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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 - 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엮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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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어찌되었건 일제시대 조선의 최고 원로로서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특히 본인의 경우 윤치호에 대해서 딱 한 마디로 "친일파의 대부"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나 다른 독서모임에서는 최소한 윤치호는 기존의 친일파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친일파면 친일파지 무슨 고려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과 달리 친일파의 숙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가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스스로 윤치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 <윤치호 일기>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징검다리였다.

 원래 윤치호 일기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계속되어서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특히 영어로 대부분이 쓰여져 원문을 읽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윤치호 일기 중에서 일제시대의 것만을 대상으로 각 주제에 맞게 발췌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특히 일기를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배열할 경우 흐름을 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편역자인 김상태 교수는 [3.1운동 전후], [만주사변 전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전후], [일제하 조선 기독교와 윤치호], [윤치호가 본 일제하 조선의 자화상] 이렇게 5개의 주제로 윤치호 일기를 발췌하여 구성한 점은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다. 단순히 시간 순서로 번역하는 것이 쉬웠을텐데 이렇게 일일이 주제별로 발췌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일단 윤치호에 대해 평가하기에 앞서서 최소한 윤치호가 장장 60년 동안 매일같이 영어로 일기를 쓴 점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일상생활과 공인으로서의 활동상황은 물론, 국제정세와 국내 정국의 동향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윤치호 일기는 유명인사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적잖이 나타나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집필 당시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행위를 과장 또는 은폐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 드러나는 윤치호의 생각은 굉장히 신뢰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도 윤치호의 영향을 받아서 매일 매일 일기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일기라 함은 원래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역할도 하지만 윤치호 일기를 보니 역사적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윤치호 만큼 역사에 영향을 미칠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준비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윤치호 대하여 편역자인 김상태 교수는 "'주관적'으로는 분명히 애국자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객관적'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저버린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평하고 있다. 아마도 김상태 교수는 윤치호에 대해 이른바 쉴드를 쳐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던 같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데 나는 김상태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윤치호 일기를 끝까지 읽어본 결과 윤치호는 3.1 운동에 반대하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가 징병제를 실시했을 때 찬성 의견을 방송을 통해 발표하고 각종 친일 단체에 참여했으며 특히 기독교 YMCA의 친일을 주도하는 등 분명 친일파 대부로서의 행동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무슨 '주관적'으로는 애국자라는 등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윤치호를 감싸주는가? 설혹 윤치호가 '주관적'으로 애국자라고 하더라도 김상태 교수가 윤치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이상 어떻게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지 매우 의문이다. 

 이 책은 일제시대 이른바 지식인이 어떻게 친일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립협회 회장등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존경받는 원로로 추앙받던 윤치호가 변절하는 과정을 이 책을 통해 하나 둘 깨달으면서 존경받는 원로가 사라진 우리나라의 역사의 비참함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읽다보면 윤치호가 조선 민족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함으로써 읽기에 불편한 곳도 곳곳에 있지만 한국 일제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으로써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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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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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간디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즉 간디만의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었다. 간디의 유토피아는 국가주권 폐지를 통한 단일 세계 정부의 구성(p.8), 국가가 없는 민주주의(p.12), 산업화에 반대하고 소박한 삶과 고매한 사상의 추구(p.40~41), 마을 스와라지(p.61), 생계를 위한 노동 및 공정한 분배(p.66), 비폭력과 탈중심화(p.70), 보호무역(p.94), 전인교육(p.113) 등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런 삶이 [이상적인 삶]인지 부터 의문점이 생기고 또한 과연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일단 간디도 자신의 꿈꾸는 사회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은 것 같다.(p.108) 분명히 고백하건데 아직 젊은 나로서는 간디처럼 <이상주의>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본인도 전세계 사람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지만 이럴 때 대부분 알고 있는 체게바라의 명언이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래서 나는 과연 간디의 꿈꾸는 삶이 [불가능한 꿈]인지 하나 하나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먼저 국가주권 폐지를 통한 단일 세계 정부의 구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궁극적으로 단일 세계 정부 수립이 최선이 될 것이라는데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단일 세계 정부 구성의 시초가 될지도 모르는 UN을 보면 현실 정치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1학년 시절에 현재는 호주대사로 임명된 정치외교학과 김우상 교수의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께서는 UN도 미국의 단일패권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만약 UN(united nations)이 속된 말로 말을 잘 듣지 않을 경우 UC(united country)라도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국가주권 폐지를 통한 단일 세계 정부의 구성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어서 국가가 없는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면 간디도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p.13) 그래서 대안으로 “국가를 분산시키는” 마을 스와라지를 제시하였는데 솔직히 말해서 “국가를 분산시킨” [마을 스와라지]가 바로 또 다른 [국가]가 아닌지 궁금하였다. 대체 두 개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마을 스와라지]라 함은 단순히 이름만 바꾼 [국가] 자체가 아닐까? 그냥 단순히 권력만 분산시킨다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마치 [마을 스와라지]에 대해 간디의 글을 읽고 있으면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오버랩 되는 것은 나만 그럴까?



