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가지고 있던 육백여 권의 책은 나오기 전 박스에 넣어 창고에 쌓아두었다. 엑셀로 대략의 목록을 작성하며 두 번 보지 않을 거라 여겨지는 대부분을 처분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은 넘치고 공간은 부족하고 그 짐을 떠안아야 할 가족에 면이 안 섰다. 이제 정말 책을 사고 소유하는 일에 신중을 기할 시점을 맞은 것 같다.

삼십 대에는 좀 달랐다. 읽고 싶은 책을 부지런히 사 날랐다. 한꺼번에 배달되어 온 책을 책상 한켠에 쌓아두고 새 책 냄새에 흠뻑 젖곤 했다. 그 청량한 만족감은 말로 댈 것이 아니었다. 그 책을 어떻게 보관하고 처분할 것인지는 나에게 늙음과 죽음의 거리 만큼 아득했다. 하지만 청춘의 경계를 넘으니 이제 사물을 소유하고 이해한다는 것의 범주와 한계에 시선이 자꾸 머문다. 나는 영원히 살 수 없고 다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대안은 전자책, 킨들이었다. 킨들은 한국책을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스마트폰 만큼의 터치감을 기대할 수 없다. 무엇보다 책의 물성을 느낄 수 없다.
이렇게 창가에서 햇빛이 만드는 격자가 책의 내용을 통과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낭비와 과잉 없이 남을 것들이 있을까 반문하게 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8-02-12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있는 이천권 정도의 한글 책과 만 권 정도의 영어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책 뿐이 아니라 다른 물건도 그러니.... ㅠㅠ

blanca 2018-02-13 02:41   좋아요 0 | URL
만 권의 영어책까지. 꼭 다 읽지 않아도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풍경이긴 해요.^^ 소설가 김연수는 육백 권 정도로 유지하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추리다 보니 많지 않은 양이더라고요.

2018-02-12 0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3 0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3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6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6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8-02-1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창가에서 햇빛이 만드는 격자가 책의 내용을 통과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너무 뭉클한 순간이네요 . 물성을 느낄 수 없죠 .. 전자책은요..

blanca 2018-02-13 02:42   좋아요 1 | URL
전자책도 한참 읽다가 문득문득 아쉬워져요. 그게 그 손에 쏙 들어오는 사철 제본의 책맛은 절대 돌려줄 수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다 가질 수도 없고, 절충점을 찾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장소] 2018-02-13 07:46   좋아요 1 | URL
편리함에 전자책을 찾긴하는데 , 가끔은 글자의 겉만 읽고 있단 느낌에 불안해지더라고요 . 활자라는 건 같은데 종이 책보다 깊이 들여다보기가 잘 안되는 것 같달까요 . 그런데 할인 행사하면 싼맛에 쟁여두게되고 .. 맞아요. 그 절충이 아쉬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