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체 게바라가 자본주의 속으로?…‘혁명을 팝니다’
[동아일보 2006-04-22 04:59]    

[동아일보]

◇혁명을 팝니다/조지프 히스, 앤드루 포터 지음·윤미경 옮김/460쪽·1만7000원·마티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마이크 시험 중….

자, 자 여러분, 혹시 21세기 진보주의자의 행태에 왠지 이건 아닌데 하는 분들이 계시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세계화의 첨병인 나이키 매장의 유리창을 발길질하는 발에 나이키 신발이 신겨 있는 게 영 마뜩지 않은 분들,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냥했던 체 게바라의 사진이 자본주의 상품들에 찍힌 채 팔리는 것이 어리둥절한 분들은 다 이리로 오세요.

또 자신의 호화주택에서 엽총 자살한 커트 코베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타살당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갸우뚱한 분들, 갱스터 힙합스타들이 서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을 체제 저항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매스꺼운 분들도 오세요.

불특정 다수에 대해 폭탄테러를 가한 유너보머의 주장과 환경론자들의 주장이 너무도 닮은 게 의아한 분들도 빠짐없이 오세요.

이 두 젊은 캐나다의 X세대 철학자들이 떠드는 이야기 좀 들어 보세요. 1960년대 히피문화나 1970년대 펑키문화, 1990년대 힙합과 얼터너티브 록은 모두 환상이란 겁니다. 히피가 여피가 된 것은 배신이 아니라 당연한 진화라고 말합니다. 반체제를 선언한 펑키와 힙합, 얼터너티브가 주류문화로 변신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교묘한 포섭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된 것이었다고요. 코베인의 자살은 천박한 대중문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폐쇄의 회로에 갇힌 젊은이의 퇴행적 자살이라고요.

이들은 다들 성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소비문화에 대한 저항을 주장한 현대적 반문화(counter-culture)의 자식들이란 거지요. 계급혁명의 환상이 사라진 지금 이른바 진보적 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반문화입니다. 왜 갑자기 어려운 문자를 쓰느냐고요?

아, 그거 어렵지 않아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됩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지배하면서 거짓 환상을 불어넣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을 우상시하는 게 반문화란 이야기요. 요놈이 참 재밌는 혈통을 지녔는데 미국에서 엉뚱하게 ‘출세’한 유럽 혈통이란 거요.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의 착취도구로 묘사한 마르크스와 억압은 반드시 분출돼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결합으로 탄생했거든요. 또 히틀러가 자행한 끔찍한 폭력에 교묘하게 대중이 동원된 것을 목격한 게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돼서 국가나 제도에 대한 극도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젊은이들 왈, 이게 모두 히피들이 즐긴 LSD 같은 현실도피와 자기만족의 마약일 뿐이라는 거요. ‘내게 좋은 것’은 ‘세상에도 좋다’면서 자기들은 무책임한 일탈과 방종을 즐기면서 오히려 그들이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공고히 해 주고 있다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제도에 뛰어들어 제도를 바꿔야 하는데 반문화는 제도 밖에서 외도를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자유만큼 질서도 중하단 말이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이 책의 저자들, 진짜 좌파니까.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개입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결국 반문화, 반정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면서 ‘불평등의 해소’를 가장 강조하니까. 원제 ‘The Rebel Sell’(2004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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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깃,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낡은구두님의 리뷰는 지름성이 강해요.

이리스 2006-04-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헙.. 보관함.. ^^;;
 

[문학예술]‘록 우상’ 왜 자살했을까…‘평전 커트 코베인’
[동아일보 2006-04-22 04:59]    
[동아일보]

◇평전 커트 코베인/찰스 R 클로스 지음·김승진 옮김/496쪽·2만2700원·이룸

1991년 그룹 ‘너바나(Nirvana)’는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이 수록된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를 발표하며 록 음악계의 주류를 ‘얼터너티브 록’으로 바꿔놓았다. ‘네버마인드’는 800만 장이 팔렸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은 그룹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이 1994년 27세에 엽총으로 자살하면서 한순간에 끝났다.

