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중반부에 저자가 종교를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과거에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이란, 인간이 이원론적이고 창조론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성향을 말하는데,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특질을 낳았고, 종교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오늘날 전세계적 광신 현상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물(내지는 부작용)'의 개념은 나방 이야기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나방은 광원을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이용한다. 즉 나방의 비행로는 빛을 기점으로 한 나선 궤도이다. 만약 광원이 달빛이라면 나방은 직선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달빛이 아닌 인공조명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로등 주위를 미친듯이 맴돌고 있는 나방, 그것은 일종의 '불운한 부작용'이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자면 에러가 난 것이다.  

종교 활동(정확히는 광신 현상)을 가로등을 맴도는 나방에 비유한 저자의 탁견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시대의 맹목적인 종교 활동은 오늘날의 자본 사회 시스템과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체나 휴식의 시간이 부재하고 항상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소진시키기를 부추기는 자본 사회의 속성이 광신을 부채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 우리를 현혹하는 가로등, 느닷없이 출현하여 인류를 에러 상태로 몰고 가는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혹 자본 사회 시스템은 아닐까...  

2.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러한 성향들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본능이 종교라는 제도로서 현현하는 것인지도. 뭐랄까, 진화생물학적 자기인식은 너무나 정직해서 차라리 앙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인간만이 가진 형이상학적 욕망, 꿈과 이상과 낭만과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이 과학이라면, 애석하게도 나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원론적인 신을 구상한다. 하나는 본래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이며 반대편의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신, 즉 실존적인 신이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선(善)의 신이라고 하고 후자를 지혜의 신이라고 하는데, 이 두 신의 영역을 조악하게나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선(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신): 절대 진리로서의 정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천상의 세계를 관할하는 신. 이 계(界) 안에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절대 복종과 순응뿐이다. 이 무지하고 순수한 식물성의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온실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대가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목적이길 포기한다. 실존적 자아를 포기한 대가로 그는 절대 안녕의 계에서 평화(이것은 권태의 또 다른 이름이리라)를 누린다.  

2. 지혜(실존적인 신, 이를테면 무신론자들의 신): 성경에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 성경에서는 악마성으로 호도된 신의 존재.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추방된 세계를 관할하는 신. 방만한 자유와 무한한 고통으로 점철된 계(界). 그러나 이 계는 매순간 인간 존재의 주체적 결단을 강요한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그러나 한없이 고통스런 자유)를 부여한 세계. 이쪽의 관점에서 보면,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류 최초의 자기 각성이자 반항이며, 동시에 인간이 실존하기 위한 역사적 첫걸음이다. 

*  

1의 신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야말로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반면, 이 소설에서 창조된 2의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p.349) 

소설의 주인공인 민요섭은 그리스도교적 신에 회의를 느끼고 반대편의 또 다른 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지만 결국 원래의 신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다른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되는 민요섭의 복귀의 변이 인상적이다. “쓸쓸하고 두렵다는 거였소. 웃지 않고 성내지 않는 우리의 신,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꾸짖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 우리의 신- 그런 신에게 이제 지쳤다는 거요,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 판단에서 유리된 행위, 징벌 없는 악과 보상 없는 선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거였소. (...)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읽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p.366)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도 비극적이지만, 주인공들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민요섭이 2의 신에게서도 회의를 느꼈다면, 그는 1의 신으로 복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애당초 누구의 "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고아임을 천명함으로써 쓸쓸함과 두려움과 지친 마음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써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요섭의 다음 과제가 아니었을까. 절망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오로지 순수한 '절망'인 채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1
발리 뒤 지음, 남도현 옮김 / 개마고원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 전반에 대한 배경지식이 희박한 독자들을 향해 현대 철학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이나마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는 저자의 태도가 너무나 곡진하게 와닿는다. 지금까지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으로 이것 저것 읽어본, 대중을 위한 철학 개론서 중에서는 가장 자상한 것 같다. 혹자는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된 나머지 철학의 복잡한 개념들이 도식화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데, 도식화된 기본 개념조차 깔려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이 위험스러울만치 단순한 이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시작하기 마련이고, 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공포는 생각의 결과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란 언제나 옛것이기 때문에 공포도 언제나 옛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새롭다는 걸 알면, 그건 이미 옛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것의 되풀이일 뿐이다. (...) 당신이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대할 때 거기엔 아무런 공포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2. 물론 생각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나날의 삶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거나 직업을 수행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생각은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 기억은 체험, 지식, 전통, 시간을 통해 쌓여온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대응하며 이 대응이 바로 생각이다. (...) 생각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항상 무엇으로 점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점유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공포를 보는 것을 두려워 한다.  

