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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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파괴의 메커니즘 소비사회는 ‘생산-소비’ 가 아니라 ‘생산-파괴’의 메커니즘이다. 체계는 생산성의 타산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를 기획한다. 파괴는 전략적 목적을 지니고 사회의 지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성장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한다 사회의 성장이 평등을 만들어내느냐 불평등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성장 자체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량으로서는 보다 많은 소득과 재화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지만(그래서 복지와 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착각되지만), 경제성장의 중심 자체에 확립되는 것은 ‘왜곡의 과정’이며, 성장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이 ‘왜곡비율’이다.  

체계는 성장을 활용한다 체계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양면적인 것(부와 빈곤, 충족과 불만족, 진보와 공해)을 동시에 산출해내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다. 양극은 항상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체계는 불균형과 구조적 궁핍에 의해 생존한다. 성장이 불평등에 의존하므로, 체계에게는 '성장'이야말로 최적의 생존 수단이다. 성장은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주의적 원칙'을 증명하는 듯 보이면서도(사실, 실제로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일종의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면에서는 '특권 및 지배질서 유지' 기능을 수행하여 체계의 양면성을 강화시킨다.  

소비 과정 소비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1)코드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2)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 (2)의 경우에는 재화가 ‘차이표시기호’로 작용한다. 하나의 차이표시기호는 다른 기호들을 무한하게 지시하므로 (2)의 소비는 자가증식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때 언제나 혁신은 정상(최상류층)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전의 차이표시기호가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회적 거리를 복원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류는 언제나 하류와 차이를 두기 위해 새로운 욕구를 생산해내고, 이러한 욕구가 도미노처럼 상부에서 하부로 끊임없이 '대류'한다.  

체계의 요소로서의 욕구 소비사회의 욕구는 향유나 만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욕구는 '체계의 요소'로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개인과 사물의 관계'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산업사회에서 노동력이 노동자-노동산물의 관계와 무관하고, 교환가치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교환과 무관한 것처럼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는 '욕구'가 그렇다. 욕구는 체계 유지와 존속을 위한 조직적인 요소이다. 욕구는 재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나 위세, 명예 등 상징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사물은 더 이상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관련이 없다. 사물은 이제 전혀 다른 것에 대응한다.  

욕구의 정신분석학적 접근 욕구는 사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는 하나의 팔루스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를 거닐고, 미끄러지고, 전이된다. “어느 한 기표로부터 다른 기표로의 이러한 도주는 결핍에 근거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표층적 현실에 불과하며, 또한 바로 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는 사물 및 욕구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표출되는 것이다.“ 

사회 통제 수단으로서의 소비 소비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며, 강제이고, 도덕이며, 제도이고, 사회화의 양식이다. 소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치체계이며, 체계라고 하는 용어가 집단통합 및 사회통제의 기능으로서 포함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비를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이것은 사실 '19세기에 행해진 농촌인구의 산업노동에의 대대적인 훈련'의 20세기에서의 등가물이며 그 연장이다. 19세기의 체계가 노동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체계는 소비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화하고 통제한다. 소비는 새로운 양식의 ‘사회적 노동’이며, 체계는 힘센 노동자, 즉 욕망에 가득찬 소비자를 필요로 한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는 소비자들을 어느 한 코드에 집단적으로 배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효과가 결코 어떤 사회적인 위력이 되지는 않는다. 소비는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이고 그 구조는 대단히 유동적이고 폐쇄적이다. 따라서 소비사회는 구체적인 부정(否定)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집단적인 연대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소비의 대상(재화)은 지위의 계층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19세기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로 작동하는 체계이고 상호간에 유비가 가능할지라도 소비사회에서는 계급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선전과 개성 선전은 ‘차이를 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의미작용을 갖는다. 선전이 만들어내는 ‘개성화의 차이’는 개인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게 아니라 무한 척도 위에 서열화시킨다. 사람들은 선전을 통해 추상적인 어떤 모델이나 특정 양식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다. 실제적인 개성, 차이, 특이성은 포기된다. 코드(차별적인 몇가지의 도식, 예를 들면 의류패션에서 무슨무슨 '룩')에의 복종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가치들이 유동적인 서열로 통합된다. 개성은 더 이상 개인의 내부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개성은 유명인사나 패션잡지, 디자이너들이 독점적으로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함으로써(소비함으로써) 개성을 획득한다. 

