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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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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프랑스, 당시 23살 대학생이었던 작가 아니 에르노는 가벼운 데이트를 이어온 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중절수술을 집도할 경우 의사 산파전문의 약사 면허가 박탈되고 중절수술을 감행한 여성은 금고형 혹은 벌금형에 처해지며 범법을 저질렀다는 사회적 낙인을 찍어대던 시대다. 애초에 피임부터 불법이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아니 에르노는 중절수술을 했다는 지인의 소문을 물어물어 ‘천사를 만드는 여자’(임신 중절 시술을 해주는 여자를 가리키는 프랑스 은어)의 집을 찾는다. 천사의 도움으로 불법 중절수술을 하고 마침내 ‘태아’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아니 에르노는 본인의 중절 수술 경험을 30년이나 지난 90년대에 이르러서야 털어놓았다. “임신 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책 《사건》은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이 ‘임신 상태’에서 ‘임신을 하지 않은 상태’ 사이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다룬 르포에 가깝다. 패혈증보다 두려운 임신을 막기 위해 본인의 다리 사이로 낯선 방의 커튼, 누군가의 흰머리를 보면서 속 깊이 탐침관을 넣어야 했던,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 결혼한 여자들의 사회가 아니 에르노가 기록한 이 단편적인 에피소드 안에 응축되어 있다.

아니 에르노가 대학교 강의실에서 본인과 다른 여학생들을 비교해 보며 실패했다는 기분을 느낄 때, 의사에게서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따위의 모욕적 언사를 들을 때, 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심경을 스스로 타락의 징표라고 여길 때, 탐침관을 질 안에 넣고 닷새 동안 고통을 견딜 때, 변기 물에 ‘물의 아이’를 흘러보내며 짐승같다고 자책할 때 아니 에르노를 임신시킨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법이 구속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었고, 아니 에르노를 집어삼킨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조차 싫어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낙태 후 오텔디유 병원에 입원한 아니 에르노는 이 불공평함과 억울한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들이 거쳐 간 사슬에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 글을 쓴 90년대에 아니 에르노는 17구 파사주 카르디네에 위치한 천사의 집에 가기 전 그가 잠시 들렀던 카페를 오랜만에 방문한다. 차를 마시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던 그 카페, 지하 화장실. 화장실 내부를 묘사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그의 끔찍한 경험은 다행히도 과거에 머문다.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글쓰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물질적인 증거, 일시의 죄책감과 서글픔까지 끌어안는 순간이다. 아니 에르노의 실존적인 글쓰기는 또 다른 세대의 여성들을 반강제적으로 엮어버리는 사슬에서 탈출구로 작용할 것이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 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 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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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5
이소호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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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집의 시각적 인상은 이번에 더욱 본격적이다. 하나의 미술관 전시실을 차용한 시집의 레이아웃은 의도된 여백과 '도슨트의 해설을 받아 적은 것'이라는 설정으로 짜여진 각주를 선보인다.


시인은 핸드폰의 자동완성 기능으로 시를 쓰기도 하고(<소호의 호소>), 여성 공중화장실 칸 사진으로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기도 하며(<공존 화장실>), 2020년 2월 1일부터 29일 동안 일어난 여성 대상 범죄 기사를 모아 시어를 건져올리기도 한다.(<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자해의 고통처럼 느껴졌을 언어 폭력들을 나열해 손목 위 차오르는 피처럼 표현하고(<일요일마다 쓰여진 그림>), 아스키 아트를 활용하고(<결말의 목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우리는>), 11세기 말 한 가톨릭교회 화장실 담벼락에 적힌 낙서를 각색하고(<쉽게 읽는 속죄양>), 음탕하고 미련하고 어리석고 모함하고 추하고 경솔한 등등등으로 낙인찍힌 '여자'인 나를 들여다 본다.(<위대한 퇴폐 예술전>)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읽으면 항상 어디까지가 시인의 진짜 경험담이고, 어디까지가 문학적인 허구인지 궁금해진다. 《캣콜링》의 경진이가 그랬듯 이소호의 뉴 뮤지엄 전시실도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언어 폭력, 여성 폭력을 고발하고 자해를 드러내고 고통을 호소한다. '경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소호 시인의 개명 전 이름인 데다, 시인이 경진이 연작시를 쓰게 된 계기("‘경진’이는 과거의 ‘나’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닌 인물이잖아요. 또 중성적이고. 엄마 세대부터 제 세대까지 오랫동안 흔하게 사랑받은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만한 게 없다고 판단했던 순간부터, ‘경진이네’라는 소제목을 얹어 놓고 연작시를 쭉 써내려 나갔어요."-채널예스 출처)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시인의 내밀한 속내와 경진이가 가진 보편성 사이에서 의식하며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것까지 봐도 될까,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도 될까, 그런데 왜 이 이야기들은 이토록 낯익고 내 것처럼 사무칠까 하는 기분. 시인은 이것을 '소호'의 '시뮬라크르'("하나이면서 다수인, 영원히 반복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보려다 가려진 감추다 벌어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텍스트의 전시가 끝나면 이소호 시인의 짧은 에세이 <완벽한 실패를 찾아서>가 이어진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 정식 무용단원이 되지 못한 채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뉴욕을 헤매던 무용수 프란시스처럼 등단하지 못한 채 시를 쓰는 시인 과거의 이소호가 그려진다. '여성'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매일 실감하며 버티는 가난한 뉴욕 생활은 예술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예술을 향한 회의가 되기도 한다. 감자 한 포대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사람이 그리워 교회에 가고 우정은 사치가 되며 위협은 일상이다.


