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앤 스콧 지음, 강경이 옮김, 이정호 그림, 안지미 아트디렉터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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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아이의 책장에는 화려한 채색삽화와 이야기가 가득한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와 그 아이의 책을 구경하고 우리집으로 올라가던 길 나는 처음으로 '부러움'과 '시새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의 무게를 느꼈다. 엄마가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그 전집을 사주었는 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책이 고프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아들 둘을 다 서울대에 보낸 아저씨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책 세 권 정도를 살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고르고 재면 뒤통수가 괜시리 따가웠다. 엄마가 한번씩 들러 아저씨의 아들 자랑과 공부 노하우를 들어줘야 조금 더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다고 느꼈었다. 조금 더 커서 대형서점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오랜 시간 책을 고르며 고뇌하고 즐거워하고 초조해하는 즐거움을 덜 눈치를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만 원 안짝으로 몇 권의 책을 안고 나오는 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한 친구는 커서 이 문고 사장 아들과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연히 재회한 그 친구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게 되어 되려 책과 자신의 과거 소망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책의 저자 앤 스콧과 책의 만남은 유년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펭귄문고를 한 권씩 사모으던 오빠와 우연히 식료풍 가게의 빈 오렌지 상자를 들고 와 책장으로 쓰면서 오렌지 향으로 시작된다. 첫 책, 오렌지 향. 그리고 그녀는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밀한 이야기를 품은 서점들과 조우하며 제가끔의 사연을 가지게 된다. 런던,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뉴욕, 옥스퍼드, 아일랜드. 그녀의 서점은 단순히 서점 주인과 손님이 만나 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였던 젊은이가 미래의 위대한 시를 낳게 되는 산실이자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명사가 만나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가게 되는 곳이자 그녀 자신 청춘의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고 시든 곳이기도 하다. 마치 유서깊은 가문의 인장 같은 서점의 상징 도안이 나부끼고 그 서점의 탄생과 성장,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러나 넘치지 않게 복원되는 한 장 한 장은 그 자체로 하나로 완결된 유현한 이야기 같아 호흡을 잠시 멈추고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궁금한 작가에 대해 물으면 거의 세미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서점 직원들이 있었던 컴펜디언 서점. 16세기, 에든버러에 국립출판사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구체적으로 실현했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던 체프먼과 밀러의 출판사가 있었던 곳. 길 건너 아마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로버트 번스가 시인이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템플턴스 서점, 위대하고 또 위대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언어로 눈부시게 그려낸 <새뮤얼 존슨의 생애>를 가능하게 했던 보즈웰과 새뮤얼 존슨이 만남을 가진 토머스 데이비스 서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초판을 팔았던 패럿서점, 그녀의 사랑이 태동했던 바우어마이스터스 서점.

 

태양이 고운 금빛으로 쏟아져내렸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p.169

 

그녀는 이 서점에서 아일랜드 출신 시인 루이스 맥니스의 시집 ,<가을 일기>를 사서 읽어주며 사랑 고백을 했던 '그'와의 아름다운, 나날이 뒷걸음질하거나 머물지 않고 성실하게 성장했던 사랑을 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와의 만남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사랑이 시작되고 자라나고 마침내 스러져 가는 그 길목에 있었던 서점은 그녀의 눈부시고 무모하고 찰나 같았던 청춘을 소중하게 머금고 익어간다.

 

살아남은 곳도 찰나의 역사들과 추억들만을 머금고 덧없이 사라져간 곳들도 그러나 제가끔의 사연들을 충실히 이야기하고 총총히 걸어나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앤스콧의 '나만의 서점' 그녀는 책에 대한 은근한 도취와 집착의 주관과 그 책들을 껴안고 있는 곳의 객관적 사실들이 정확히 만나는 지점에서 신중하게 멈춘다. 그곳으로 가만히 다가가는 일. 참으로 유쾌하고 저릿하고 근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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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2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그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
- 좋은 문장이네요.

시내 교보문고에 애들을 데리고 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이라서
대형 서점을 보고 놀랐지요.
"세상엔 읽을 책이 이렇게 많단다."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성공했지요.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지만 애들과 한 번씩 그런 데서 책을 사는 재미는 여전히 있어요.

blanca 2013-12-24 08:31   좋아요 0 | URL
pek님, 저도 여전히 교보문고 가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제 딸은 매번 자꾸 팬시용품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졸라대서^^;; 그나마도 둘째가 태어나고서는 못가게 되어 버렸지만요. 아이들한테 너무 재미나고 자극적인 것들이 많은 세상이라 저희들 어렸을 때 느꼈던 책에 대한 감동은 저만치 물러난 것 같아 참 아쉬워요...

moonnight 2013-12-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적 제 부모님은 책이란 잠시 스쳐가는 것이지 간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셨죠. 지금 이렇게 게걸스럽게 책을 사모으는 이유가 어렸을 적 사무쳤던 갈증 때문일까 가끔 생각하게 되어요.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고 ㅠ_ㅠ

블랑카님의 리뷰 덕분에 또 한 권의 책을 더 사게 됩니다. 빨리 읽게 될 것 같아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3-12-24 08:32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밤님! 저도 어렸을 때 책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갈증이 지금 책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고등학교 땐가 서점에서 나중에 읽고 싶은 책 다 사리라,고 결심했던 그 기억이 나네요.

icaru 2014-01-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란, 자신의 의미 있는 경험과 결합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 같다는 생각을 또 하네요~ ㅎ 덕분에 또 즐거운 리뷰 읽기랍니다~~!!

blanca 2014-01-03 16:45   좋아요 0 | URL
icaru님 댓글을 읽으니 정말 그런 것같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네요.^^

snow2959 2014-02-0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보고 저도 한권 더 사야겠네요^^ 아! 집에 읽을 책도 많은데 또 한권 지르게되었네요 ㅎㅎ

blanca 2014-02-09 16:33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도 요새 책을 너무 많이 가진 게 아닌가 싶어 하나 하나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도 다 가지고 있을 이유만 잔뜩 있네요.

칸츄리 2014-02-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댓글에동감합니다. 흐음.

blanca 2014-02-09 16:34   좋아요 0 | URL
^^ 저도 딴 건 다 포기가 되는데 참 책 욕심은 나날이 늘어만 가네요. 이것도 하나의 집착이자 소유욕인 듯도 싶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