여성적 모델과 남성적 모델 남녀 모델은 대립적 이미지를 지니며, 양자의 차이가 소비의 질서를 유지한다. 남성적 모델은 명예와 용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까다롭게 따져서 과감하게 선택한다. 여성적 모델은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모델은 직접적인 경쟁에 들어가지 않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 선택을 당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적 모델이 소비의 모든 영역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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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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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알차다. 사이즈도 큼직하고, 색채도 선명하고, 부분확대 사진도 많고.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중세 시대 그림들이다. 중세 그림은 바로크 회화처럼 순간적인 압도감을 주지는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그리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투박한 형식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재능처럼 느껴진다. 중세의 그림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중세가 꼭 암흑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광기가 단지 교정해야 할 장애가 아닌 예지적 영감으로 추앙받던 세상, 밤하늘에 천사가 떠다니고 괴물과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던 세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했을까. 이 책을 펼쳐놓고 중세인들이 느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면, 첨단 과학의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메마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너무나 많이 파헤친 나머지 앙상해져 버린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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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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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부만 정리해본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대략 1970년대 이후로 지칭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질을 지닌다. 첫째, 작가와 작품의 절대적 관계가 해체된다. 작가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작품의 정체성이나 유일성이 의미를 잃는 것이다. 무수한 복제 이미지들이 출현하고 원본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둘째, 모더니즘 예술이 장르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영역의 순수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장르 및 작품 사이의 인용, 혼성, 차용, 융합, 표절, 절충, 교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ex. 게르하르트 리히터- 기하학적으로 확대해놓은 사진 작품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허물기, 정밀회화를 통해 사진과 회화의 경계 허물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더 이상 ‘혁신’이나 ‘새로움의 충격’에 연연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매너리즘을 표방한다. 셋째, 예술 작품에서 보여질 수 있는 온갖 형식적 실험은 모더니즘 시대에 종결되고,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형식’이 아닌 ‘내용’을 주목하게 된다. 관람자는 새롭게 제시되는 형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자에서, 작품이 꺼내는 담론을 능동적으로 읽어내는 독해자가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이 꺼내는 이야기는 지극히 다성적인 코드로서 관람자에게 다양한 읽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이 꺼내는 이야기, 즉 현대미술의 관심과 화두는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름아닌 ‘타자’의 예술을 제시한다. 계급구조, 인종, 젠더, 변방 문화, 가부장 구조, 자본주의,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 등. 현대미술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과거의 선동 미술과 다른 점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이다. 

작가는 죽었는가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보드리야르, 리요타르 등으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사유의 흐름은 공통적으로 주체의 죽음을 천명한다. 리요타르 등 주체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주체의 붕괴와 증발이 오히려 주체의 복수화, 대중화, 다원화를 가져오며 이는 궁극적으로 창조의 가능성이 무한히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은 현대미술의 양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작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작품과 작가의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 작품이 특정 작가에 귀속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시도 등. 그러나 작가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무수한 작품들이 정작 누구의 작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화랑가에서 고가에 팔리는 현상은 아이러니이며, 결국 주체의 부재를 증명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증명하려는 주체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 현대미술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환경,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 환경미술, 대지미술, 개념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 사이버 아트, 인터렉티브 아트, 로버트 스미드슨, 마이클 하이저, 크리스토, 리처드 롱, 마이클 싱어, 앤디 골드워시, 알랜 손피스트, 해리슨 부부.  

현대미술 속의 테크놀로지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현대미술의 입장은 양면적이다. 테크놀로지를 낙관하는 현대미술가(혁명기 러시아 미술도 이에 해당)들은 테크놀로지를 작품의 풍부한 표현을 위한 ‘도구’로서 응용한 반면, 테크놀로지 문명을 비관하는 현대미술가들(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술)은 테크놀로지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비판한다.  

현대미술과 설치 설치미술은 모든 장르, 양식, 매체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어떠한 혼성적인 장(場)이 된다. 그리하여 설치미술은 관람자가 시각, 청각, 촉각 등을 두루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심리적, 신체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설치미술은 모든 양식이 혼성화, 다원화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미술전시기법이며, 액자를 뛰쳐나간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은 이제 감상자와 함께 어울림으로서 삶과 예술을 긴밀하게 접목시킨다. 설치미술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되는 특수성, 일시성을 가진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한 개인이 영속적으로 사유할 수는 없으나 모든 개인이 일시적으로 공유할 수는 있다. 결국 설치미술은 특정 계층에 의한 문화 독점을 비켜갈 수 있다. 그만큼 문화의 대중화 가능성, 공공자산으로서의 미술품의 가능성, 미술의 민주화 가능성을 가진다. 또한 설치미술은 미술가와 관람자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즉, 제시하고 수용하는 일방 관계에서 제안하고 반응하는 상호대화의 방식으로의 전환.  