3. 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나의 말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를 통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공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가? 당신은 하나의 공포를 다른 형태들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욕망에는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만 있을 뿐이다.

4. 당신은 아무런 결론 없이, 당신이 공포에 관해 축적해 온 지식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이지 공포가 아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처음으로 과거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당신의 마음이 문제와 불안에 관해 속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지껄이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듯이,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에만 당신은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공포를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리고 공포의 반대인 용기를 끌어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것을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공포의 다른 형태들이 아닌 공포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를 지각할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공포의 세부사항들만을 보거나 당신의 공포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만 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중심 문제, 즉 '공포와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문제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 그래서 만일 당신이 공포를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산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공포와 너무도 완벽하게 살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하게 된다. "공포와 함께 사는 그 실체는 누구인가? 공포를 관찰하고, 공포의 주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포의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관찰자는 자신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죽은 실체, 정적인 존재인가? 그리고 공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 죽은 자인가? 관찰자는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인가?"  

5. 관찰할 때 당신은 관찰자가 아무런 타당성도 알맹이도 없는 관념과 기억의 뭉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며, 한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추상으로써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ㅡ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ㅡ을 안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라고 말하는 관찰자는 공포인 관찰물과 사실상 무엇이 다른가? 관찰자가 공포이며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고 또 관찰자와 관찰물 사이에 있는 시공의 간격이 사라진다. 당신이 공포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ㅡ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때ㅡ당신은 공포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P.67~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 비평 140호 - 2008.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중반부 쯤에 일본문학의 흐름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에서 유독 특화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소설 장르에서 ‘나’라고 하는 주체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하는 것이 그 글의 화두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세대 작가군: 60~70년대 이야기. 냉전시대의 영향인지 몰라도 시대든 개인이든 (이데올로기든 트라우마든)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나’.  

(2)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 세대 작가군: 80~90년대 이야기. 일본 경제의 호황으로 세상을 더 이상 고뇌할 거리가 없는 풍요로운 무대로 인식. 풍요로운 외부세계는 문학의 언어에서 변화하지 않는 배경으로 고정화 됨. 완성된 무대 위에서 ‘나’의 말은 더 이상 공적인 언어가 되기를 지향하지 않고 ‘사적인 웅얼거림’인 채로 부유. (그러나 문학 언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세계에 대한 발언이고 세계를 향한 소통이다. 소설이 사적 웅얼거림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기본적 존재 조건을 부정해 버리는, 그래서 결국 존재의 정당성이 없어져 버리는 자기모순적 상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일본 문학은 이제 다음 (3)번으로 진화한다.) 

(3) 아베 카즈시게, 히라노 케이이찌로오 세대 작가군: 00년대 이후 일본 문학. ‘나’라고 하는 주체가 해체됨. (이제까지 ‘나’를 부여잡고 토론하던 일본 문학계는 아연실색!) ‘사적인 나’가 소멸하고 대신 캐릭터화 된 ‘무한한 나’의 등장. 즉, 오늘날 일본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대로) 작가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사소설 문학의 고전적 방식대로) 작가 자신의 실제 캐릭터를 그대로 작품에 도용하는 것도 아니라, 작가가 직접 자기 자신을 특정 캐릭터로 '자체 튜닝' 시켜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더 이상 고정불변의 통합된 주체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세상이라고 하는 게임 시뮬레이션 속의 캐릭터로 분해서 그때그때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프로그램이 인스톨 될 때마다) 변검술사처럼 전혀 다른 얼굴로 자신을 스스로 바꿔버리는 것. (3)세대도 여전히 (1)세대처럼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지만, 그 작가(주체)라는 것이 그러니까 일관성이 없는 거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어찌 되었든 문학의 흐름과 사상의 흐름이 서로 비슷한 궤를 그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조응'이 빚어내는 리듬과 하모니가 신기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