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1
발리 뒤 지음, 남도현 옮김 / 개마고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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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반에 대한 배경지식이 희박한 독자들을 향해 현대 철학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이나마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는 저자의 태도가 너무나 곡진하게 와닿는다. 지금까지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으로 이것 저것 읽어본, 대중을 위한 철학 개론서 중에서는 가장 자상한 것 같다. 혹자는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된 나머지 철학의 복잡한 개념들이 도식화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데, 도식화된 기본 개념조차 깔려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이 위험스러울만치 단순한 이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시작하기 마련이고, 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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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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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포는 생각의 결과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란 언제나 옛것이기 때문에 공포도 언제나 옛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새롭다는 걸 알면, 그건 이미 옛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것의 되풀이일 뿐이다. (...) 당신이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대할 때 거기엔 아무런 공포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2. 물론 생각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나날의 삶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거나 직업을 수행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생각은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 기억은 체험, 지식, 전통, 시간을 통해 쌓여온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대응하며 이 대응이 바로 생각이다. (...) 생각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항상 무엇으로 점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점유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비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공포를 보는 것을 두려워 한다.  

3. 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나의 말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를 통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공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가? 당신은 하나의 공포를 다른 형태들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욕망에는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만 있을 뿐이다.

4. 당신은 아무런 결론 없이, 당신이 공포에 관해 축적해 온 지식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이지 공포가 아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처음으로 과거의 간섭 없이 공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당신의 마음이 문제와 불안에 관해 속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지껄이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듯이,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에만 당신은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공포를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리고 공포의 반대인 용기를 끌어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것을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공포의 다른 형태들이 아닌 공포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를 지각할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공포의 세부사항들만을 보거나 당신의 공포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려고만 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중심 문제, 즉 '공포와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문제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 그래서 만일 당신이 공포를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산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공포와 너무도 완벽하게 살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하게 된다. "공포와 함께 사는 그 실체는 누구인가? 공포를 관찰하고, 공포의 주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포의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관찰자는 자신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죽은 실체, 정적인 존재인가? 그리고 공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 죽은 자인가? 관찰자는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인가?"  

5. 관찰할 때 당신은 관찰자가 아무런 타당성도 알맹이도 없는 관념과 기억의 뭉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며, 한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추상으로써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ㅡ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ㅡ을 안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라고 말하는 관찰자는 공포인 관찰물과 사실상 무엇이 다른가? 관찰자가 공포이며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고 또 관찰자와 관찰물 사이에 있는 시공의 간격이 사라진다. 당신이 공포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ㅡ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때ㅡ당신은 공포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P.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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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40호 - 2008.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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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 쯤에 일본문학의 흐름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에서 유독 특화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소설 장르에서 ‘나’라고 하는 주체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하는 것이 그 글의 화두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세대 작가군: 60~70년대 이야기. 냉전시대의 영향인지 몰라도 시대든 개인이든 (이데올로기든 트라우마든)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나’.  

(2)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 세대 작가군: 80~90년대 이야기. 일본 경제의 호황으로 세상을 더 이상 고뇌할 거리가 없는 풍요로운 무대로 인식. 풍요로운 외부세계는 문학의 언어에서 변화하지 않는 배경으로 고정화 됨. 완성된 무대 위에서 ‘나’의 말은 더 이상 공적인 언어가 되기를 지향하지 않고 ‘사적인 웅얼거림’인 채로 부유. (그러나 문학 언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세계에 대한 발언이고 세계를 향한 소통이다. 소설이 사적 웅얼거림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기본적 존재 조건을 부정해 버리는, 그래서 결국 존재의 정당성이 없어져 버리는 자기모순적 상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일본 문학은 이제 다음 (3)번으로 진화한다.) 

(3) 아베 카즈시게, 히라노 케이이찌로오 세대 작가군: 00년대 이후 일본 문학. ‘나’라고 하는 주체가 해체됨. (이제까지 ‘나’를 부여잡고 토론하던 일본 문학계는 아연실색!) ‘사적인 나’가 소멸하고 대신 캐릭터화 된 ‘무한한 나’의 등장. 즉, 오늘날 일본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방식대로) 작가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사소설 문학의 고전적 방식대로) 작가 자신의 실제 캐릭터를 그대로 작품에 도용하는 것도 아니라, 작가가 직접 자기 자신을 특정 캐릭터로 '자체 튜닝' 시켜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더 이상 고정불변의 통합된 주체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세상이라고 하는 게임 시뮬레이션 속의 캐릭터로 분해서 그때그때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프로그램이 인스톨 될 때마다) 변검술사처럼 전혀 다른 얼굴로 자신을 스스로 바꿔버리는 것. (3)세대도 여전히 (1)세대처럼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지만, 그 작가(주체)라는 것이 그러니까 일관성이 없는 거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어찌 되었든 문학의 흐름과 사상의 흐름이 서로 비슷한 궤를 그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조응'이 빚어내는 리듬과 하모니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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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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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 소리 백 번 해봐야 하나도 안 무섭다. 정말 무서운 건 실제로 앓아누워버리는 일이다. 이성복의 시는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미 지독하게 앓고 있을 뿐이다. 다다이즘 미술이 충격적인 까닭은, 그것이 미친 세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미친 세계 안에서 스스로 미쳐버린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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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불교 불교입문총서 20
권오민 지음 / 민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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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사실상 이 같은 실제적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며, 진정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다. 불타가 진실로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생겨남,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이었다. -p.180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열반이며, 불교사상사는 바로 '열반'이라는 개념의 이해와 그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의 탐구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어서 끈다'는 의미를 지닌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괴로움의 원인인 탐욕과 증오, 그리고 무지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 열반을 성취한 이는 인간을 구속하는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로서, 완전한 평화를 갖는다. 평화란 대립과 투쟁과 혼돈이 종식된 상태이기에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p.204  

 
   

삶은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삶과 오롯이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무한한 긍정은 얼마나 자주 극도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사바세계의 이전투구도 멀리서 보면 우주를 수놓는 아득한 무늬가 아닐까. 나는 아직 귀의하려면 멀었나 싶다. 고통의 무늬들을 찬찬히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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