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생명의 은인을 버리고서.

─진짜 은인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도와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라쿠슌은 숨겨 주었어.

─꿍꿍이가 있어서 한 일이다. 선의가 아니다. 그런 인간은 언제든 배신한다.

─선의가 아닌 인간이라면 버려도 되는 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_p.288

 

요코가 남을 믿는 것과 남이 요코를 배신하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요코 자신이 상냥한 것과 타인이 요코에게 상냥한 것은 아무 관계도 없어야 한다.

홀로, 또 홀로, 이 넓은 세계에 외톨이로 도와줄 사람도 위로해 줄 사람도 누구 한 사람 없더라도, 그래도 요코가 남을 믿지 않고 비겁하게 행동하고 버리고 도망치고 하물며 남을 해칠 이유가 될 수는 없는데._p.293

 

요코는 고국에서 남의 안색을 살피며 살았다. 누구한테도 미움을 사지 않도록,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남과 대립하기가 두려웠다. 혼나는 것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 겁냈나 싶다. 어쩌면 겁쟁이였던 것이 아니라 그저 게을렀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보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편이 편했다. 남과 대립하면서까지 무언가를 고수하기보다 일단 주위에 맞춰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편이 편했다. 타인의 사정에 잘 맞춰서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편이 자기를 탐색하고 남과 날ㅇ르 세워 싸우며 살아가기보다 편했던 것이다._p.303

 

* 인용 부분은 실제 책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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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공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재담 섭렵기 지식여행자 16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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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웃긴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데에는 개인차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특히 나는 그렇다) 감탄하면 어떻게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유머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기억력 탓에 내용 일부가 빠지거나 더해지며 각색되기도 한다. 요컨대 민화나 수수께끼, 속담과 동일한 민간전승의 일종이다._p.13




  사실 우리 나라 설화, 그 중에서도 민담의 특징을 꼽으라 하면 단연코 '풍자와 해학'이다. 그래서인지 사실 웃긴 이야기를 즐긴다는 건 상당히 보편적이다. 게다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발전으로 전승이 빨라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을 뿐. 집단 속에서 유머를 만들어내고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다 똑같지 않을까,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똑같은 법이니.




문장으로 완성된 소설이나 에세이라면 판매 부수가 늘어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인기 작가의 작품이거나 유명 연예인의 이야기를 듣고 적은 것, 아니면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거나 출판사의 프로모션에 따르는 것 등이다. 하지만 민간전승에는 어떠한 권위도 통하지 않는다. 유머 자체의 내용만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즉 웃기고 재미있는지 여부로 판단되는 아주 가혹한 세계다._p.13~14




  그렇다면 유머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요네하라 마리는 <유머의 공식>에서 유머들을 샅샅이 분해해 웃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분석해낸다. 유머집은 수없이 많아도 유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라나. 자, 나도 이제 양질의 개드립을 양산할 수 있겠어!





  그런데 사실 그 시점에서 나는 깊은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누가 유머를 이렇게 공식에 맞추어 만들어낸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유머라는 것은 그 사람의 '센스'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유머의 공식>은 수많은 재담들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한 다음 이 이야기는 이러해서, 저 이야기는 저러해서, 이런 점에서 웃음이 유발된다는 것을 분석하고는, 그 장의 마지막에 '응용문제'를 삽입해 두고 독자도 함께 유머를 만들어 내 보라고 권유하는데, 맥없이 K.O. 응용력이 부족해 나는 이다지도 웃기지 않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중간에 삽입된 '와 이 재치 있는 대답은 누가 한거야?' 했더니 본인 경험이라나 뭐라나. 네, 여사님 역시 기본적으로 센스가 있는 분이셨던 거다. 흑.



  유머의 공식은 허를 찌르는 기발함도 중요하지만, 그 기발함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지, 재치, 순발력이 필요한 법이다. 어떤 웃긴 대답을 할까 고민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나는 패배자. 다른 누군가의 빛나는 센스를 잘 기억해 뒀다 그냥 써먹는 수밖에 없는 운명인게다.


  사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꽤나 '웃기는' 편이다. '저장고'로서의 용량은 꽤 큰 편이고, 나름대로의 소스(source)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흠칫 하고 당황해 버리는 것은 늘 아저씨와의 대화에서인데, 백이면 백, 당한다. 심지어 유머가 유머로 끝나지 않고 서로가 민망해하는 결과만 낳게 되어 아저씨도 민망, 나도 괜히 죄송스러워지는데, 아저씨, 그 개그, 저한테는 절대 쓰시면 안 돼요. 서로 민망하다구요. 또르르..