건축과 미술의 만남 시대를 훑어보면 미술 장르별 분화와 통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짐을 알수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에 회화, 건축, 조각이 분리되었다가 17세기에는 발전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바로크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가 모더니스트들의 출현으로 다시 분리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예술-비예술, 장르-장르 별로 엄격한 경계를 둠으로서 장르의 독자성을 수호한다. 그러나 1970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함으로서 다시 장르간에 유기적인 통합이 일어나게 된다.  

구겐하임, 현대미술의 새 패트런 미술작품의 후원은 크게 직접 후원(지원금, 포상금 지급), 간접 후원(사설재단이나 개인 수장, 전시, 비평활동), 정부 주도의 공적 후원, 컬렉터나 사립재단의 사적 후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부 주도의 공적인 후원은 전위적인 최전방 미술 사조의 발전에는 별반 득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 탄압의 일환으로 전락하거나 미술의 보수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사적인 후원은 후원자의 다양한 취향이 고려되어 미술 경향 역시 다원적이고 복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50년대 이후 미술사조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데는 구겐하임 재단의 역할이 컸다. 페기 구겐하임의 업적은 후원 주체의 전위정신이 현대 미술 경향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문화식민국을 건설하는데 일조한 구겐하임의 이면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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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
신영복 외 지음,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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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백낙청 선생의 강연 및 토론 내용이 차례대로 실려있다. 그 중 두 번째로 나오는 김종철 녹생평론 발행인- 나는 이 분(함부로 이름을 부르기는 왠지 멋쩍은데 뭐라 해야 할지)을 작년도 창비 봄호에서 <민주주의, 성장논리, 농적(農的) 순환사회>라는 제호의 글로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한겨레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인터뷰를 통해 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이 세 번째인 셈인데, 세 번의 짧은 만남 만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이 분을 혁명가라 부르고 싶다. 성장 중단과 농적순환사회로의 회귀라는 기치를 내걸고 녹색평론이라는 사상지로 무장한 혁명가. 처음에 나는 이 분이 내놓은 대안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심지어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고) 실현 가능성은 영 희박해 보였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이 시대에 무려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영농사회로 돌아가자니!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분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이 분의 말씀은 여전히 '꿈 같은 소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순간 어느새 나도 꿈을 꾸게 된다. 불가능을 꿈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에게 혁명가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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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종철 선생님께는 일종의 경외(?)같은걸 느끼는데요, 그게 참 가슴아프게도 저로써는 죽었다 깨어나도 실천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 계시는거 같아서 말이죠. 한마디로 동의는 하되 따라하진 못하겠습니다 지송, 뭐 이런...-_-;;;;;

수양 2009-05-1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역시 따라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꿈만 꾸고 감탄만 할 뿐이죠. 그래도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꿈이라도 꾸기 시작했다는 게 저로서는 장족의 발전입니다.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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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대개 실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에서 모티브를 끌어와 그것을 모방하고 변용하고 각색하여 소설로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현실에 기생하는 가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설가는 인물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실재하는 대상을 일정 부분 반드시 '숙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에 대한)과 부채감(실재의 대상을 무단으로 도용한 데 대한)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바로 소설가의 비극적인 숙명이 된다. 이승우의 단편 <오래된 일기>는 소설로 인해 부채감과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시 소설을 써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딜레마를 애틋하게 그려낸다. 

작년에 창비 여름호에 실린 이 단편을 몹시 인상깊게 읽은 터라 이렇게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출간된 걸 보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이 반가운 마음이 든다. 표제작으로 삼은 것을 보아 작가도 분명 이 작품에 애착을 느낀 모양이다. 다시 읽어봐도 역시 완벽한 작품이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 모두 문장도 플롯도 정교하고 탄탄하다. 문장은 김승옥 정도로 정확하고 복선이나 암시 같은 소설적 장치에서 심리묘사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의 단편들은 정말이지 정통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결코 범접하지도 못할 중후한 아우라가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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