기존 권위를 무시하는 돌출행동과 마약 상습 복용으로 점철된 코베인의 모습은 시대에 대한 반항으로 해석됐고 자살마저도 성공과 명예를 거부한 결단으로 읽혔다.

그러나 실제의 코베인은 MTV에 자신의 곡이 자주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인물이었다. 코베인의 드라마 같은 삶을 다룬 여러 편의 전기가 나왔지만 이 책은 천재 록 스타의 모순된 내면을 그의 아내 코트니 러브 등 주변 인물과의 400여 회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세밀하게 복원한 점에서 앞선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독자가 평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모순된 내면을 인터뷰를 통해 세밀하게 복원했다는 점, 이라는 대목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솔깃하여 지갑을 열게 되는게 아닐까 싶다. 평전이 가진 스스로의 한계는 그것이 어떻게 가쉽거리를 모아둔 기사 스크랩과 차별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거는 기대는 절반 정도. 하지만 일단 표지부터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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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2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트코베인..과도한 약물중독에 상습적인 총기장난....
결국은 입에 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겼죠...
그냥 창고에서 록음악을 했었다면 이 청년도 이리 말로가 비참하진 않았을텐데
말입니다...아이러니 하죠..

이리스 2006-04-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 그러게요. 코트니 러브에 관한 내용이 오늘 우연히 케이블 티비 보다 나왔는데 메스껍더군요. 인생이란 참.. --;;
 

“엄마라는 큰 나무 아래서 내가 컸지요”
[조선일보 2006-04-22 02:58]    
소설가 박완서 맏딸 호원숙씨 첫 수필집 ‘큰 나무…’ 출간
엄마 “내 존재 부담될까 걱정” 딸 “소설가 엄마 원망하기도”

[조선일보 김태훈기자]

“책을 낸다는 말은 들었지만 도와주지 않았어요. 글이란 게 원래 혼자 쓰는 거잖아요?”(소설가 박완서)

“원고도 보여드리지 않았죠. 어제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셨고, 오늘 아침 제 책을 보셨어요.”(맏딸 호원숙·수필가)

소설가 박완서씨의 맏딸 호원숙(52)씨가 첫 수필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를 내고 지천명에 이르러 문인의 이력을 새겼다. 1992년 박씨의 문학세계를 다룬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에 ‘모녀의 시간’이란 글을 실었고, 2002년에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란 공저(共著) 책에 필자로 참여한 바 있지만 호씨는 “이전의 글들은 모두 ‘박완서의 딸’로서 쓴 것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어머니와 딸로만 지내온 두 모녀가 20일 오후 경기도 구리시의 박씨 자택에서 ‘문단의 정식 선·후배’로 첫 만남을 가졌다. 책을 낸 이는 딸인데 박씨가 내내 쑥스럽게 웃었다.

“쉰을 넘기도록 가정주부로 살아 왔지만, 한글을 익히기 전부터 文學(문학)이란 한자는 알고 있었어요.” 호씨는 “어린 시절, 집안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제목 가운데 가장 빈도 높은 단어가 ‘文學’이란 한자였고, 나는 그 분위기에 빠져 문학을 꿈꿨다”고 말했다.

호씨는 2003년 모교인 경기여고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으로 봉사하며 인터넷 동창회 사이트에 글을 썼다. 100편 넘게 연재가 이어졌고, 그녀의 글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도드라져 소문이 났다. 이번 수필집이 그 결과물이다.

“원숙이가 내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딸애의 글을 진작부터 봐 왔어요.” 박씨는 그 글들이 “엄마가 아닌 작가의 잣대로 봐도 잘 쓴 글이었다”고 조심스레 평했다. “책으로 안 내길래 ‘발표 욕심은 없는 애로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편으론 ‘내 존재가 부담이 되어서 그런가’ 싶어 미안해 하기도 했죠. 친구가 인터넷에서 딸애 글을 읽고 ‘너보다 잘 쓰는 것 같다’고 평했는데, 쉰 넘은 딸애 글 칭찬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이번 책에서 호씨는,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어머니를 원망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고백했다. ‘우리 가족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만의 세계로 날아가 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함에 마음이 저려와 밥도 물도 먹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213쪽)

호씨는 “독자와 딸 사이에서 거리조절을 못하다가 어머니를 작가로서 존경하게 된 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난 뒤”라고 했다.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작가에 대한 존경과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겹쳐 읽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자신의 책을 정리할 때마다 “지겹게 많이 썼네”라고 했지만, 딸은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서 이겨낸 어머니의 모습과 작품은 말할 수 없는 겸허와 존엄에 차 있어 저리도록 아름다웠다”고 어머니를 평했다.