또한 산업화에 반대하고 소박한 삶과 고매한 사상의 추구에 대해 생각해보면 간디는 굉장히 기계와 산업화를 반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사악함은 산업주의에 내재하는 것이어서 산업을 아무리 사회화해도 그 사악함을 제거할 수 없다(p.42)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초창기 [천민 자본주의]로 인해 많은 사악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과거의 [천민 자본주의]는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나마 사악함을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간디가 다시 살아난다면 산업화를 통해 인간의 수명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특히 생계를 위한 노동 및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많은데 개인의 지적 능력은 오직 인류에 봉사하는데 쓰여져야 한다(p.66)는 간디의 견해에 동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간디도 너무 앞서 나가게 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간디로 아래 글을 쓰고 나서 아차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디는 우리의 시간의 대부분은 육채노동에 바쳐져야 하고, 오직 조금만이 독서에 주어져야 한다(p.67) 라고 주장하는데 뭐 이건 반론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자들의 재산 신탁(p.69)을 주장하는데 이 부분의 논리도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평등한 분배가 이상이므로 공평한 분배를 차선으로 추구하는데(p.68) 과연 부자들의 재산 신탁과 공평한 분배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부자들의 재산 신탁이라 함은 평등한 분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재산 신탁한 것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사회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인가? 나중에 사용하고 돌려줄 것인가? 절대 그럴 일을 없을 것이니 한마디로 그냥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말의 유화된 표현 아닐까?



이어서 비폭력과 탈중심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비폭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농업적으로 조직된 인도는 육해공군을 잘 갖춘 도시화된 인도보다 외국의 침입을 받을 위험이 적다(p.70)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펴는지 궁금하다. 과연 인도는 과거에 농업적으로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나라는 도시화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것인가? 그리고 인도가 왜 현재 다른 나라의 무시를 받지 않는가? 그것은 [핵]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간디가 주장하는 보호무역(p.94)은 개인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원래 경제학과 경영학에 대해 경험이 미천한 관계로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에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책을 통해 영국이나 미국이 IMF, 세계은행, WTO 3인방을 통해 각 국에 강요하는 자유무역의 허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나라들도 자신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쟁력을 키울 때까지는 보호무역을 하였으며 세계적인 산업 경쟁력을 갖추고 나서는 자유무역을 다른 나라에 강요함으로써 올라올 때 사용한 사다리를 치워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이탈림, 혹은 전인교육(p.113)으로 대표되는 간디의 교육관에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간디는 지력의 올바른 교육은 오직 손, 발, 눈, 귀, 코 등 신체기관의 적절한 운동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p.113)고 말하고 있다. 즉 적절한 지능 발달에는 몸과 마음의 교육과 함께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추구한 교육 목표인 전인교육(全人敎育)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빼자고 주장(p.117)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라고 할 것이다. 대통령이 영어몰입교육을 주장하는 판에 이런 주장을 했다가는 미친 사람 소리 듣기에 딱 좋을 것이다. 본인은 현재 영어가 일종의 학벌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어가 이른바 상류층으로 편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으며 영어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대물림되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어를 배우지 말자는 것은 너무 앞서간 생각이다. 영어는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나오는 논문의 대부분은 영어로 작성되고 있으며 영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입장에서 영어라 함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본어와 같이 인도의 문화를 왜곡할 수 있으며 당시 [친영파]의 주요 출세 수단이었던 만큼 이를 배척한 간디의 생각은 이해되지만 현제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개인적인 생각으로 간디가 주장한 이상적인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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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평전
클로드 B. 르방송 지음, 박웅희 옮김 / 바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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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우리가 토번(土番)이라고 부르는 [티베트]에서 큰 민중 봉기가 있었다. 올해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여러가지 고민할 변수가 많았던 중국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민중 봉기는 비록 [완전 독립]이라는 소기의 성과는 얻어내지 못하였지만 티베트 국민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널린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언론>이란 여러가지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국내 불교단체에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고자 하였지만 이를 불허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정확히 <티베트 문제><달라이 라마>에 대해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교적 제 3자의 입장인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저널리스트가 달라이 라마에 대해 평전을 서술한 만큼 우리를 현혹시켰던 [선입관][편견]을 벗어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나의 기대는 충분히 절반 이상 만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달라이 라마의 삶을 시간의 순서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제도가 시작된 정치, 역사학적 분석과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티베트에 대한 문화적인 분석도 같이 포함되어 있어서 티베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은 마치 독자가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글쓴이의 질문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답변을 듣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전통][종교]의 알 수 없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글쓴이는 현실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티베트 독립]과 종교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환생] 등에 대해 거침없는 질문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답변 또한 '우문 현답'이라는 오래된 고사성어가 이야기하는 그대로이다.

