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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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책 중 한 문장씩 꼭꼭 씹어 소화시켜서 원할 때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내질러버리고 싶은 책이 있다면 단연 정희진의 책이었다. 예스북클럽 전자책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그의 문장 사유 통찰과 함께 몇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소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책을 평하는 내용 중에 ‘너무 여성주의적으로만 영화를 감상하기 때문에 별로’라는 의견이 있었다. 물론,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해야 한단 건 (편하게 하기 좋은) 옳은 말이다. 허나, 이 평을 쓴 사람은 여성주의 또한 철학 이론이며 정희진은 여성이란 사실을 잊었나 보다. 우선 무엇보다도, 정희진은 이 책에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둔 채 여성주의적으로만 해석하기 급급한,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전복의 글은 편협한 글이 아니다.


남성이 권위를 가진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유전적인 이유로 남성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여성은 사회적인 이유로 남성중심적 사고를 한다. 여성이 여성중심적 사고를 하고, 기울어진 추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이 여성주의에서 비롯된다. 여성에게 여성주의는 신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 등속 이름 붙여진 이론들을 고찰할 때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해 있다.


나는 <피아니스트>를 더럽게 처절한 영화라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말 못할 만큼 처연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됐다. <문라이트>는 해피엔딩이라고 느꼈으나 이젠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여긴다. 정희진처럼 생각하고 정희진처럼 쓰고 싶다. 정희진 학자님은 김혜리 기자님의 글을 한국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난 김혜리 기자님의 글만큼이나 정희진의 글을 좋아한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며 내가 가야할 길이 정말 멀다고 다시금 느꼈다. 텍스트는 어원 그대로 직조된 서사이며 문맥이 있는 꾸밈임을 잊지 말자. 텍스트를 이해하고 소화하는 건 나의 몫.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_<문 라이트> ‘마지막 장면’ 중에서.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 경험은 ‘특수한 경험’이고 서구/남성의 경험은 ‘보편적 이론’이 된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 정신분석학을 여성 문제에 적용했다"는 식의 언설을 싫어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이다. 서구 페미니즘이 한국에 적용될 때도 마찬가지다.
_<디 아워스>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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