“실은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책 제목의 ‘큰 나무’는 그늘이 아니었어요. 내 키가 커진 것 같아요.”(딸)

“나도 도와 주고 싶었단다.” 책을 낼 때 도와주지 않은 박씨였지만 앞날의 조언은 잊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쓸 때 곁에서 지켜봤으니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좋은 반응이 있더라도 남발하지 말아라.”(어머니)

(김태훈기자 [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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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저 두분 사이. 그런데 어쩌지? 따님이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은.. -_-;;;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서는,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과연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세실 2006-04-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지난번 박완서님 뵐때 옆에 계시던 분이예요~~ 아 그때 알았더라면 사인 받는건데. 쿄쿄쿄
실제 뵈면 4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으세요~ 와 50대시라니....

라주미힌 2006-04-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사진 보자마자 옛날 그 광고 카피문구가 생각나더라구요.

어느 것이 하늘빛이고, 어느 것이 물빛인가?(대충 이런거)

누가 딸이고 누가 박완서님인가...ㅎㅎㅎㅎ

이리스 2006-04-22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 오호~ 그런가요? 사진이 좀 못나온건가요.. ^^
라주미힌님 / 하하핫... ^.^
 

‘백사난’ㆍ‘사비타’ 도대체 너희들 누구냐
[세계일보 2006-04-22 14:39]    

백사난? 사비타? 정체불명의 인터넷 용어가 아니다. 이름모를 정력제나 약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한국의 순수 창작 연극과 뮤지컬을 각각 대표하는 작품들의 줄임말,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이하 백사난)와 ‘사랑은 비를 타고’(이하 사비타)의 또다른 이름이다.

이들 작품명이 줄여서 호칭되는 이유는 단순히 부르기 길어서라기보다는 연극ㆍ뮤지컬팬들에게 그만큼 친숙해졌기때문. 애칭의 표현에 더 가깝다. 백사난은 이미 2001년 초연 이후 지난해까지 1천여 회 공연을 통해 40만 관객을 동원한 보석같은 흥행작. 사비타 또한 10년이 넘었음에도(95년 초연) 아직까지도 매회 공연때마다 객석 점유율 80%를 넘기며 이젠 특별한 수식어가 사족이 될 정도로 ‘뮤지컬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들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것일까.

▲ 보편적 정서의 승리

백억대가 넘는 초대형 공연도 아니며 웅장한 스펙터클이나 현란한 음향과 무대장치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소재 또한 백설공주 이야기와 형제간 우애라는 상투적인 모티브에다 5분앞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단순한 스토리 라인. 하지만 이속에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포근함이 있다. 백사난은 모든 것을 던져 백설공주를 향해 한결같은 사랑을 춤추는 난장이 반달이의 모습에, 사비타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비오는 밤 형을 위한 생일파티를 클로즈업, 사랑ㆍ슬픔ㆍ웃음을 적절히 혼합해 관객을 서서히 사로잡는다.

언뜻 평범해보이지만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을 딱 재밌게 인지할 만큼 무리없이 변화를 준데다 그 표현방식이 편안하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어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공연 요소요소에 심어놓아 객석마다 ''애착의 끈''을 공유하게 한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쉬운 음악과 내용을 가진 세계최장기 뮤지컬 ‘판타스틱스’가 26년만에 막을 내린다고 하자 공연 중단에 반대하는 편지를 세계도처에서 쏟아낸 관객의 마음과 같은 이유다.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듯이 감동도 돈으로 억지로 만들 순 없다. 백사난과 사비타는 소규모 공연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끌어내며 ‘평범속의 비범’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 팀워크의 승리

