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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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짧은 독서력을 돌이켜 보았을 때, 실은 판타지로 분류되는 소설은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몇몇의 작품은 내 학창시절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는데, 판타지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던 이우혁의 [퇴마록]은 내 중학교 1,2학년의 순정을(준후가 다.. 했잖아요..), 전민희의 [세월의 돌]과 [룬의 아이들 - 윈터러],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눈물을,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는 고등학교 2,3학년의 학업을 앗아가 버렸으니, 이 정도면 꽤나 굵직한 사건으로 자리잡고 있는 책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받고, 전동조의 [묵향]이 어느 한 여름방학을 흠뻑 적셨는데 아직 완결도 안 났거니와 더 이상 읽지를 않고 있어 리스트에 넣지는 않고 살짝 언급만 해 둘까 한다. 아, 물론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있다. (쓰고 보니 많이 읽었네;;)

 

 

  어쨌든, 나는 왜 그렇게 판타지 소설에 열광한 것일까. 수많은 작품들이 다른 형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누구나 품고 있는 그 '하나의 우주'를 보여주는 근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돌고 돌아왔을테다.

  그리고 감히 생각건대 판타지, 그 환상의 세계는 비일상이라는 형태로 이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그 곳에서는 개인과 사회가 때로는 분리된다. 떠남과 머무름이 쉼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일상임에도, 이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중세 유럽의 어느 한 단면일 수도 있고, 실크로드를 건너던 어떤 대상(大商)의 발자취일 수도 있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길을 떠난 젊은 선비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하나 켜켜이 쌓인 역사의 한 단면을 빌려 그 안에 조금은 이질적인 무언가를 가미해 만들어낸 세계. 그렇기에 그 곳에서는 이상(理想)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딛고 있는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을 노래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 높이는 상대적인 비유일지언정,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고 '피를 마시는 새'가 되며 '세월의 돌'을 찾는 과정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프롤로그가 있다. 달의 그림자가 비추어진 바다를 건너 도달한 하나의 세계.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이 있는 세계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누군가, 그러나 온전히 마음을 두기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며 시작된 모험, 지극히 당연히 떠오르는 '왜 나여야만 했을까'라는 의문, 혹독한 여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숨겨졌던 나의 일면,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 다다른 장소.

 

  붉은 머리카락이 신경쓰이는 요코는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여고생이었다. 학급의 분위기를 쥐고 있는 무리들이 따돌리는 여학생에게 모진 소리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편을 들며 그 무리들과 대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어느 날, 그런 일상이 뒤흔들렸다. 자신을 찾아온 이상한 차림새의 남자에 이끌려 난생 처음 보는 짐승과 대적해야 했고, 그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니. 반강제로 이끌려 요코는 바다 위 달의 그림자를 건너 낯선 세계로 내동댕이쳐졌다. 자신을 '해객'이라 부르는,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 속에서 요코는 사람에 대한 불신을, 사람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믿고 싶은 그 마음을 발견하는 여정을 거쳐간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요코의 마음의 여정에 있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여고생이었던 요코는 오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자신에게 다가온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 호의는 거짓의 가면이었고 이를 계기로 요코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호의가 아니다, 그저 내가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한 행동일 뿐이다, 라고, 요코는 자신을 끊임없이 습격하는 요마와 해객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계에 혼자 싸워나가야 할 정당성을 돌아갈 고국에서 찾아내며 모진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반수인 라쿠슌을 만나면서 요코는 다시금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이다지도 가혹한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믿고 싶은 마음이 갈팡질팡한 와중 자신은 '기린'인 게이키가 선택한 '경국의 왕'이라는 사실을 소화시켜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십이국의 세계에서 요코의,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왕으로서의 운명이 드러나면서부터 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코는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통받는 경국의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요코는 어깨를 짓누르는 왕의 무게에 괴로워하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요코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기로 한다. 결국 '높은 곳'에 다다른 필연. 그 필연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왕에 대한 이상을 거리낌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타협한 왕의 모습을 본다. 또 한 번, 이 환상의 세계 속에서, 결국 현실에서 벗어난 세계이기에, 우리는 마음껏 그들의 정치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엿보게 될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 대신, 열두 개의 국가로 압축된 이 세상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그 이야기의 위대한 프롤로그다.

 

 

 

빛 속으로 뛰어든 순간, 내동댕이쳐지는 충격을 각오했지만 그런 아픔은 전혀 없었다. (…) 수면 쪽을 돌아보니 하얀 빛이 달 모양대로 어둠을 도려내었다. 그 표면이 크게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 요코를 태운 짐승은 번쩍이는 빛 속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와 둥근 빛 안으로 돌진했다. 다시 얇은 천이 몸을 스치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뛰쳐나온 곳은 바다 위었다. 위아래 감각이 뒤바뀌었다._p.50

 

사람은 몸속에 바다를 품고 있다. 그 바다가 지금 격렬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진다. 표피를 찢어 눈앞의 남자에게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_p.154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은 분명 아니다. 살고 싶은 것도 아니리라. 요코는 포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돌아간다. 반드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뭐가 기다릴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 하니까 내 몸을 지킨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_p.204

 

이런 세계에 내던져져 배고프고 애달프고 상처투성이고, 이제 일어날 수조차 없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고, 그것만으로 이를 악물었건만. 솔직히 요코가 고국에서 맺어 온 인간관계는 이런 것뿐이었다. (…) 기다리는 사람 따위 없는데. 요코의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사람들은 요코를 이해하지 못한다. 속이고 배신한다. 그런 건 이쪽이고 저쪽이고 아무 차이도 없다._p.230

 

이 세계에 요코의 편은 없다.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고독한지 깨달았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내 편, 머무를 곳 하나 없는 목숨이라서 진심으로 아까웠다. 이 세계 모든 것이 내 죽음을 바란다면 살아남겠다. 원래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귀환을 바라지 않아도 돌아가 보이겠다._p.240

 

─그렇게 목숨이 아까운가.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생명의 은인을 버리고서.

─진짜 은인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도와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라쿠슌은 숨겨 주었어.

─꿍꿍이가 있어서 한 일이다. 선의가 아니다. 그런 인간은 언제든 배신한다.

─선의가 아닌 인간이라면 버려도 되는 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건가._p.288

 

요코가 남을 믿는 것과 남이 요코를 배신하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요코 자신이 상냥한 것과 타인이 요코에게 상냥한 것은 아무 관계도 없어야 한다.

홀로, 또 홀로, 이 넓은 세계에 외톨이로 도와줄 사람도 위로해 줄 사람도 누구 한 사람 없더라도, 그래도 요코가 남을 믿지 않고 비겁하게 행동하고 버리고 도망치고 하물며 남을 해칠 이유가 될 수는 없는데._p.293

 

요코는 고국에서 남의 안색을 살피며 살았다. 누구한테도 미움을 사지 않도록,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남과 대립하기가 두려웠다. 혼나는 것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 겁냈나 싶다. 어쩌면 겁쟁이였던 것이 아니라 그저 게을렀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보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편이 편했다. 남과 대립하면서까지 무언가를 고수하기보다 일단 주위에 맞춰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편이 편했다. 타인의 사정에 잘 맞춰서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편이 자기를 탐색하고 남과 날ㅇ르 세워 싸우며 살아가기보다 편했던 것이다._p.303

 

* 인용 부분은 실제 책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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