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이 만들어지는 주된 이유는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 상황을 만들어두고 교묘하게 알리바이의 덫에서 빠져나간다. 반대로 말하면, 밀실을 만들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을 찾아내면 그가 바로 범인이다.

  시체를 토막내는 주된 이유는 '운반의 편의성'을 위해서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눈 앞에 놓인 시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를 그대로 범행 장소에 내버려두기보다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둔 채 범행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다. 최대한 발견을 늦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째로 옮기려면? 남의 눈에 띄기도 쉽고 무엇보다 너무 무겁지 않은가. 시체를 해체하는 것 역시 그 못지 않게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범행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힘든 일을 무릅쓴다.

 

 

 

 

 

 

  그렇다면 그 이외에 시체는 왜 토막나는 것일까?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시체가 해체된 9개의 원인을 선사한다. 도대체 그 시체는 왜 토막났을까?


  양쪽 팔다리가 토막난 채 장난감 수갑에 채워져 기둥을 껴안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발견된 시체, 34개의 조각으로 발견된 시체, 잠깐의 마법처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엘리베이터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자 대신 나타난 토막난 시체와 같은 엽기적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어떤 부인이 누드 잡지를 대량으로 구매한 이유가 해체 원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고 곰인형의 팔이 잘렸다 다시 손수건에 꽁꽁 싸매어져 제자리로 돌아간 깜찍한 이유를 추측하기도 한다. 그냥 시체를 내버려둬도 될 일을 굳이 시체가 발견되기 좋은 장소에 토막난 채 발견된 이유는 무엇이며, 전단지 속 모델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해체'하는 일도 일어나고, 머리만 사라진 시체가 발견된 다음부터 다른 시체와 함께 이전 피해자의 머리가 함께 발견되는 '슬라이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추리극도 등장한다.



  시체 토막을 퍼즐로 치환하면 너무 잔인한 소리가 아닌지, 사실 예전 같았으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요즘 본격 미스터리를 별로 안 읽은 건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벌렁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 벌렁거림을 잠깐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써 보자면, 이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퍼즐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퍼즐을 만든 사람과 푸는 사람 사이에 규칙을 합의한다면 충분히 연역을 해 나가면서 실마리를 발견하겠지만, 이 책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합의된 규칙 대신 퍼즐을 푸는 이가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시체의 해체 원인에 일반론이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가득한 것을,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의 사고 과정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메울 수 없을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그 상상력을 적절한 블랙 코미디와 버무린 연작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앞선 이야기를 한데 묶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결말을 내놓는 최종인 「해체 순로」다. 힌트는 충분히 주어졌으니 바른길을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나는 못 풀었다.)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데뷔작이다. 데뷔작부터 '시체의 해체'라는 과감한 퍼즐을 도입한 것을 생각해 보면 현재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본격 미스터리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시리즈에 대한 길잡이가 주어져 있다는 것도 <치아키의 해체 원인>을 한 번쯤 읽어볼만한 이유이다.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자신을 해체로 이끈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트릭으로 평가받는 <점성술 살인사건>과 최근에 만나본 가사이 기요시의 <바이바이, 엔젤>이 반갑다. 특히 현상학적 직관을 통해 시체가 토막난 현상을 분석하는 야부키 가케루의 추리도 '토막'의 다양한 해석을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다만 후기에 '카사이 키요시의 <바이바이 에인절>이라고 번역을 해 두다니, 그래도 나름 국내 출간작인데요...ㅠㅠ)


  또 하나, 데뷔작에서 창조된 캐릭터 다쿠미 치아키와 헨미 유스케, 다카세 치호는 '닷쿠 & 다카치 시리즈'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시리즈 속 등장인물들이 다듬어지기 이전의 모습을 한 번 만나보는 즐거움도 숨어있다. 경찰이 범죄를 해결하고 말고를 떠나 시체가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 각자의 이유로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찾아나서는데, 그냥저냥 프리터로 연명하며 책 읽기에 몰두하며 시체의 해체 원인에 대해 골몰하는 '다쿠미 치아키'와 나름대로 건실한 교사로 생활하고 있는 듯한 '헨미 유스케'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다카세 치호', 그들의 '명정' 추리는 술이 빠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건재한 모양이다.

 

 

 



"농담이야, 농담.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마츠우라 야스에의 시체였어."

"시체?"

"그래. 왜 이렇게 토막을 낸 걸까 싶어서. 그 이유 말이야."_p.21~22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렇게 되뇌었다. 시체를 해체하는 것은 시간과 수고가 드는 작업이다. 그것은 어쩐지 바보 같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진리였다._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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