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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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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라마톨로지'도 안 읽고 평전을 읽다 

이 책의 저자는 영미권 학자이면서, 데리다의 입장에서 그를 둘러싼 논란을 적극 해명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라마톨로지' 등 데리다 저작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데리다의 철학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 역시 데리다의 저작은 후기 저작으로 분류되는 '마르크스의 유령등' 이후의 몇 권이 고작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초기부터 후기까지 '해체'의 일관된 철학적 전략에 충실했던 데리다의 여정에 끝 부분만 훔쳐본 셈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니...  

이 평전은 인물에 대한 스케치가 아니라, 저작의 통사를 중심에 놓은 '데리다 철학사'에 가깝다. 인물은 지적 행보에 가려지고, 남는 것은 무시무시한 지적인 여행기인 셈이다. 

2. 데리다는 '무엇'인가 

   
 

 그러나 앞선 철학적 조류에 맞추어 넣는 방식으로는 데리다의 독특한 읽기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그때 그들은 데리다의 윤리학, 순수함과 최상의 것을 향한 그의 열망, 또는 미래나 존재자들의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관심이나 그가 과거와 맺었던 관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24쪽)

 
   

 저자는 그동안 '데리다'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읽었던 데리다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평전을 쓰는데, 그것은 위에 인용한 글의 정반대를 실현함으로서 그렇다. 그래서, 연대기적으로 데리다가 작성한 문헌들을 따라가며 이를 씨줄과 날줄 삼아 데리다라는 하나의 철학적 초상을 직조해낸다. 

그런데, 이런 저자의 데리다 읽기는 이 땅에서 나는 나에게 '낯선 대상'에 대한 '사용 설명서'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나름의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느나 그것을 전혀 자각할 수 없었던 자로서 데리다는 그저 정체불명의 '물건'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2중, 3중의 복잡한 문턱을 가지고 있다.  

3. 불필요한 변명과 충실한 문헌조사 

이 책에서 드러나는 데리다는 냉정한 해체의 마법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고정된 것들의 진동을 드러내는 윤리적 교사의 모습이다. 정신분석학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평생의 주제인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은 모두 열려있어 보이는 것의 닫힘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데리다가 '원하는 방식'이었을 뿐 그것이 데리다 철학의 원본인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데리다 철학이 해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문학이론가들에게 열정적으로 받아들여진 일이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거부하는 신수정주의적 경향의 근원에 해체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에코는 해체가 일종의 잡종적 산물(218쪽)이라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나 유럽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던 데리다 철학이 잡종 문화의 상징인 미국에서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체주의 경향의 이론가인 폴 드만이 사실상 반유대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필화사건'에서 데리다가 드 만을 옹호한 것,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강연에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옹호한 일 등은 데리다 철학의 이론적 자장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미국 문화에 대한 편향은 분명히 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의 상관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부분적으로 220쪽에 이런 측면이 나와있기는 하다). 

그런데, 저자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좀더 완벽한 데리다의 초상인 듯하다. 즉, 상반된 지향으로 기워진 알록달록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의 색깔이 채도를 달리하는 그림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 강했다. 그런 점이 못내 앞서 언급한 데리다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저자의 이해관계가 껄끄로웠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이런 좁은 의미에서의 개인사적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제한적으로 알려진 데리다 철학의 문헌사적 치밀함에 있다. 솔직히 처음 듣는 책이나 논문의 제목과 그 내용의 요약을 읽는 것은 참 지루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의 80년대 대표작인 '우편 엽서'가 일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를 통해 역수출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 이런 치밀한 평전의 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4. 기준제작자로서 철학자 

   
  '철학자'는 우리의 철학적 유산들이 아직까지 우세한 사법적이고 정치적인 체계의 구조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너무나 명백히 변화를 겪고 있는 이 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그리하여 실용적이고 실효성 있는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철학자'는 '이해하기'와 '정당화'를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455쪽 재인용)  
   

 어쩌면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하기에 대한 주석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이해에 구애받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싶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된 데리다의 철학자에 대한 정의는 왠지 매력적이다. 이해하기와 정당화를 구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해체의 윤리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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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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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 대단하다. 길이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의 입론을 상호모순적이지 않게, 그리고 의례 기발표글 묶음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어반복없이 써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조정환이라는 저자의 '윤리성'에 돌려져야겠다. 이 책은 매우 체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저 이 책을 위해 쓴 글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높은 유기성을 지닌 글들이다. 그리고 재미있다. 여기서의 재미는 절대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아니라, '생각을 달리 해볼 수 있는 재미'를 말한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자본의 구성으로 포획되어 있는지 설명하는데, 난해한 개념어의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익숙한 상황과 개념을 바탕으로 말한다. 저자가 문학평론가 즉, 텍스트에 대한 2차 생산자가 아니라 철학자였다면 보기 힘든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에 별 다섯개를 주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최소한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토종 이론서가 장사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으면 좋겠다.  