백사난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7명. 그러나 주인공 반달이를 포함, 나머지 조연들은 시시각각 1인 다역을 펼치며 극의 흐름에 뛰어든다. 백사난은 사실 반달이에 많은 부분이 할애된 연극이지만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나머지 조연들의 눈부신 희생이다. 특히 커다란 파란 천 하나로 폭풍과 파도를 표현한 부분과 왕비의 저주를 풀기 위해 먼 이웃나라 왕자를 찾아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나는 반달이를 묘사하기 위해 연출된 절묘한 팀워크는 백사난의 또다른 백미. 공연이 끝난후 퇴장하는 관객들을 맞이했던 그들 이마의 땀방울은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일치된 노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비타 또한 형과 동생의 갈등 구조를 우연히 찾아온 도우미 아가씨가 적절히 이완시켜주며 3인 호흡의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작은 무대에 3명이라는 제한된 인원은 개별배우들의 성량이나 연기가 더욱 확연하게 노출되기 마련, 3개의 축 중 어느것 하나가 무너지면 사비타는 크게 허물어질 수 있는 뮤지컬이기에 배우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삼각구도는 상호 보완의 묘를 살리며 오히려 안정감을 더한다. 최고령 유미리로 열연하고 있는 노현희를 비롯, 출연 배우들은 적절한 애드립에 베테랑다운 노련한 연기를 발휘하며 시간이 갈수록 청중을 깊게 빨아들인다.

▲ 고난을 넘어 환희로…아름다운 해피엔딩의 승리

인간은 언제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백사난과 사비타 역시 역경과 고난을 넘어 마지막에 극한의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환희는 그속에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갈등이 일거에 사라지는 고전적 해피엔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짝사랑, 그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몸짓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아픔(이상 백사난), 40살 노총각,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손부상과 꿈의 포기(이상 사비타), 이러한 요소들은 사실 극이 끝날때까지도 완벽하게 해소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떠안은채 30만송이의 안개꽃 속에서 반달이가 죽고 거울속에서 환생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백사난), 비소리 속에 흐르는 두 대의 피아노 선율을 타고 형제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랑’의 엔딩넘버가 흐를때(사비타) 관객들은 아픔이 있기에 더욱 애절하게 느껴지는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극복과 성취’는 사실 표현하기 가장 손쉽고도 어려운 모든 예술작품의 공통 화두. 사비타와 백사난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가슴속 아름다운 정서를 끌어내는 연극과 뮤지컬의 양대 수작이다.

스포츠월드아이닷컴 심현석 기자 (hss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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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직 두 공연 다 못봤다. 주변에는 위의 공연을 여러번 본 사람도 있는데, 글쎄. 이번 마감폭풍 지나면 한번 보러갈까? ^^

이매지 2006-04-2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비타만 봤는데 좋았어요^^ 또 보러 갈까 생각중^^

해적오리 2006-04-2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백사난만 봤는데요, 보다가 울었사옵니다. 꼭 보시와요.

이리스 2006-04-2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날나리님 / 오호, 역시 보시분들은 강추군요. ^.^
 

[세설] ‘다빈치 코드’ 위험한 이유 따로 있다/김정란
[한겨레 2006-04-21 14:27]    

[한겨레] 세설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다빈치코드>의 한국 상영을 한국기독교총연맹이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그 영화가 반기독교적이어서 교회를 모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 작품은 그 인문학적 토대가 대단히 빈약하다. 이 작품은, 예수의 피를 담았다는 거룩한 성배를 유사 고고학적 관점에서 다루면서, 페미니즘 코드를 적당히 혼합시켜 놓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뼈대는 성당기사단의 후예들이 매달려 온 예수의 혈통 문제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생클레르(성당 기사단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프랑스의 탄압을 피해 스코틀랜드로 이주. 생클레르는 “거룩한 광채”라는 뜻) 가문의 혈통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러한 기본 얼개를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헐리웃 스타일의 추리물로 구성한 것이다.

