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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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망과 고독, 죽음에의 관심, 허무와 염세, 한없는 우울에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파괴적이고 악랄한 광기가 엿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동양종교와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 현세를 초탈하고자 하는 열망과 영원성을 희구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에밀 시오랑은 끊임없이 파괴와 죽음과 절망과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그처럼 정열적인 사람도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허무에 대한 집착도 정열의 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에밀 시오랑! 그의 글에 대해 사실 내가 무슨 평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지껏 이토록 정신병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산문을 보지 못했다. 평생토록 죽음을 갈구했으면서도 정작 자살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정신적 발광의 극치를 보여준 사람. 내가 적는 모든 감상은 불필요한 사족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의 글이 내뿜는 마력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속수무책으로 베낄 뿐이었다. 공책에 옮겨적은 구절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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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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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일생의 세부적인 부분들을 모두 인용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책 읽기를 소중한 요소로 삼았다고 고백하며 이런 말을 적고 있다. “본래 말이란 타인의 것이다ㅡ 이러한 단언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면, 적어도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ㅡ. 말의 바다의 공유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랑그’는 생각할 수도 없고, 개인에 의한 구체적인 발어로서의 ‘파롤’도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오에는 타인의 말에 중독됨으로써 자신이 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경지(그래서 자신의 대부분이 타인의 것으로 ‘인용’되어질 수 있는 경지), 심지어는 자신이(또는 자신의 문체가) 완전히 그 사람의 것(또는 그 사람의 문체)으로 잠식되어버리는 경지까지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오에 자신도 소설을 쓰는 내내 3년을 단위로 하여 탐독의 대상을 교체해 왔다고 하면서 그의 경우에는 대상이 블레이크, 단테, 사르트르, 엘리엇 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에는 탐독의 대상이 교체되면서 정서의 기조라든지 소설 문체상에 변화가 오는 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는데, 타인의 문체에 영향 받는 것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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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비밀일기 - 1910 7.29 ~ 10.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항재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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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인류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던 한 인간의 가정생활은 그가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까지도 참혹한 아수라였다. 이토록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의 비밀 일기장은 온통 아내에 대한 증오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사상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와 끝없는 불화를 겪으며 죽을 때까지도 오욕칠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온 세계에 사랑을 천명했으나 결코 자신은 사랑으로 평화롭지 못했던 비운의 성자 톨스토이. 누구나 원대한 이상과 추잡한 현실 사이에서 번뇌와 고통을 겪기 마련이겠지만 톨스토이만큼 그 간격이 컸던 이도 드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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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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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가 유독 흥미롭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하면서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절제와 자기 재판, 자기 검열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안과 밖으로 모두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책 관련해서 친구와 나눴던 채팅을 요약하는 것으로 리뷰를 갈음한다. 

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읽고 톨스토이가 남긴 일기에 관심이 생겨서 어제 학교 가서 톨스토이의 일기를 빌렸다.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보다도 톨스토이라는 사람 자체에 더 관심이 간다. 톨스토이는 확실히 나와 비슷한 인간형인 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은 거장이고 나는 한갓 필부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친: 그 책에서 톨스토이는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나?
나: 그는 굉장한 이상주의자였다. 대외적으로는 작품을 통해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했지만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검열과 자기 재판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가혹하리만큼. 스스로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채찍질했던 사람이다.
친: 빡센 인생을 살았겠군.
나: 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뭐랄까, 나 역시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 간에 끝없이 어떤 괴리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고통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츠바이크의 책에서는 톨스토이의 일기가 자주 인용되는데 스스로를 너무나 자학하는 듯한 그의 일기에 기가 찬다. 
친: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나: 12시부터 2시까지 비기체프와 보냄. 너무 거리낌 없이 말함.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기만적이었음. 2시부터 4시까지 운동. 지구력과 인내력 부족. 4시부터 6시까지 식사, 불필요한 것들을 사들임. 집에 와서는 글을 쓰지 않았음. 게을렀음. 볼콘스키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음. 거기 가서 거의 말을 하지 않음. 비겁함. 옳지 못한 행동을 함. 비겁함, 자만심, 경솔함, 나약함, 게으름.
친: 장난아닌데.
나: 츠바이크는 톨스토이가 소설을 통해서 굉장히 이상적인 사상을 이야기했으면서도 스스로가 일상에서는 그러한 이상을 따르지 못해서 내심 고통받았던 점을 무척 위대하게 묘사하면서 참으로 인간적인 인간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카사노바랑 스탕달은 별로 매력을 못 느끼겠지만 이 톨스토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참 흥미를 느꼈어.
친: 그런데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놓은 이유를 뭐라고 했지?
나: 왜 세명을 한데 묶었냐면, 모두 일생의 많은 부분은 자기묘사에 할애했던 사람들이거든. 소설이나 일기를 매개로 하여 자기 묘사를 보여준 사람들인데 그 질적 수준이 카사노바에서 스탕달, 스탕달에서 톨스토이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거야. 카사노바는 자기 보고, 스탕달은 자기 관찰, 톨스토이는 자기 재판에 가깝지. 그런 점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된 책이기도 해. 나 역시 지금은 카사노바에 가까운 것 같아.
친: 그런데 너는 스탕달의 자기 묘사가 자기관찰의 수준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그게 어떤 것인지?
나: 사실 스탕달의 경우를 자기관찰이라고 하긴 했는데 잘은 모르겠다. 카사노바와 톨스토이의 중간적 단계 정도인 것 같긴 한데, 스탕달이 자기 기만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카사노바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기만을 의도하는 어떤 장치조차 없이 그저 천진난만하고 생각없이 자기를 기술한 게 카사노바였고, 최소한의 어떤 자아상 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다 맞추어 자기를 윤색했던 게 스탕달인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모든 저열한 차원을 뛰어넘은 사람이고.
친: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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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관하여 - 프로이트전집 13 프로이트 전집 13
프로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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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캐고 싶었다. 감정을 분석적으로 들여다 보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의 우울에 대해서 보다 담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절실한 개인적 필요에 의해 읽은 책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들의 상실감이란 전적으로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자신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말들은 사실상 다른 사람, 즉 그가 현재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했던 사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와 같다.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이렇다. 한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한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에게서 냉대를 받거나 실망을 하게 되면 대상과의 관계가 깨지고 만다. 정상적인 결과라면 대상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도가 철회되어 새로운 대상에게 전위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여타 조건 때문에 다른 식의 결과가 초래된다. 자유로운 리비도가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렇게 되기 쉽다. 그러나 자아 속에서도 그 리비도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를 포기된 대상과 '동일시'하는 데만 기여할 뿐이다. 그 결과, 대상 상실은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우울증 환자들이 괴로워 하면서도 즐기는 듯이 보이는 자기 고문은 사실상 위에서 언급한 '대상을 향한 가학증과 증오심 및 복수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대상에 대한 원망이 자기 징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원래의 대상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고, 자신이 직접 그 대상에게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매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고문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환자의 정서적 장애를 불러일으킨 사람, 즉 환자의 질병 발발에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보통 환자의 가까운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울증이 심한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인 단계일 수 있다. 대상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자기를 대상화하여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자신에 대한 리비도로 바꾸는 것, 그래서 대상에 대한 원망 증오 복수심을 자기에게 풀어내는 이러한 우울증이 심해지면 대상으로 향해 발산되었던 그 모든 적개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자기가 자기를 죽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자아는 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저히 압도당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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