  생각해보면 그 시작은 「수학의 정석 : 미분과 적분」을 사러 헌책방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 '유모어' 있지 않은가, 가격 뻥튀기! 상태가 좋은 수학의 정석을 집어든 다음 돌아서서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라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 '오십만원!'. 아, 이건 오천원을 뻥튀기해 어차피 절대로 내지 못하는 가격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합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기에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센스있는 질문을 하셨다 생각하고, 상대방도 유하게 웃으면서 '네 여기 있습니다 오십만원~'하고 오천원을 건네드리면 훈훈한 분위기 연출인데(개인적으로는 전혀 안 맞아요 아저씨..ㅠㅠ), 나는 늘 이러고 마는 것이다. 눈이 동그래지며 '네? 뭐라구요?' 서로가 민망해진 상황에서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친구가 원망스럽다.


  마치 짠듯이 나는 이 질문을 불시에 받으면 당황한 채 받아치지 못하고 '어버버..' 하게 되는데, 이게 센스의 부재이지 뭐란 말인가. 슬프기만 하다.




  역시 나는 창작자로서의 능력은 눈꼽만큼도 없고 남이 만들어놓은 걸 그냥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유머의 공식>을 읽는 동안에도 잘 알 수 있었다. 또르르. 우찌 답변을 만드는 건 잘 안 떠오르면서, 이 상황에 맞는 '저장된 소스'가 있구나! 하는 것만 떠오른단 말이지.



  그래도 역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몇 가지 분석은, 유머는 기본적으로 '사기 수법'과 흡사하다는 점, 수없이 많은 민담에 '3'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이유─현명하고 지혜로운 건 셋째 아들 or 딸인 이유─라던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웃픈 이야기('웃프다'는 정말 훌륭한 조어다!), 고이즈미 총리의 화법이 유머의 공식과 매우 흡사하나 결국 그 화법에 넘어간 일본인들 덕에 마지막 '반전'이라는 유머는 결국 완성되지 못한다는 씁쓸함은 여사님의 신랄함이 즐거운 동시에 역시 비슷한 쓴맛을 느끼게 한다. 혹은,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킨 수많은 웃음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마 <유머의 공식>은 유머에 관한 기본 센스가 있는 이들에게는 그 '센스'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근데 그런 사람들은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는 유머를 분석하는 에세이 그대로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고 쓸쓸하구나. 그러나 타고난 센스가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저도 양질의 개드립을 날리고 시포요.



  그러나 사실 <유머의 공식>이 빛을 발하는 것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다. <유머의 공식>은 오랜 세월동안 집필했던 원고를 다시 손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 다음 출간된 에세이로, 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여사님은 난소암 판정을 받은 다음이었다고 한다. 그 때 웃음을 마주하고 있던 그 마음을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서 이 <유머의 공식>은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유머의 공식>은 요네하라 마리의 마지막 작품이다.




모든 걸작 유머는 사기꾼의 수법과 똑같다는 사실이다._p.14



하지만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는 가여운 야당, 이런 속임수 답변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일본인 덕분에 정작 중요한 마지막 반전이 빠져서 유머로 완성되지 못한다._p.76



카메라를 줌아웃 하여 전체를 바라보면 시시한 트릭이 그대로 드러나서, 거기에 속았다는 사실에 웃음이 난다. 그런데 고이즈미 총리는 줌인을 한 채 결코 줌아웃 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는 국민의 몫이 된다._p.96



일본 속담인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 있다'에 해당하는 러시아 속담은 '신은 3(Trinity)을 좋아한다'로, 여기서 '3'은 신과 예수와 성령의 삼위일체에 해당한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자신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도 '3'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또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무신론자의 논리에서도 결국, '3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 된다. 그래서 (…) 영국인이 좋아하는 민화로 『아기 돼지 삼형제』가 있으며,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민화로는 『곰 세 마리』가 있다. 『신데렐라』의 주인공은 이복 언니가 둘 있는 셋째 딸이고, 안데르센의 「바보 한스」와 러시아 민화인 「바보 이반」에서도 주인공은 영리한(=상식적인) 두 형을 둔 바보(=상식에서 벗어난) 셋째 아들이다._p.107~108




_20140924~20140928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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