2.  

인지자본주의는 저자의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 운동 즉 자율주의 운동을 계승하는 자율주의 이론가들이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며 내놓은 분석적 개념이다. 그리고 조정환 역시, 그가 몸담고 있는 다중지성의 정원과 함께 국내 자율주의 이론을 생산하는 몇 안되는 이론가이다. 911사태를 인자자본주의의 우세화를 증명하는 변곡점이라고 할 때(70쪽), 인지자본주의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간 자본은 공장안에서 노동력의 상품화를 통해 축적되었다. 그리고 이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런 생산과정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인지자본주의 상황하에서 노동의 중지는 단순히 벌이의 중단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해악이 되는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즉, 더이상 노동은 공장안의 규율을 통해서 통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관리된다. 쉽게 보면, 얼마 전 유성기업의 합법적 파업이 언론과 정부의 마타도어를 통해서 무너졌는지 떠올리면 된다. 고액 노동자들의 파업은, 파업의 논리 자체로 보면 의미없는 말이지만(왜냐하면 파업은 고액/소액의 구분없이 노동자의 법적 권리임으로) 사회적으로는 효과적인 노동통제의 수단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은 사라진다. 다만 비용이 지불되는 노동과 그 노동에 부과되는 노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5장 '착취와 지배의 인지화'이며, 핵심 개념은 '지대'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지대는 자원의 희소성에 의존하지만, 인지자본주의 하에선 '법적 조건'에 따른 독점에 의해 나타난다. 지적재산권이 대표적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500원짜리 음원 판매 수익 중 정작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돈은 100원도 되지 않는다. 나머진 인터넷이라는 유통수단을 소유한 지대추구자의 이윤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증과 울증은 감기와 같은 통상적인 병리현상으로 등장하고, 불편함과 불안함, 기회주의, 냉조주의 등 다양한 정동의 형태들이 등장한다. 이는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정서이지만, 조정환이 주요하게 인용하고 있는 비르노의 입론에 따르면(12장에 서술되어 있고, 특히 421쪽에 적어놓은) 이런 정서적 반응은 모두 지금의 인지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 정념의 양태로 전환될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인자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그안에 그것을 극복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계기들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이중적 체계이다.  

3.  

이 정도가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이 책을 나름대로 소화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재미는 소위 베버리안 사회학자들의 경영담론 비판(서동진 등)과 비교해서 볼 때 돋보인다. 솔직히 그 책들을 봤을 땐 '뭘 해도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기가 질리게 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그럴 수록 구멍이 뻥뻥 뚤리는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제13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간주형식으로 제시된 '메트로폴리스의 기억과 꿈'은 매우 시사적이다. 간주에서 조정환은 우리나라의 국토개발 특히 도시개발의 연대기를 살펴본다. 그것은 한국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세계적인 도시의 변화와 조응한다. 따라서 전세계 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저항들 역시 서울로 대표되는 우리의 도시에도 잠재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전망은 '공통도시'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13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자유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추진되었던 우리의 신자유주의 체계 분석에서도 이어진다. 통상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매우 분리된 개념으로 보기 쉬운데, 조정환은 그것이 함께 등장한 것이 한국적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 형태라고 지적한다(463쪽). 매우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이는 우리의 저항이 세계적 저항과 공명하면서도 우리의 길을 걸어야 함을 역설한다.  

4.  

그간 푸코류의 생정치 담론에 기인한 여러 분석들을 보면서 느꼈던 추상성이 얼마나 구체적인 분석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본문에서 써놓았듯이, 소위 정치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이 가지고 이는 불구성을 효과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의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과 공공예술 담론의 수렴에 관심이 많은데, 파스퀴넬리의 애니멀 스피릿이란 책(519쪽 15번 미주)을 알게해준것도 감사하다. 흠을 잡는다면 그 자체로 흠이 나올 수 있겠지만(이를테면 정동의 긍정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서 '사랑의 재개념화'를 인지적 혁신의 힘으로 삼는 결론부분은, 자칫 믿음의 교리 즉 종교화의 우려가 보이는 부분이다. 506쪽), 장점이 단점을 넘어선다.  