가난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가난하면 꿈조차 꿀 수 없다. 예술의 중심이라던 이곳에서도 시는 노숙자들이 쓰는 것이었다. 그들은 벽에 시를 전시해두고 적선하는 이에게 답례로 자신이 쓴 시를 적어 준다. 문학은 적선의 대가다. 그럼 돈이 되는 예술은 무엇일까. 즐비한 갤러리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그림을 집 안에 걸 수 있다면 저만한 벽이 집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광활하다는 말밖에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 캔버스와 거기에 낙서처럼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연주자보다 나이 든 악기를 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것이 생각난다. 음계를 짚는 손가락은 얼마나 진지한가. 목소리는 결국 넉넉한 자본과 세월에서 흐르는 것이었음을, 나는 생각했다.


시인은 당시 옆에 있던 '그'와 뉴욕 곳곳에서 전시를 감상하며, 자신은 진실을 전시하고 거짓말이라고 말할 거라고 그게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전적 예술을 하는 방법은 재료를 '나'로 쓰는 방법뿐이라고 예술가의 작품에 공감한다. 시인이 현재 하는 창작 활동이 이때의 다짐과 공감을 재현하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뉴욕 생활이 담긴 에세이까지 읽고 나니, 시인이 텍스트로 펼쳐보인 전시실은 어쩌면 이 시집의 필연적인 구성일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던지는 삶은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질문을 던지는 미술관의 경험은 인생의 파편으로 녹아들어 또 다른 예술의 자양분이 된다. 상호 호환 혹은 상호 교환되는 예술과 삶의 데칼코마니를 이소호 시집이 압축하여 표현해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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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벗으면 되지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양지연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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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타케 신스케 신간이 나왔길래 온라인 서점에서 책 미리보기부터 들춰봤다. 미리보기에서 마음이 사르르 녹아 바로 구매했다. 역시 요시타케 신스케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세상은 나름 귀엽다고 믿게 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금세 기분 좋아지게 만든다.

 

심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새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고 생각을 전환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불행했으면’ 하는 악한 마음은 파도에 흘려 보내고, 친구가 없으면 귤에 표정을 그려넣어 친구를 만들고 혹은 동물에게 말을 건다. 너무 뜨거워서 먹을 수 없다면 식을 때까지 다 함께 호호 불면 된다. 해결책은 우리의 고민보다 간단하다! 맞아! 간단해(^ㅠ^)(초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스트레스 푸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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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1
아니 에르노 지음, 김선희 옮김 / 열림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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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아니 에르노의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책은 그의 에세이에 가깝다. 실제로 치매에 걸린 그의 어머니를 지켜보며 그가 ‘경악과 혼란을 겪는 가운데’ 쓴 글이며, ‘고통의 잔재’를 옮긴 글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 글을 쓴 뒤 십 년이 지난 1996년 작가의 말에서, “나는 추호도 어머니 곁에 있었던 순간들을 수정해서 옮겨 적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 그대로 그가 무의식적으로 적어 내려간 글은 점점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고 아니 에르노가 순간마다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어린 날의 자신은 학교 기숙사 운동장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멀리서 어머니를 알아보면 몸을 우뚝 일으켜 세우곤 했다, 고 그는 회상한다. 이제는 어머니가 식당 문 앞에 나타난 딸을 알아보면 어릴 적의 자신처럼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딸을 반긴다. 아니 에르노는 딸 같은 기쁨과 반가움을 느끼는 어머니를, 사랑을 요구하는 어머니를, 벽의 꽃무늬만 봐도 자신의 원피스를 떠올리는 어머니를 보며 자주 울고 싶어지고 죄책감을 느낀다. 어머니는 딸이 되었지만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에, 뽐내던 건장한 체력은 날이 갈수록 바래고 이목구비도 점차 변하기에,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와 연관된 추억을 복기하고 현재를 마주하면서 기록을 이어갈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날에도 아니 에르노는 요양원에 들러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어진 일기를 보면, 그때의 기록이 어머니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또한 몰랐기에 두고두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다.

