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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바닐라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1. 오랜만에 읽는 정한아 소설이다. 이십대에 읽었던 소설 중에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면, 늘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마음을 뺏겨 여러 번 곱씹었던 정한아의 중편 소설 《달의 바다》가 떠올랐다. 그때는 참 발랄하고 개운한 소설을 쓴다고 느꼈다. 이제 작가는 엄마가 되었고, 마흔이 되었다. 《술과 바닐라》에 발랄함은 없다. 필연적인 고통과 번민이 더 자주 보인다. 다만, 작가가 자주 그렸던 그 개운함은 여전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2. 이 책에 수록된 염승숙 작가와의 대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에서 정한아 작가가 밝히듯 책 《술과 바닐라》는 작가가 엄마가 되면서 스스로 선택한 필연적인 실수, ‘글쓰기’와 ‘엄마됨’ 사이의 고민과 자책을 승화하여 쓴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들이 작가로서 고민이 가장 많았던 삼십대 중후반에 만든 작품들이며, 자신의 작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죄의식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정한아 작가가 바라는 것처럼 그의 글에선 실패의 자유를 지지하는 위로가, 엄마가 되면서 느낀 또 다른 관계의 확장과 새로운 감각들이 듬뿍 느껴졌다.
3. 염승숙 작가가 할머니 특집이냐고 놀릴 만큼 소설 속에 할머니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완벽한 캐릭터로 이상화되기보다는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제 몫의 노동을 해내고 조금씩 결함을 보이기도 하는, 실존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실제로 정한아 작가는 조부모님과 함께 성장했기에 노인들에게 가지는 감각이 또래보단 친밀하다고 한다. 또한, 근래 노인이 되는 두려움을 실감한다고 대담에서 고백하기도 했다.
4. 표제작이었던 <술과 바닐라>는 '엄마됨'을 겪은 주인공만이 평생 곱씹어 나갈 관계적 특성이 느껴져서 좋았고,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엄마됨'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한 주인공이 "고통이나 후회 없이" 징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처절하게 느껴져 좋았다.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는 첫 문장의 절망과 마지막 문장의 희망이 대구를 이루어 좋았다. 세 소설을 가장 아프고 인상 깊게 읽었다고 기록한다.
나는 이모님이 내 옷을 입고 내 침대에서 낮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사생활이 대체 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새로 쓴 극본으로 미니시리즈 편성을 받았고, 방송국 근방에 작업실도 얻었다. 율이를 마음놓고 떨어뜨려놓을 수 있게 되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 자신이 되는 기분.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강한 섬유유연제 향기까지도. 그마저도 일 년이 지나자 무감각해졌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율이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생애의 가장 작고 약한 시절 자신을 안아주고 지켜준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편 그애는 만듯국을 제일 좋아하고, 숲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남편의 키를 앞질렀다. 나는 종종 이모님에게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와 좋지 않게 헤어진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는 좀더 잘 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딸로 여겼든 아니든, 인생의 한 시기 우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터무니없지만, 나는 언제든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정 :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엄마가 된 여성‘들에 대한 어떤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리라는 기원을 담아 썼던 것 같아요. 글쓰는 엄마로서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관계의 확장과 또 뭐랄까, 실패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그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_대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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