 

 이 책을 통해 <달라이 라마>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굉장히 많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티베트 독립을 원하면서도 [비폭력]을 추구하는 모습을 첫 손가락에 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전히 독립운동에 있어서 과연 [비폭력]이 효과적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이에 비해 <달라이 라마>가 설파하는 [중도(中道)]라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특히 요새 나를 둘러싼 상황이 [중도(中道)]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보면 같은 책을 봐도 독자의 상황과 지식 수준에 따라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교훈은 다양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이 최초로 프랑스어로 쓰여진 것이 1986년이고 게다가 중역본인 만큼 현재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리고 과연 번역이 성공적이었는지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글쓴이도 [서양인]인 프랑스인인 만큼 악명 높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력 아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도 아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티베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으며 서구의 물질 문명이 우리에게 채워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양 '정신 문명'의 최고봉인 <달라이 라마>를 간접적이로나마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으로써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직접 대한민국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과연 기독교를 신봉하는 대통령 아래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날 수 있을지… 그 때까지 이 책으로나마 간접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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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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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장히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 격인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이 겪으신 <한국전쟁>이나 군사독재시절을 겪지 않았으며 나의 선배들이 투쟁으로 얻어낸 과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 이렇게 나의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마당에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쓰게 되는 것이 굉장히 죄송하고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내가 돈을 받고 서평을 쓰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무를 가지고 서평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주관적' 관점에서 서평을 쓸 생각이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틀린 점이 있거나 부족한 점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본인의 경우 이른바 '베스트셀러'를 신뢰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 표지의 '띠지'를 보면 이 책이 수많은 신문사와 출판협회 등의 권장도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출판계에도 적용됨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본인은 이 책을 구입하기를 저어할 수 밖에 없었다. 완전 2005년의 최고의 책임을 자랑하는 듯한 '띠지'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도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걱정은 필요없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오히려 이 책 띠지에 나타난 표현들이 오히려 부족하게 보일 정도로 2005년 최고의 책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저자인 리영희 선생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리일 듯 하다. 리영희 선생님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서 1950년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영어교사로 근무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군에 입대하여 7년간 복무했다. 복무 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역임하고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중 박정희정권에 의해 해직되어 복직과 해직을 번갈아 하였다. 그후 일본과 독일 등에서 연구와 강좌를 하였다. 이런 글쓴이의 이력을 보고 있자면 일제시대~6.25~군사독재 등 평탄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우여곡절이 많은 삶 속에서 글쓴이는 끝까지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글쓴이ㅇ[ㄱ[ '지식'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글을 조금은 길지만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꼐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글쓴이의 생각대로 글쓴이는 이 책에서 자신이 꾸준히 '지식인'의 삶을 살아 왔으며 특히 '친일파, 극우보수주의자, 정치인, 재벌, 기독교 원리주의자, 특히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진실을 알리는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고 자랑하고 있다. 물론 나도 글쓴이의 생각과 같이 '지식인'으로서 '깨어있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글쓴이의 '지식인의 삶'에 대한 정의는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좋은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분명 글쓴이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장기 집권을 원하는 극우보수주의자와 기독교 원리주의자, 친일파에 대한 것을 샅샅이 드러낸 점은 높이 살 수 있지만 책 전부에서 사실을 드러내는 것 정도를 넘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다. 한가지 명심할 것은 너무 어떤 대상에 대해 악감정을 드러내게 된다면 그에 대한 독자의 믿음은 반비례 할 수 밖에 없다. 즉, 한마디로 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 다른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미국은 정의로운 나라이며 북한은 우리의 적이라고 인식하시는 분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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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평전 역사 인물 찾기 5
이기형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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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은 누구인가?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몽양은 독립운동가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05. 2.22(화)에 대한민국 정부는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해 건국훈장 2급 대통령장 서훈을 3.1절을 기해 추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동안 “몽양”은 좌익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기존 교육과정에서 외면되었으며 일제시대에 탁월한 민족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뒤늦게 마나 서훈이 된다는 점은 다행스러우나 2급 대통령장에 불과한 점은 아직도 우리나라에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점이다.

 

 그 동안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이른바 “좌익”의 역할을 배우지 못하였고 신탁통치 과정에서 ‘찬탁’을 주장했던 좌익 공산당은 반민족적이라는 점을 배워온 나에게 이 책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책에서 나타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몽양”의 존재와 ‘국부’로 추앙받는 이승만의 “정치깡패”로서의 모습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우익’으로 대표되는 반민족적 친일집단의 망령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몽양”은 일제시대 좌, 우익에 치우치지 않은 유일한 엄정 자주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고 반민주적인 테러를 당해 죽임을 당했다. 테러의 배후에는 경찰과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이승만이 있었고 이승만은 송진우와 김구, 여운형의 암살을 통해 권력을 잡았으며 권력욕에 눈이 멀어 남, 북 통일을 뒤로 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50여년의 남, 북 분단을 방조하였다.

 

 지금 우리 민족은 핵의 위험 속에 생존의 기로에 서 잇다. 이 위기를 벗어나 민족에게 통일과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려면 미, 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자주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몽양의 정치노선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p.s) 참고로 나는 책에 대해서 점수가 짠 편이다. 나름대로 좋은 책임에도 별을 3개밖에 주지 않은 이유는 몽양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전]이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느정도 비판적인 내용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한 일물에 대해 긍정, 비판적인 면 중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켰으니 나도 전체 5점 중에 절반만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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