제 어머니의 여위고 노쇠하고 나약한 신체에 끊임없이 자신의 노화한 미래를 겹쳐보는 아니 에르노.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뒤 이 책을 읽으니 더욱 이상하고 절절한 기분이 되었다. 젊음만 강조하는 TV광고의 편파적인 시선처럼(“하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마치 인생이 아름다움, 젊음, 모험만으로 이루어진 듯 항상 변함없는 이미지만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생에 젊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세월의 여정이고 축적임을 종종 잊고 사는 것(혹은 잊고 싶은 것) 같다. 노화와 죽음이 멀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있음을 새삼 인지하게 되는 일기들이었다. 글쓰기가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큰 위로이자 원동력, 밑거름이 되어주었음을 책을 통해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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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장국영 -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좋을까 그대가 여전히 함께 한다면 아무튼 시리즈 41
오유정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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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아니 표지를 왜 이렇게 잘 뽑았어!'(좋으면 괴성부터 지르는 편) 하며 망설임 없이 구매했던 책. 《아무튼, 장국영》은 장국영과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장국영 옆의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팬심 하나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저자가 장국영을 회고하며 쓴 에세이다.

책은 저자의 귀엽고 열정 넘치는 덕밍아웃의 연속이다. <영웅본색2>의 애절한 공중전화 부스 신에서 장국영을 처음 만난 이래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꺼거의 통역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대학교, 대학원까지 중어중문학과로 간 저자는 잠시 외도(회사생활을 했다.)를 하긴 했지만 이내 상하이에서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땄다. 학위 논문 치사에는 나를 박사로 만든 건 8할이 장국영이라며 꺼거에게 감사 인사를 썼고, 현재도 팬심을 숨기지 않고 중국어 예문에 열심히 장국영 이름을 넣고 장국영 가사를 해석하는 수업 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을 포섭(?)하고 있다. 노영미(장국영 팬들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 팬들을 가리킴)로서 장국영이 사망한 뒤 그를 좋아하게 된 후영미를 연구하는 장국영 팬덤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영화, 음악, 생애를 꿰뚫고 있고 홍콩과 상하이를 거닐며 꺼거 투어를 했던 저자의 이메일이 아이꺼거(사랑해오빠. 꺼거는 장국영 애칭이다.)인 것과 그의 영어 이름이 레슬리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春夏秋冬该很好, 你若尚在场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좋을까, 그대가 여전히 함께 한다면]

나는 지금 이 책에서 언급한 장국영의 ‘춘하추동’을 들으며 독서록을 쓰고 있다. 장국영의 유명한 영화는 다수 봤기에 나름 배우 장국영에 대해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여태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았다. 그의 노래를 각잡고 들어본 것도 처음이다. 발음도 어려운 외국어 가사지만 멜로디만큼은 이상하게 익숙하다. 노래를 가만 듣고 있자니, 90년대 필름 속에 스르륵 들어와 앉은 기분이다. 참으로 다재다능했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떠난 지 열일곱 번의 춘하추동이 지났다. 올해 2021년은 벌써 햇수로 18년째가 된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더 좋아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버린 꺼거가 그는 참 야속하다. 비록 통역사는 되지 못했지만 꺼거로 인해 배운 중국어를 요긴하게 써먹으며 이만큼이나 성장했는데 종국에 꺼거는 기다려주지 않았기에, 때때로 사무치게 그립다. 저자가 애타는 마음과 그리움이 뚝뚝 어린 문장을 쓸 때마다, 꺼거가 머문 과거가 보일 때마다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저자의 치열했던 지난 삶 속에 음악이건 영화건 프로페셔널했고 반짝반짝 빛났던 장국영이, 시대가 저무는 홍콩 영화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던 장국영이 보였다. 저자의 말대로 저자가 살아온 지난 17년은 장국영이라는 참 예쁜 리본이 달린 선물 같은 삶이었다. 누군가의 팬이었던 나의 마음도 하루종일 흔들렸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참 강하다.

[누군가는 꺼거의 얼굴이 평생 어린 왕자 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면 속 40대 초반의 꺼거는 특유의 천진하고 해사한 얼굴에 어느덧 세월의 혼적과 삶의 연륜이 열게 묻어났다. 마냥 순수하고 해맑지만은 않은 모습. 이제는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이 좋다. 다만 거기서 멈추었다는 것이 시리도록 서글폈다.]

저자의 위 문장대로 장국영의 마지막 얼굴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마냥 어린왕자 같지는 않다. 마흔이라는 나이답게 주름이 졌고, 더욱 우수에 젖어 있다. 최근 그의 마지막 영화 <이도공간>이 개봉되어 포스터를 찾아 보았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 없이 ‘그의 마지막 영화’라는 카피에 한참 시선이 머물며 가슴이 아려왔다.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많고, 지금도 계속 꺼거의 후영미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그가 멀리 그곳에서라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만 너무 시대를 앞선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때의 홍콩은, 그때의 세상은 새로운 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불과 17년 전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자존심 강하고 섬세한 완벽주의자에게 쉽지 않은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은 타협하고 살아도 괜찮았을 텐데, 조금은 덜 완벽해도 좋았을 텐데···.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이어도, 우리는 괜찮았을 텐데···. 전설이 되고 싶다던 그는 그렇게 정말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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