다만 제10장에서 보이고 있는 정치의 재구성이라는 부분이 좀더 별도의 연구를 통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 정치에서 오가는 많은 논쟁들에 개입할 지점들이 보일 것이라 본다. 결국 실천이란 현실의 말에서 시작되는 것일테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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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냥이관리인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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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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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실정치인인 유시민의 글로 채워졌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유시민'이 아니라 '현실정치인'이라는 부분인데, 이는 두가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 책이 학문적 엄밀성을 전제로하고 있지 않다는 한계를 의미하고, 다른 것은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관철되는 논의의 전개라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 이런 책에 대해 리뷰를 할 때는 '뭐 새로운 이야기도 없네'하고 냉소하게 되거나, '오오오, 이것이야 말로 진리'라는 두가지 편향을 보이는데 양자가 사는데 도움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솔직한 경험이다. 

1. 

이 책은, 공교롭게도 리뷰를 쓰는 이가 정치학 석사 나부랭이, 게다가 세부 전공이 정치이론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함량 미달이다. 개론서로 쓸만한 책은 못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인용할 경우 곤란을 겪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예를 들면, 36쪽의 " 홉스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잘 어울리는 이론서와 매뉴얼이다. 홉스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통치기술을 당연히 받아들인다."라는 표현을 보자. 우선 홉스의 국가론에서 신학적 국가론, 즉 국가를 유기체로 바라보는 시각과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현실적 권력기술을 논했던 차이를 제거한다면, 즉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위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 현실주의적 권력관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히려 실천지를 강조한다는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과 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해서 그의 국가론을 '목적론적 국가론'이라는 단정하는 것은 약간 헐겁다. 물론 국가가 선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덕성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그렇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주정을 가장 훌륭한 국가형태로 보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선'이라는 것은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탁월함'에 의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정치는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귀족정과 민주정이 결합된 폴리테이아(혼합정)을 가장 현실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상정했다. 

마지막으로는 소소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288쪽의 각주 6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백성이나 국민보다 많이 쓰였고, 국가라 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지칭하는데 인민(유진오)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나서 "인민이 민주주의, 민권과 관련하여 뿌리 깊고 소중한 우리말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림대에서 나온 <국민 인민 시민>(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103667)이라는 개념사 연구서를 보면, 조선시대에 사용된 인민 개념은 백성보다도 하위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다른 나라를 침략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인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인민이라는 개념은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온 근대적 개념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이 책은 정치적 개론서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2. 

그렇다면 정치 판플렛으로서 이 책은 어떤가.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의 견지에서 '선'을 추구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관철된다. 글쓴이의 국가관은 "이제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세울 때가 되었다"(207쪽)고 말한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개인의 연합체인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며 개개인의 더욱 큰 목적을 실현하는 -여기서는 정의가 되겠다- 수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유시민의 정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샌델의 것'이다. 실제로 몇 쪽 안되는 미주를 보면 유독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인용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직하게 보자면, 유시민의 국가론은 샌델의 정의론에 입각한 국가론이라고 부름직하다. 

여기선 당연히 샌델의 정의론이 쟁점은 아니다. 문제는 현실정치인으로서 유시민의 선택 문제인데, 만약 작년에 히트를 친 <정의는 무엇인가>를 전제로 한 국가론의 소개가 곧 전략적인 판단, 즉 최소한 샌델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진보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국가론에 거부감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쓰여졌다면 참으로 영리한 생각이다.  

게다가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21세기에 베버가 한국사회에 회자되는 맥락이란, 정치적 현실주의를 책임윤리라는 이름으로 강요해야 하는 현재의 정치수준 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문제는 이 책을 대중교양서가 아니라 정치판플렛으로 읽어야 됨에도, 그렇게 읽을 만한 내용이 사실상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권위있는 인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해당 이론가의 주장인지, 혹은 저자 자신의 주장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아마 서론과 맺음말이 유일하게 정치 판플렛으로서의 솔직함이 보이는 공간이다.  

3. 

과거의 <거꾸로 보는 세계사>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골랐다면 실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왜 '국가'를 말하는가에 주목해서 본다면 나름 가치가 있다. 국가와 정부를 명확하게 구분하자고 주장하면서도 결국 정부를 세워 국가의 '선'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애국론인 이 책은, 어쩌면 현실추수주의의 넓은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라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국가의 왼손으로서 참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의 '선'이 수평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올록볼록한 현실지형내에서 3차원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며, 그래서 결국 그 '선의 목록'에서 우선순위를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이 관건이 된다. 아무래도 그 점을 보여면, 유시민의 과거나 혹은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려야 될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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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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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판단'중'을요구한다. 켭켭이쌓아온공동체의관행이있다면정의는용기의다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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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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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다읽지 못했지만,창비특유의 어문규정은 어찌할가나. 후쿠야마가 푸쿠야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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