<다빈치코드>는 서구사회가 끊임없이 매달려 왔던 고고학적 성배찾기의 현대적 변용이다. 그것은, 성배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의 자궁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제시한 것을 빼면, 그 발상에 있어 별로 참신하지 않다. 성배=여성의 자궁이라는 기호적 도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다. 성배의 기원은 기독교와 아무 관련도 없다. 그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풍요의 제의와 만나게 된다. 수천 년 전의 수메르 인장(印章)에는 조그만 물통을 들고 신 앞에 서 있는 천상적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 조그만 물통은 신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신적 능력,힌두교 식으로 말하면 범아(梵我-브라만)를 신자 각자에게 배분하는 개아(個我-아트만) 역할을 한다. 그것은 그 풍요와 재생의 능력으로 인해 여성의 자궁과 동일시되었다. 기독교의 성배 신화는 이 고대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게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는 그것이 혈통주의를 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마저 있다. 성배를 둘러싼 이 혈통주의 안에는 서구사회가 그 밑바탕에 지니고 있는 매우 위험한 백인우월주의적 인종주의 싹이 숨어 있다. 성배 신화의 수많은 판본 중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위험한 작품이 13세기 독일 시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인데, 바로 이 작품이 바그너 오페라의 원형이 되었고, 나치 인종주의를 치장하는 신화로 사용되었다. 나치는 볼프람의 작품에 나오는 성배의 성 문잘바예세를 ‘정말로’ 찾기 위해 오랫동안 전담 특수요원을 파견해 법석을 떨기도 했다. 그들에게 성배는 혈통에 불과했던 것이다. 댄 브라운은 중세에 성배를 지칭하던 용어 상그레알을 단지 ‘왕의 피’로 해석함으로써, 성배를 다시 혈통주의적 해석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그 가문의 시조가 여성이라고 해서 인종주의적 혐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빈치코드는 위험하다기보다는 엉성한 작품이다. 한국 기독교는 다빈치코드가 예수의 결혼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듯한데, 이 작품이 위험하다면, 그것은 그 작품이 예수의 결혼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인종주의 혐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의 결혼 문제에 관해 유난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죽음의 문제에 관한 일종의 심리적 강박이다. 성직자의 독신제도는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고대 농경 신화에서 ‘죽음’의 문제가 반드시 ‘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농경문화권에서 죽음의 출현은 반드시 신의 살해 형태로 출현한다. 살해된 신은 공동체 전체를 먹여 살리는 식용작물로 변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식기가 출현한다. 즉, 곧 다시 태어나게 될 식물, 그러나 지금은 썩어 죽는 식물의 죽음이라는 관념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성의 신비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도 성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와 함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지식’을 얻는 순간 즉, 신과의 행복한 합일의 상태에서 쫓겨나 필멸의 존재가 되는 순간, 자신이 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직자의 독신제도는 바로 이 고리를 끊어내려는 노력이다. 다시 태어나는 생명을 만들어 다시 죽음의 순환고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그것은 죽음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그것은 생에 대한 어떤 태도로서 존중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옳은 태도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여러 기록을 참조해 보면, 예수가 결혼했을 확률은 희박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의 결혼 여부가 예수의 존재 의미(신화적이든 역사적이든)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예수가 성서의 주장대로 독신이었든,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결혼을 했든,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영적 건강부터 회복해야 할 것 같다. 다빈치코드의 상영을 막는다고 썩어가는 한국교회가 소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배의 진실한 의미는 댄 브라운이 해석하듯이 예수의 혈통도 아니며, 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단순히 예수의 피를 담았던 잔도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비형태를 담는 형태, 신을 받아들이는 신자의 영혼, 즉 영적 진실을 갈구하는 당신의 존재 그 자체다. 순결한 기사 갈라하드는 성배의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죽는다. 신화는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비형태인 그 무엇을 봄으로써, 형태의 몫, 지상적 육체의 몫의 진도를 끝냈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성배는 그 신비를 말하는 하나의 상징적 참조물일 뿐이다. 빛이 하늘에도 있듯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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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4-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입니다.^^ 김정란 선생님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어서 좋아요.

이리스 2006-04-2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 네, 그렇죠? 그런데 사진속 모습이.. 화장 때문인지 마치 무속인같은 분위기가 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